각본을 바꿔 쓰자. - 송담스님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하고 받는 모든 것들은 우리 자신이 각본(脚本)을 써서, 그 각본(脚本), 그 시나리오에 따라서 우리가 연극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각본(脚本)을 쓴 작가는 따로 있고, 배우나 탤런트는 그 각본에 따라서 감독이나 연출자가 그것을 연출을 해 가지고 배우나 탤런트를 잘 선정을 해서 배우나 탤런트로 하여금 연기을 하게 하는데, 각본은 배우나 탤런트가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습니다. 각본에 의해서 감독의 지시에 따라서 최선의 연기를 다할 수밖에는 없는 것이고 배우나 탤런트 지들 맘대로 이리저리 못하는 것인데. 우리의 일생을 무량겁(無量劫)이라고 해도 좋지만, 가깝게 금생(今生) 일생(一生) 이렇게 사는 것만을 우선 생각을 해보자 이겁니다.
우리가 어느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어떻게 어렸을 때를 살고, 어떻게 유치원으로 초등학교 · 중학교 · 고등학교 · 대학을 다녀가지고, 어떻게 누구와 결혼을 했고, 어떻게 이렇게 살아가고, 어떤 자식을 낳느냐? 그리고 일생 동안을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어갔느냐? 생로병사(生老病死)만을 생각해 본다 하면, 그것이 무슨 하느님이나 부처님이나 제석천왕(帝釋天王)이나 또 뭐 염라대왕이나 어떠한 다른 존재가 그렇게 시켜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생로병사(生老病死)는 전부 우리 자신이 그러한 각본을 써 가지고 자기가 그 각본을 따라서 지금 이렇게 태어나 가지고 늘거가고 병들어 마지막 죽어갈 때까지 자기가 쓴 각본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조금도 부모를 원망할 것도 없고, 누구를 원망할 것이 없어요. 선생을 원망할 것도 없고, 사회를 원망할 것도 없고, 국가를 원망할 것도 없어요. 부부간에도 남편이 아내를 원망할 것도 없고, 아내가 남편을 원망할 것도 없어요. 도둑질하다가 감옥을 가도 검사나 판사를 원망할 것이 없는 겁니다. 자기가 도둑질이라는 죄를 지어 가지고 판결을 받아 징역살이를 하는데, 감옥에서 자기를 잡아넣은 형사 검사 판사를 '내가 나가기만 하면은 그놈들 가만 안 놔둔다'고 이를 가는 죄수가 있다면 그거 어떻게 된 것이냐 그말이요.
가끔 전혀 자기는 죄를 짓지 않았는데 억울하게 징역을 산 사람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는 자기를 억울하게 그 징역을 살게 하는 형사나 검사나 판사를 정말 중생으로서는 참 원망 안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보면 그것도 역시 원망할 것이 없어요. 전생이나 과거에 자기가 그렇게 했기 때문에 금생에 그런 억울한 일을 당한 것입니다. 전생이나 과거가 없는 금생(今生)은 없어요. 금생에 우리가 지은 업(業)과 전생이나 과거에 지은 업(業)이 다 연관성 있게 우리의 모든 것이 전개되어 가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전생이나 과거에 지은 업(業)과 금생에 지어가는 업(業), 그런 업(業)들이 합해 가지고 우리의 미래가 열려 나가는 것이니까, 우리는 이미 전생이나 과거에 지어버린 업(業)은 어떻게 할 수가 없으나, 앞으로의 각본을 우리는 고쳐서 쓸 필요가 있다 그말입니다.
사람들은 TV를 보면서 거기서 전개되어 가는 프로그램을 보고 야단들입니다. 드라마가 자기 마음에 안 맞으면은 작가한테 막 편지질을 하고 전화질 하고 방송국에다 그래가지고 ‘그렇게 죽여서는 안 된다, 살려야 한다’고 야단들인데, 그렇게 전국에서 (민원이) 하두 들어오면은 처음에 작가의 생각은 죽일라고 했다가도 하도 그래싸면 그 각본을 바꾼다고 그래요. 근데 그까짓 TV에 나오는 거 별 것이 아닌 드라마일 뿐인데 죽이면 어떻고 살리면 어떻습니까.
사람들이 전생이나 과거에 지은 업(業)이 있어서 금생에 불행한 일만 당하게 되었다 하면, 그 각본이 다른 사람이 쓴 것이 아니고 내가 쓴 각본이기 때문에 금생에는 각본을 달리 쓸 수는 있다 그말입니다. 각본을 달리 써 가지고 어쨌든지 좋은 방향으로 요렇게 틀으면 좀 힘은 들랑가 모르지만, 자기가 쓴 각본을 자기가 방향을 바꿔 나갈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럴 수 있느냐? 미래는 꼭 전생이나 과거에 지은 업(業)만 갖고 되는 것이 아니라, 금생에 우리가 짓는 업(業)까지 합쳐져서 미래가 열리기 때문에 그래서 이것은 '운명론이다, 숙명론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없어요, 불교에 말하는 인과법(因果法 ; 원인과 결과의 이치)은 숙명론(宿命論)도 아니고 운명론(運命論)도 아닙니다. 전생이나 과거에 지은 업(業)을 절대로 무시할 수가 없지만, 금생에 내가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노력하느냐에 따라서 그 업(業)까지 합해져서 미래가 열리기 때문에 우리가 각본을 바꿔 쓰면 된다 그말입니다. 어떻게 각본을 바꿔쓰고 어떻게 노력하느냐에 따라서 인생의 방향은 바꿀 수가 있다 그말입니다. 인과의 법칙(因果法 : 원인과 결과의 이치)을 올바르게 이해를 하고, 올바르게 활용을 해 나가야 한다 이 말입니다.
인과법(因果法)을 잘못 믿으면 완전히 숙명론 · 운명론에 떨어져 가지고 방황하고, 그렇지 않으면 까딱하면 인과법을 믿지 않고, 발무인과(撥無因果) '에잇! 그까짓 인과법(因果法) 소용이 없다'고 한다. 못된 짓을 하면 응당 잘 못살아야 하고 벌을 받아야 하는데, 그렇게 극악무도하고 못된 짓만 하는 사람이 잘사는 경우가 있다 그말입니다. 그러고 정직하고 착하고 참 그런데, 사사건건이 불운(不運)을 당하고 못살고 억울하게 그렇게 일을 당하는 사람도 있고 그러니, 그런 걸 보면 '그것 인과법(因果法) 그거 소용 없다'고, 안 믿는 사람도 있는데 그게 아니거든요.
금생의 지은 업(業만 갖고 미래가 펼쳐진는 게 아니라 전생이나 과거에 지은 업(業)까지 합쳐져서 미래가 펼쳐지기 때문에 전생이나 과거에 워낙 좋은 복덕(福德))을 지어놓았으면 금생에 못된 짓을 해도 당장은 괜찮은 사람이 얼마든지 있어요. 금생에 나쁜 짓 한 건 또 언젠가는 꼭 받게 되지만, 우선 전생이나 과거에 지어놓은 좋은 업(業)이 워낙 많으면 금생에 좀 나쁜 짓 해도 그럭저럭 잘사는 사람도 있어요. 그러나 그건 믿을 것이 못되는 거고. 금생(今生)에 착하고 부지런히 해도 금생에 못 당할 일 많이 당하는 것은 전생(前生)이나 과거에 지어논 나쁜 악업(惡業)이 있기 때문에 금생에 좀 잘해도 별로 좋은 꼴을 못 보는 겁니다.
그래서 인과(因果)의 법칙(法則)에는 금생에 업(業)을 지어 금생에 바로 현실적으로 받는 경우가 있고 현생보(現生報), 금생에 업(業)을 지어 이 다음 생에 받기도 하고 순생보(順生報), 금생에 업(業)을 지어 다음 생, 그 다음 생, 몇 생을 건너뛰어서 받는 수가 있어요 순후보(順後報)가 있습니다. 원인인 업(業)을 지어서 그에 따른 결과를 받는 것은 면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전부 우리의 마음으로 지어서 이렇게 벌어지는 일들이라, 그래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마음은 만법(萬法)의 근원이다』하시고, 『이 세상 모든 것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환상(幻想)이요, 물거품 같은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평범한 범부는 모든 것이 환(幻)인데 이 세상 모든 것이 환(幻)인 줄을 모르고서 환(幻)의 업(業)에 집착을 해 가지고 환(幻, 허깨비)에 끄달리는 거고. 성문(聲聞)은 모든 환(幻)을 굉장히 두려워 해. 생로병사를 굉장히 두려워해서 어떻게 하면 - 죽음이 무서우니까, '죽음을 안 당할라면은 태어나지 말아야겠다. 태어나기만 하면 늙어서 병들어서 결국은 고통스럽게 죽어가니까, 죽음이 없을라면은 태어나지 않아야겠다' 그래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 방법으로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가는 것을 궁극의 목적으로 삼는다. 멸진정(滅盡定)은 영원히 아주 정(定)에 들어가 버린 거여. 그러면 태어나지를 않기 때문에 죽음도 없다. 이게 소승(小乘)의 생각이다. 보살(菩薩)은 이 세상의 모든 경계는 환(幻)이기에 이 세상 모든 것은 본래 없는 것이고 본래 남(生)이 없는 것이라는 겁니다.
눈병이 난 사람에게는 허공(虛空)에 꽃이 피어있는 것처럼 보이듯이 - 우리가 눈동자를 옆에서 요렇게 누루고 보면 해도 둘로 보이고, 달도 둘로 보이고, 뭔 물건도 둘로 보입니다. 여러분 댁에 가서 시험을 해 보세요. 그냥 보면 하나인데, 눈동자를 요렇게 눌러가지고 압력을 가해서 보면 삐뚤어지게 보이고 둘로 보인다 말입니다. 눈이 멀쩡한 사람에게는 허공(虛空) 에는 아무것도 없이 깨끗한데, 눈병이 난 사람은 뭣이 이상한 것이 왔다갔다 하고, 꽃이 피어있는 것처럼도 보이고, 불이 켜진 것처럼도 보이고 그러는데, 눈병만 고치면은 허공(虛空)에 피어있는 것처럼 보였던 꽃이 안 보입니다. 허공에 핀 꽃은 눈병이 생기기 전에도 없었던 거고, 눈병이 완치된 뒤에도 허공에 핀 꽃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명(名)과 상(相), 이름이나 모양이나 그런 것 - 귀로 들을 수 있는 거, 코로 냄새 맡을 수 있는 거, 눈으로 볼 수 있는 거,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六根)을 통해서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육경(六境)을 만나면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육식(六識)이 일어나는데, 그 육식(六識)에 포착되는 모든 것들 그게 명상(名相)이여 명상(名相). 명상(名相)은 환(幻)으로 이루어진 거여. 명상(名相)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꿈, 허깨비, 물거품, 그림자, 메아리 같은 겁니다. 그래서 마음 하나만 공(空)해 버리면 일체의 명상(名相)이동시에 다 공(空)해 버리는 것이다 그말입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명상(名相)을 실제로 ‘있는 것’으로 집착을 함으로 해서,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이 일어나는 겁니다.
어린애들은 크레용이나 연필을 가지고 벽이고 방바닥이고 어디고 마구잽이로 막 그려제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철없는 중생이 자신의 마음으로 일체 경계(境界)를 당해서 온갖 것을 정말 미친 사람이 어떤 연극의 각본을 쓰듯이 종잡을 수 없이 써갈깁니다. 죽일여고 했다가 살리고, 살릴여고 했다가 죽이고, 도둑놈을 갖다가 착한 사람을 만들고, 착한 사람을 어떤 때는 또 도둑놈으로 만들고 이렇게 도무지 종잡을 수 없이 계속 끝이 없는 각본을 써 가는데, 우리 중생이 하는 짓이 바로 아주 미친 정신병자가 연극 각본을 쓴 것처럼 종잡을 수 없이, 우리는 무량겁을 그렇게 그런 각본을 써 왔고 앞으로도 정법(正法)을 믿고 바른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익혀서 자기의 주인공(主人公)을 계발하고 그 주인공을 깨닫는 방향으로 나간 사람은 제외하고는 그렇지 않는 사람은 착하나 악하나 그놈이 그놈이여. 언제 어떻게 변할는지 모르는 거여. 그래 가지고 무량한 세월을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해 갈 거다 그말입니다. 조금 착한 짓 한 사람은 좋은 곳에 태어날 거고, 악한 짓 한 사람은 삼악도(三惡道, 지옥 아귀 축생)에 떨어질 것이고, 천당에 좋은 곳으로 가봤자 받을 만큼 복을 받으면 또 떨어지는 거고, 삼악도에 떨어지면 그 받는 기한이 길고 길어서 언제 삼악도에서 나올 기약 있을런지 모르나, 나와 봤자 또 마찬가지여.
그래서 무슨 소리를 듣든지 '이뭣고?', 무엇을 보던지 이뭣고?' 모든 곳, 모든 때에 '이뭣고?'를 하시라 그말입니다. 우선 당장 괴로운 일이 있는데 '이뭣고?'만 할 수 있느냐? 괴로운 일 자체가 꿈 속에서 등창을 앓거나 어디 종기를 앓는 거와 같습니다. 꿈이라 하지마는 실지로 꿈을 꾸고 있는 동안에는 정말 아픔니다. 꿈 속에서도 무서운 걸 보면 무섭고, 괴로운 것을 보면 괴롭고, 아플 때는 정말 아퍼요. 아프다가, 그렇게 몸부림을 치고 그러다가, 누가 와서 꿈을 깨워주거나 잠을 깨워주어서 눈을 뜨고 보면, 깨고 나서도 한참 아퍼요. 아퍼도 정신을 차려서 보면 진짜는 안 아픈 겁니다 그게.
정말 눈 딱 떠서 정신만 차려버리면 그렇게 아프던 종기가 깨끗이 낫어버리는 거여. 몰록 낫어요, 몰록.
세속의 사전에는 ‘몰록’이란 말이 있는가 어쩐가 모르는데, 불가(佛家)에서는 ‘돈오돈수(頓悟頓修)’라고 ‘몰록 깨닫고 몰록 닦는다’는 것이 전기 스위치를 탁 올리면 찰나(刹那)에 전등이 탁 켜져서 방안이 환해지고 스위치를 탁 내리면은 찰나에 전등이 꺼져서 방안이 깜깜해지듯이, 그 꿈 속에서 앓던 몸의 종기가 잠을 깨자마자 몰록 낫어버리는 겁니다. 차츰차츰 나아지는 게 아니라. 그래서 '몰록'에는 방편(方便), 점차(漸次)가 없습니다. 점차(漸次)라고 하는 것이 없습니다. 차츰차츰 요렇게 나아가는 게 아니라, 찰나(刹那에 탁! 몰록 나아버리는 것입니다. 이궁어시(理窮於是)입니다. 모든 이치가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서 다해 버린 겁니다.
그래서 활구참선(活句參禪)은 차츰차츰 알아 들어가고 차츰차츰 깨달라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계속 '이뭣고?'를 해 가면,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을 계속 의심(疑心)으로 참구(參究)를 해 가면 해 갈수록 꽉 맥혀서 알 수가 없어. 그래 가지고 그 의심(疑心)이 더이상 커질 수가 없고, 더이상 간절할 수가 없는 지경까지 이르면, 우리의 속도 의심으로 가득차고, 온 세계의 무엇을 보나 듣거나 산을 봐도 ‘이뭣고?’뿐이요, 꽃을 봐도 ‘이뭣고?’뿐이요. ‘이뭣고?’를 ‘이뭣고?’들면 있고 놓으면 없어지고 한 게 아니라, 들고 놓고 할 것이 없이 일체처 일체시에 의심이 온 법계(法界)에 가득차게 되서 더이상 커질 수가 없을 때는 어떠한 찰나에 툭! 터지게 되는 겁니다. 통 밑구녁 빠지듯이 의단(疑團이 탁! 터지는 겁니다. 그러면서 자기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석 달 만에 깨달은 사람, 3년 만에 깨달은 사람, 30년 만에 깨달은 사람, 비록 죽을 때까지 못 깨달은 사람도 있을 수가 있으나, 다른 모든 것은 하다가 안 되면 그것은 실패고 소용이 없는데, 이 공부는 끝까지 이 목숨이 다할 때까지 해도 깨닫지 못했어도 그것이 헛일이 아닙니다. 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해 놓은 것은 그대로 그 공덕이 거기에 다 있어서 금방 새로운 몸을 받아가지고, 그 인연(因緣)이 있기 때문에 젊어서 정법(正法)을 만나게 되고, 정법을 믿게 되고, 정법을 실천하게 되면, 젊어서 툭 3일 만에 깨닫고, 한 마디 말끝에 깨닫고, 한철 만에 깨닫는 것이 그 까닭이 있는 겁니다. 전생에 그렇게 하다가 몸을 바꿔서 나왔기 때문에 그렇게 쉽게 몰록 툭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 내가 이렇게 아무리 할라고 해도 안 된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도 ‘그것이 왜 그러냐 하면은 믿음이 적기 때문에 그렇다’ 조실 스님은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결국은 철저하게 믿고 철저하게 해야 합니다. 반신반의(半信半疑)를 하고, 허다가 말다가 하고, 그래 갖고는 언제 깨닫게 되느냐 그 말입니다. 할 때는 정말 철저하게 믿고, 철저하게 믿은 데서 열심히 하면은 거기서 또 분심(憤心)이 나고, 분심 있는 곳에 신심이 더욱 깊어지고 해서, 그래 가지고 결국은 대의지하(大疑之下)에 대오(大悟),즉 의심이 크면 크게 깨닫는다 이 말입니다. 신심(信心), 분심(憤心), 의심(疑心) 이것이 삼요소(三要素)인데, 이 삼요소로 나간다면 누가 못 깨닫게 되느냐 그말입니다.
새해에 우리의 법보가족은 대분심(大憤心)과 대신심(大信心)과 대의단(大疑團)으로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黙動靜) 간에 어떠한 종류의 일을 당하거나, 어떠한 종류의 사람을 만나거나, 어떠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신심 분심 의심 삼요소로써 단속해 나가기를 1994년의 첫 번째 법회를 맞이해서 다 같이 다짐을 합시다.
[인천 용화선원 송담스님 1994년 1월 첫째 일요법회(94.01.02)] 출처: 학림사 오등선원 지대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