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스님의 날마다 해피엔딩 1950

몸 -> 입 -> 생각의 순서대로 실천하라

몸 -> 입 -> 생각의 순서대로 실천하라 나는 본래 풍요로운 존재인데 ‘나는 가난하다, 결핍되어 있다, 부족하다’는 환상을 가지고 살면서 지금까지 결핍과 가난을 창조해온 것이다. 이 생존경쟁에서 이겨내야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산 것이다. 문제는 환상, 착각인 이 생각을 바꾸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내가 본래 풍요로운 존재였다?’ 이것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반문한다. “태어날 때부터 돈도 없고, 아무리 열심히 해도 돈을 많이 벌 수 없는데, 내가 어떻게 풍요롭다는 말입니까? 현실이 그렇지 않은데 어떻게 그렇게 생각을 해요?” 이처럼 자신이 본래 부처이며, 이미 모든 것이 갖춰져 있는 존재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신구의(身口意/몸 ..

집성제(2) - 12가지 괴로움의 원인

집성제(2)  -  12가지 괴로움의 원인 불교는 무엇을 괴로움이라고 하나? 모든 괴로움을 생노병사 우비고뇌(生老病死 憂悲苦惱)라고 한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고, 근심, 슬픔, 고통, 번민으로, 생노병사 우비고뇌는 인간의 모든 괴로움을 포괄하여 설명하는 술어다. 이것을 줄여 노사(老死)라고도 한다. 부처님께서는 생노병사와 우비고뇌로 대표되는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사유해 보았더니, 당연히 그 원인은 생(生)이다. 사실 중생에게는 태어났다는 허망한 착각이 있지만, 진리에서는 태어남도 없고 사라짐도 없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다. 그러나 인간은 몸과 마음 즉 오온이 나라는 허망한 착각을 진실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몸이 태어날 때 나도 태어나고 몸이 죽을 때 나도 죽는다고 착각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본래 풍요롭다는 완전성의 이해

우리는 본래 풍요롭다는 완전성의 이해 모든 수행자들의 공통적인 원(願)은 구류중생(九類衆生), 즉 일체 생명 있는 모든 존재를 깨달음으로 이끌어 완전한 행복에 이르게 하겠다는 것이다.  ‘부처의 완전한 지혜와 자비가 우리에게도 동등하게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 불교의 본 뜻이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가 어리석다고 착각하면서 완전성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본래 부처로 다시 되돌아가자는 것, 그것이 귀의(歸依)다. 절에 갈 때마다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에 귀의하고 삼배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내가 본래 부처요, 법이요, 불법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수행자라는 것이다. 내가 바로 부처라면 무엇이 바뀔까. 부처니까 무한한 풍요로움과 지혜가 나에게 갖춰져있다. 따라서 밖에서 지혜와 물질적인 풍요를 구할..

4성제의 집성제(1) - 십이연기와 집성제

4성제의 집성제(1)  -  십이연기와 집성제 집성제(集聖諦)는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가르침이다. 현실에 대한 여실한 통찰을 통해, 현실을 괴롭다고 파악했으면, 현실이 괴로운 원인이 무엇인지를 규명해 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순서일 것이다. 사고팔고(四苦八苦)라는 괴로움이 생겨난 원인은 무엇일까? 모든 괴로움을 대표하는 괴로움을 불교에서는 사고(四苦)라고 하며, 사고(四苦)는 생노병사(生老病死)라는 4가지 괴로움이다. 이미 태어난 존재에게 가장 큰 괴로움은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병사의 원인은 무엇일까? 십이연기의 유전문을 통해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진리, 즉 집성제를 살펴볼 수 있다. 십이연기의 유전문(流轉門)이란 중생들의 생사윤회라는 괴로움의 유전이 ..

나는 항상 부족하다는 생각

나는 항상 부족하다는 생각   사람들의 생각에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고 생각해서 그래서 스님들이 수행을 하고 또 신도들도 절에 나와 기도하면서 깨닫기 위해 노력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불교의 근본은 ‘우리들은 본래 이미 깨달아 있는 존재다’ 라는 사실이다. 깨닫지 못한 중생이라는 어떤 존재가 수행을 해서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석가모니께서는 ‘우리는 수행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러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본래 이미 부처’ 라고 하셨다.  일반인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깨닫지 못한 우리들은 깨달음과는 먼 존재다’라는 것이다. 성철, 원효스님과 같은 고승이며 깨달은 선각자들과 자신을 비교하면 ‘나는 너무 못났고, 부끄럽고, 초라하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가 이런 정도 밖에 안 되..

고성제(4) - 괴로움을 거부할수록 괴로움은 계속된다

고성제(4) - 괴로움을 거부할수록 괴로움은 계속된다 괴로움을 거부할수록 오히려 괴로움은 더욱 지속될 수밖에 없다. 괴로움을 거부하는 마음이 바로 내가 스스로 만든 비교 분별 판단 해석한  괴로움을 실체화시키고 강화시키기 때문이다. 강하게 거부한다는 마음은 곧 그 거부하는 대상이 진짜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기인한다. 스스로 만든 분별 비교 판단 해석한 괴로움에 실체성이라는 에너지를 부여한 채,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니, 한 쪽에서는 내 스스로 괴로움을 만들고, 다른 한 쪽에서는 그 괴로움을 거부하며 멀어지려고 하나, 이 두 마음이 다 내 마음이다. 내 마음 하나를 둘로 나누어 하나는 괴로움을 세우고, 하나는 괴로움을 무너뜨리려 하니 이것은 내가 나와 싸우는 것이 아니겠는가. 현실은 그저 지금 여기 ..

필요에 의해 소유하라

필요에 의해 소유하라 욕심이 많은 사람은 이익을 구함이 많기 때문에 번뇌도 많지만, 욕심이 적은 사람은 구함이 적어 번뇌도 없다. 욕심이 적은 사람은 남의 마음을 사기 위해 아첨하지 않고, 마음이 편안해서 아무런 걱정이나 두려움이 없으며, 하는 일에 여유가 있고 부족함이 없다. 이것을 가리켜 소욕(少欲)이라 한다. [아함경]   사람들의 일평생 삶의 모습을 가만히 살펴보면, 욕심을 가지고 그 욕심을 이루기 위해 살고 그 욕심을 성취했을 때 행복을 느끼며, 그 욕심을 성취하지 못했을 때 좌절을 느끼는 욕심과 욕심의 성취 또 실패 그것의 연장이다. 사람들의 욕심은 끝이 없다. 한 가지 욕심을 이루었을 때 연이어 또 다른 더 큰 욕심이 생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죽을 때 까지 괴로움이 끊일 날이 없다. 죽..

고성제(3) - 괴로움이라는 진리 받아들이기

고성제(3)  -  괴로움이라는 진리 받아들이기 괴로움은 사실 지금 여기 있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나의 분별의식으로 내 방식대로 비교 분별 판단 해석해서 나온 산물이다. 그렇기에 지금 여기 있는 현실이 중생의 입장에서는 ‘괴로움’이지만, 현실의 실상을 깨달은 입장이 되면 괴로움 처럼 보였던 현실이 그대로 진실임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대승불교 경전에서는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라는 말을 쓰고, 선(禪)에서는 입처개진(立處皆眞), 촉목보리(觸目菩提)라고 하여, 지금 있는 그 자리가 참된 진실의 자리이며,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세상이 깨달음이라고 했다. 지금 여기 있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면 괴로움이라 생각한 바로 그 현실이 그저 있는 그대로의 진실일 뿐임을 안다. 괴로움이 곧 성스러운 진리임을 아는 것이..

희망이 없는 즐거움

희망이 없는 즐거움 자기 마음대로 일이 성사되는 것이 즐거움이요 자기 욕심을 채우는 것이 즐거움이라고 말하지만 세상은 자기 마음대로만 일이 성사되는 것이 아니니 진정한 즐거움은 바람이 없는 마음이다. 마음에 무언가를 구하고 바라는 것이 있으면 그 바람이 바로 괴로움이다. 마음 속에 바라고 원하는 것을 다 놓아버리면 그 마음이 세상의 즐거운 마음 중에 제일이다. 세상에는 두 가지 즐거움이 있다. 하나는 바라는 마음이 성취되는데서 오는 즐거움이고, 다른 하나는 바람 그 자체를 내려놓아버리는 데서 오는 즐거움이다. 바람의 성취에서 오는 즐거움은 영원하지 않으며, 더욱이 이 세상에서 우리의 바람을 다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무언가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그 마음이 괴로움이다. 바람이란 지금 여기..

고성제(2) - 괴로움이 왜 성스러운 진리일까?

고성제(2) - 괴로움이 왜 성스러운 진리일까? 석가모니 부처님은 중생들이 현실세계를 괴로워하며 살고 있음을 통찰하셨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괴로움’이라는 현실관찰에 대해 ‘성스러운 진리’라고 하셨을까? 그것은 바로 현실이라는 삶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통찰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의 목적은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괴로움이 있기에 괴로움으로부터의 해탈도 있다. 해탈과 열반, 깨달음을 설하기에 앞서 지금 현 상황을 있는 그대로 살펴, 괴로워하고 있다는 현실을 직시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그 현실 위에서 괴로움의 해결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밝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괴로움이라는 현실 통찰은 성스러운 진리가 아닐 수 없다. 진리 탐구의 첫 번째 시작이기 때문이다. 우리 삶의 목적은 귀의(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