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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과 평가 --- 새로운 정치를 위하여

장백산-1 2008. 3. 29. 12:23
기록과 평가 - 새로운 정치를 위하여
번호 70527 글쓴이 유학생수학도(pythagoras) 조회 462 등록일 2008-3-29 05:02 누리172 톡톡0


내가 초등학교 시절에 ‘이달 학습’이라는 초등학생용 문제집이 있었다. 그때는 초등학교에서도 저학년으로 이제 문제집이라는 것을 생전 처음 봤을 때라, 그것이 참 신기하기도 하여 거기에 실린 문제를 하루 이틀 만에 다 풀어버린 적이 있었다. 열심히도 풀어서 끝장을 봤으니, 이제 칭찬받을 일만 남았을 터 인데, 부모님이 한마디 하셨다.

"아이고 풀기만 하면 뭐하냐, 채점을 해야지!"

너무 어려서 그땐 정말 몰랐다. 문제집을 풀면 채점을 해야 한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O, X 표 채점을 했다. 그래서 이젠 다 됐겠지, 칭찬을 기다리는데, 또 한마디 하신다.

"채점을 했으면 틀린 걸 다시 한번 보고 다음에는 안 틀리도록 해야지!"

지금에서 뒤돌아보니 이것은 배움의 길에 있어 엄청난 깨달음이었다. 아무튼, 문제를 풀었으면, 채점을 하고, 채점을 하여 틀린 것이 있으면 다시 봐야 한다는 것을 나는 그렇게 하나하나 차근차근 배우고서야 알았다.

대학에 와서 알게 됐는데, 공자님은 사랑하던 제자 자로에게 이런 말씀을 남기셨더라.

선생께서 자로에게 말씀하셨다. 유야, 너에게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마.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한다. 바로 이것이 안다는 것이다.

채점하고 평가하는 것은 바로,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작업이다. 몰랐던 것, 잘못된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면, 우리는 전보다 나아질 수 없다.

숭례문이 불에 타서 무너지던 날, 나는 포르투갈 친구와 저녁식사를 했다. 나는 푸념을 했다. '국보가 불에 타 사라졌는데, 이것도 얼마 가지 않아 다른 큰일에 덮여 버리겠지. 한국은 너무 다이내믹해서 뉴스 따라가는 것조차 힘들고 피곤하구나' 그리곤 포르투갈의 사정을 물었다. 그곳의 이슈는 무엇인가. 그리고 나는 너무나도 충격적인 대답을 듣는다.

2007년 5월, 영국인 부부가 아이를 데리고 포르투갈의 휴양지로 휴가를 떠난다. 그리고 그 아이는 포르투갈에서 실종된다. 매들린 매캔이라는 이름을 가진 네 살짜리 소녀의 실종 사건. 거의 1년이 다 되어가는, 그 사건이 아마도 포르투갈에서는 지금도 핫이슈일 거라는 것이다. 다이내믹 코리아의 눈으로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일이다. 확인차 방금 포르투갈 뉴스 사이트를 하나 방문해보니, 허걱 정말로 아직도 첫 화면에 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를 부러워했다. '포르투갈은 정말 유토피아구나' '한국은 정말 익사이팅하겠는걸'

우리에겐 너무나도 많은 일이 터지고 있다. 하나의 큰일이 터졌다 하면 곧 또 다른 큰일이 터져 그다지 옛것도 아닌 것을 묻어버린다. 심지어 국가 홍보 문구마저 '다이내믹 코리아' 아니던가? 사실 나는 가끔 이런 다이내믹이란 단어조차 우리를 수식하기엔 밋밋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는 '너무 다이내믹'하다.

이제 50일쯤 지났지만 어느덧 우리의 관심에서 까마득히 멀어져 버린 숭례문. 그 이후로 나는 가끔씩 걱정이 들곤 한다. 언젠가 해인사의 팔만대장경마저 싸그리 불에 타 사라져버렸다는 소식을 듣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런 것이 나 혼자만의 쓸데없는 걱정이었으면 참으로 좋겠지만, 그게 그저 기우일 수만은 없는 것이, 연례행사처럼 반복되기만 하는 음식물 위생문제 같은 것을 보면 더 그렇다.

'그래도 누군가는 숭례문의 화재에서 발견된 우리의 문화재 관리 시스템의 문제점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평가하여, 다시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대책을 만들고 있겠지'라고 생각은 해 보지만, 걱정을 싹 가실만하게 하는 신뢰감이 한국의 공적 기관들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아마도 이것이 대다수 보통사람들의 느낌일 것이리라.

모든 변화가 너무 빨라서, 노출된 문제들을 돌아보고 반성하고 대책을 세워 내실을 다질 여유가 없는 것이, 우리가 시급히 해결해야 하는 과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참여정부가 남긴 기록물들을 그토록 가치있게 여기는 이유는, 기록 자체도 소중한 것이지만, 그것보다도 그렇게 기록을 소중히 여긴다는 마음 자체가 사실은 우리에게 없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훈민정음, 조선왕조실록, 직지, 승정원일기, 팔만대장경, 조선 의궤'를 남긴 기록의 나라인 만큼 없었던 것이라기보다는 잠시 잊혀졌던 것이라는 것이 맞겠다.

기록을 해야 뭘 어떻게 했는지 알 수 있고, 그래야지 이제 잘했는지 못했는지 평가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문제를 풀어봤으면 채점을 해야 하고, 채점을 해 봐야 이제 틀린 걸 다시는 틀리지 않는다'는 것은 초등학생에게도 가르쳐주어야 하는 기본인데, 하물며 국가의 운영에 관한 문제에서야 더욱더 철저하고 치밀한 기록과 평가가 요구될 것은 명백하다.

이제 막 총선을 위한 선거운동이 시작되었다. 선거란 평가를 통해 책임을 묻고 그에 따른 대안을 묻는 우리들 공동체의 축제다. 그러나 지금 선거는 너무 맥이 빠져 있다. 정책과 공약을 말하지 않으니, 기록할 것도 없고, 이렇게 기록할 것이 없으니, 나중에 평가할 것도 없다. 그러니 다음 선거 때가 되면, 그냥 이름만 다르지만 사실은 똑같은 사람들이 나왔다가 뽑히고 떨어지는 일이 반복되는 것이다. 얼마 전에 썼던 '책문 : 웹 2.0을 어떻게 시민주권운동에 활용할 수 있는가'에는 이번 선거에 우리가 좀 더 재밌게 참여하기 위한 생각이 하나 담겨져 있다.

이 정책의 위키피디아가 갖는 또 하나의 기능은 집단의 기억입니다. 위키피디아에 담길 제도, 정책, 법률과 관련된 정당, 정치인, 언론들의 발언들은 시민사회 집단의 협업을 통해 계속 요약, 기록됩니다. 선거 때가 되었을 때 나오는 공약들, 중요한 이슈가 있을 때의 견해들을 기록하여, 시민사회 집단의 기억으로 삼아,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책임 있는 발언을 할 수 있도록 합니다. 그리하여 시민사회가 민주주의를 위협할 수 있는 권력집단들에 대한 감시를 할 수 있도록 합니다.

그리하여 이제 '정책의 위키피디아'와 '토론 시스템'은 모두 집단지성을 활용한 시민사회가 웹에 가진 두 개의 센터가 됩니다. 이 시스템이 의도대로 잘 흘러간다면, 앞으로 정당이나 정치인이나 언론이 공적영역에서 옛날에 했던 발언과 다르다던가, 앞뒤가 안 맞는다든가, 근거가 전혀 없는 황당한 주장들을 하게 되면 모두 처참한 패배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기록과 기억과 평가의 승리를 기대해 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려고 보니, 이것조차 우리에겐 너무 과분한 일인지 모르겠다. 한나라당의 원내대표 안상수라는 사람의 발언이다.

한나라당 안상수 원내대표는 "국가 중대사인 한반도 대운하 문제를 선거판에 끌어들여 표를 얻으려는 행동을 중단하라"며 "총선이 끝난 뒤 전문가들의 과학적 검토와 국민여론을 수렴해 수용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토부 '대운하 추진기획단' 비밀 가동)

이런 민주주의에 대한 아무런 이해가 없는 초딩만도 못한 하수 (이름부터 나는 상수가 아니라니 할 말은 없다만) 에게 정치를 맡기고 있으니, 기본기조차 먹히질 않는다. 아무튼, 이런 것까지 전부 기록하고 기억해서 묵사발을 만들어 주면 좋겠다.

그리고 또 하나 이런 것을 눈여겨보는 것은 어떨까. 지난 대선에서 참여정부는 그 당연히 받아야 할 평가조차 받지 못했다. 혹 그것 자체가 참여정부에 대한 평가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러한 비합리적인 평가로서 한국 사회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것은 국가적 에너지의 손실이다. 당당하고 조리 있게 참여정부를 평가하고, 노무현을 넘어서겠다고 말하는 자. 그들을 지지하는 것이다.

기록과 평가, 새로운 정치를 위한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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