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스님의 날마다 해피엔딩 1936

나는 항상 부족하다는 생각

나는 항상 부족하다는 생각   사람들의 생각에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고 생각해서 그래서 스님들이 수행을 하고 또 신도들도 절에 나와 기도하면서 깨닫기 위해 노력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불교의 근본은 ‘우리들은 본래 이미 깨달아 있는 존재다’ 라는 사실이다. 깨닫지 못한 중생이라는 어떤 존재가 수행을 해서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석가모니께서는 ‘우리는 수행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러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본래 이미 부처’ 라고 하셨다.  일반인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깨닫지 못한 우리들은 깨달음과는 먼 존재다’라는 것이다. 성철, 원효스님과 같은 고승이며 깨달은 선각자들과 자신을 비교하면 ‘나는 너무 못났고, 부끄럽고, 초라하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가 이런 정도 밖에 안 되..

고성제(4) - 괴로움을 거부할수록 괴로움은 계속된다

고성제(4) - 괴로움을 거부할수록 괴로움은 계속된다 괴로움을 거부할수록 오히려 괴로움은 더욱 지속될 수밖에 없다. 괴로움을 거부하는 마음이 바로 내가 스스로 만든 비교 분별 판단 해석한  괴로움을 실체화시키고 강화시키기 때문이다. 강하게 거부한다는 마음은 곧 그 거부하는 대상이 진짜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기인한다. 스스로 만든 분별 비교 판단 해석한 괴로움에 실체성이라는 에너지를 부여한 채,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니, 한 쪽에서는 내 스스로 괴로움을 만들고, 다른 한 쪽에서는 그 괴로움을 거부하며 멀어지려고 하나, 이 두 마음이 다 내 마음이다. 내 마음 하나를 둘로 나누어 하나는 괴로움을 세우고, 하나는 괴로움을 무너뜨리려 하니 이것은 내가 나와 싸우는 것이 아니겠는가. 현실은 그저 지금 여기 ..

필요에 의해 소유하라

필요에 의해 소유하라 욕심이 많은 사람은 이익을 구함이 많기 때문에 번뇌도 많지만, 욕심이 적은 사람은 구함이 적어 번뇌도 없다. 욕심이 적은 사람은 남의 마음을 사기 위해 아첨하지 않고, 마음이 편안해서 아무런 걱정이나 두려움이 없으며, 하는 일에 여유가 있고 부족함이 없다. 이것을 가리켜 소욕(少欲)이라 한다. [아함경]   사람들의 일평생 삶의 모습을 가만히 살펴보면, 욕심을 가지고 그 욕심을 이루기 위해 살고 그 욕심을 성취했을 때 행복을 느끼며, 그 욕심을 성취하지 못했을 때 좌절을 느끼는 욕심과 욕심의 성취 또 실패 그것의 연장이다. 사람들의 욕심은 끝이 없다. 한 가지 욕심을 이루었을 때 연이어 또 다른 더 큰 욕심이 생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죽을 때 까지 괴로움이 끊일 날이 없다. 죽..

고성제(3) - 괴로움이라는 진리 받아들이기

고성제(3)  -  괴로움이라는 진리 받아들이기 괴로움은 사실 지금 여기 있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나의 분별의식으로 내 방식대로 비교 분별 판단 해석해서 나온 산물이다. 그렇기에 지금 여기 있는 현실이 중생의 입장에서는 ‘괴로움’이지만, 현실의 실상을 깨달은 입장이 되면 괴로움 처럼 보였던 현실이 그대로 진실임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대승불교 경전에서는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라는 말을 쓰고, 선(禪)에서는 입처개진(立處皆眞), 촉목보리(觸目菩提)라고 하여, 지금 있는 그 자리가 참된 진실의 자리이며,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세상이 깨달음이라고 했다. 지금 여기 있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면 괴로움이라 생각한 바로 그 현실이 그저 있는 그대로의 진실일 뿐임을 안다. 괴로움이 곧 성스러운 진리임을 아는 것이..

희망이 없는 즐거움

희망이 없는 즐거움 자기 마음대로 일이 성사되는 것이 즐거움이요 자기 욕심을 채우는 것이 즐거움이라고 말하지만 세상은 자기 마음대로만 일이 성사되는 것이 아니니 진정한 즐거움은 바람이 없는 마음이다. 마음에 무언가를 구하고 바라는 것이 있으면 그 바람이 바로 괴로움이다. 마음 속에 바라고 원하는 것을 다 놓아버리면 그 마음이 세상의 즐거운 마음 중에 제일이다. 세상에는 두 가지 즐거움이 있다. 하나는 바라는 마음이 성취되는데서 오는 즐거움이고, 다른 하나는 바람 그 자체를 내려놓아버리는 데서 오는 즐거움이다. 바람의 성취에서 오는 즐거움은 영원하지 않으며, 더욱이 이 세상에서 우리의 바람을 다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무언가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그 마음이 괴로움이다. 바람이란 지금 여기..

고성제(2) - 괴로움이 왜 성스러운 진리일까?

고성제(2) - 괴로움이 왜 성스러운 진리일까? 석가모니 부처님은 중생들이 현실세계를 괴로워하며 살고 있음을 통찰하셨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괴로움’이라는 현실관찰에 대해 ‘성스러운 진리’라고 하셨을까? 그것은 바로 현실이라는 삶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통찰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의 목적은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괴로움이 있기에 괴로움으로부터의 해탈도 있다. 해탈과 열반, 깨달음을 설하기에 앞서 지금 현 상황을 있는 그대로 살펴, 괴로워하고 있다는 현실을 직시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그 현실 위에서 괴로움의 해결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밝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괴로움이라는 현실 통찰은 성스러운 진리가 아닐 수 없다. 진리 탐구의 첫 번째 시작이기 때문이다. 우리 삶의 목적은 귀의(歸..

올 것은 정확히 오고 갈 것은 정확히 간다

올 것은 정확히 오고 갈 것은 정확히 간다 옛것을 너무 좋아하지도 말고, 새것에 너무 매혹 당하지 말라. 사라져 가는 사람에 대해 너무 슬퍼할 필요도 없고, 새롭게 다가와 유혹하는 사람에게 사로잡힐 필요도 없다. 이것이 바로 탐욕이며, 거센 격류이며, 불안, 초조, 근심, 걱정이며, 건너기 어려운 욕망의 늪인 것이다.   오는 사람 막지 말고, 가는 사람 붙잡지 말라.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다만 인연 따라 물 흐르듯 그렇게 내버려 두고, 집착 없는 마음으로 모든 일을 행한다. 물질도 마찬가지. 오는 것 애써 막을 것도 없고, 내게서 멀어져가는 것을 애써 잡을 것도 없다. 경계도 또한 그렇다. 오는 역경계라도 막을 것 없고, 가는 순경계라도 붙잡아 두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익숙한 것이 떠나간다고 서글퍼..

고성제(1) – 인생이 왜 괴로움이지?

고성제(1)  –  인생이 왜 괴로움이지? 불교는 지극히 현실적인 종교다. 그러므로 불교의 총설이라고 할 수 있는 사성제(四聖諦)의 교설의 첫 번째 성스러운 진리인 고성제(苦聖蹄)는 ‘삶은 괴롭다’는 것으로, 현실 세계, 현상 세계에 대한 관찰과, 그 관찰을 토대로 한 중생들의 현실 세계의 실상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중생들이 살고 있는 현실 세계(현상 세계)를 관찰해 보니 없는 괴로움을 세상 사람들 스스로 만들어 스스로 괴롭다는 착각에 빠져 있더라는 것이다. 이렇게 현상 세계를 ‘괴롭다’ 라고 하니, 혹자는, 불교는 허무주의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성급한 결론을 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실로 사성제의 첫 번째 진리인 고성제(苦聖蹄)는, 사람들이 처해 있는 현실 세계를, 조금고 가감 없이, 그저 있..

세상 속에서 그 세상을 초월하라

세상 속에서  그  세상을 초월하라 온갖 생각을 끊어버리되 무기력에 빠지지 말고, 욕심 속에 살되 욕심을 초월하며, 티끌 같은 세상에 살되 티끌 같은 세상을 뛰어넘어야 한다. 역경에도 끄달리지 말고 순경에도 끄달리지 말라. 그리고 만물에게 끝없는 자비를 베풀어라. 차별 있는 환경에서 차별 없는 고요함을 얻어라. 차별 없는 고요함에서 다시 차별 있는 지혜를 보여라. [아함경]   세상 속에 살면서 그 세상을 뛰어넘어야 한다. 일도 하지 말고, 돈도 벌지 말고, 오직 수행의 길만을 가라는 말이 아니다. 세상을 살면서 할 것 다 하면서도 그 세상을 뛰어넘을 수 있어야 한다. 돈을 벌되 돈에 집착하지 않고, 생각을 하되 생각에 얽매이지 않으며, 일을 하되 함이 없이 일을 하는 것, 그렇게 하는 것이 세상 속에서..

괴로움(고/苦)과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진리

괴로움(고/苦)과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진리 사성제(四聖諦)는  연기법의 이치에 기초하여 괴로움,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소멸,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방법을 체계적으로 설하고 있는 교설로써, 곧 십이연기의 가르침을 실천적으로 재조직한 교설이다. 『맛지마 니까야』에서는 사성제(四聖諦)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움직이는 모든 동물들의 발자국들이 코끼리의 발자국에 포섭될 수 있고 코끼리의 발자국이야말로 가장 큰 크기인 것과 같이 어떤 가르침이든 그 가르침들은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즉 사성제(四聖諦)에 포섭된다. 무엇이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인가? 그것은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