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급히 선지식을 찾으라
이 산승의 견처에서는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으며, 옛날도 없고, 지금도 없다. 깨닫는 자는 곧장 몰록 깨달을 뿐,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닦음도 깨달음도 없고, 얻음도 잃음도 없다. 일체 모든 때에 다시 다른 법은 없다. 설사 이것을 뛰어넘는 하나의 법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꿈과 같고 환상과 같다고 말할 것이다. 이 산승이 설하는 바는 오직 이것뿐이다.
나의 견처로 보자면, 실제로 여러 가지 도리가 따로 없다. 쓰고자 하면 곧장 쓰고, 쓰지 않으면 그저 쉴 뿐이다. 예컨대 여러 곳에서 육도(六度)와 만행(萬行)을 말하면서 이를 불법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이것은 장엄문(莊嚴門)이며 불사문(佛事門)이지 불법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대들은 육도(六度)와 만행(萬行)을 고루 닦는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모두가 업을 짓는 일이다. 부처를 구하고 법을 구하는 것은 곧 지옥 갈 업을 짓는 것이고, 보살을 구하는 것 또한 업을 짓는 일이며, 경전과 가르침을 살펴보는 것 역시 업을 짓는 일이다. 부처와 조사는 일 없는 사람(無事人)이다.
도를 구하는 이들이여! 그대들은 이 꿈과 환영 같은 세계를 반려자라고 착각하지 말라. 머뭇거리는 사이에 곧장 무상하게 죽음으로 돌아간다. 그대들은 이 세계 속에서 어떤 물건을 찾고 구해서 해탈하려 하는가? 한술 밥을 얻어먹고, 옷을 기워 입으며 시간을 보내더라도 먼저 시급히 선지식을 찾아뵈려 해야지, 대충 시간만 때우면서 쾌락을 좇지는 말라.
✔ 옛 조사스님들의 견처는 참으로 깊고 깊어 가히 부처라 할 만 하다. 일체의 모든 분별을 여의었으니, 거기에 부처라도 붙이지 않는다. 설사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유일한 최상의 ‘한 법’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또한 조사스님의 안목에서는 한낱 쓰레기에 불과하다.
육도만행(六度滿行)이란 보살이 육바라밀(六波羅蜜)을 원만하게 닦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그것조차 선사의 안목에서는 다만 불법을 꾸며주는 장엄문이며, 불사문일 뿐이지 참된 불법은 아니다. 한 법도 내세우지 않고, 모조리 불태워 버린다. 그 어떤 도리를 내세우지 않는다.
사실 육바라밀은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선정(禪定), 정진(精進), 반야(般若)라는 각각의 바라밀을 열심히 닦고 또 닦아가다 보면 결국 그 육바라밀 수행의 결과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방편일 뿐이다.
공부가 된 입장에서 본다면, 저렇게도 말할 수가 있다는 것이지, 저 바라밀을 하나하나 닦아서 완성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견성의 순간, 깨달음의 순간 육바라밀은 몰록 실현된다. 삶 자체가 육바라밀이 된다. 억지로 갈고 닦으려고 애써서 만들어 내지 않더라도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중생들이 열심히 갈고 닦으며 실천하는 육도만행이 선지식의 안목에서는 모두가 업을 짓는 일일 뿐이라고 했다. 부처를 구하는 것은 곧 지옥 갈 업이고, 보살을 구하거나 경전을 공부하는 것 역시 업을 짓는 일이다.
그 모두가 ‘구하고자 하는 것’이니, 이 공부는 구하는 공부가 아니다. 구하는 것은 ‘구하는 자’가 있고, ‘구해야 할 대상’ 혹은 ‘구해야 할 상태’가 따로 둘로 나누어져 있다는 말이기에 분별법이고 이법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런 법문은 말 그대로 일을 다 해 마친 선사의 안목이다.
이런 말을 듣고, 참된 법은 이런 것이니 부처를 구하지도 않고, 경전을 공부하지도 않고, 육바라밀을 실천하지도 않겠다는데 집착한다면 그것 또한 하나의 치우침이다.
이 공부는 공부를 해서도 안 되지만 안 하면 영영 중생으로 남을 뿐이다. 안 하되 해야 하고, 하면서도 하지 말아야 한다. 어떻게 해야 겠다는 생각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는 상황에 몰려 의식이 콱 막혀야 하는 것이다.
불법은 이처럼 부처를 구하고자 발심을 하라고 했다가 다시 부처를 구해서는 안 된다고 하며 빼앗는다. 그것은 진짜로 빼앗기 위해 빼앗는 것이 아니라, 참된 부처를 진정으로 주고자 빼앗는 것이다. 앞서 설명했던 삼구법문의 방식이다.
이것을 통해 이쪽과 저 쪽 어디에도 치우치거나, 머물러 집착하지 않도록 중도로 이끄는 것이다. 어느 한 쪽의 공부 방법을 선택하여, ‘이렇게만 행하면 되겠구나’ 하고 정리를 하고, 그 방법에 머물러 행하게 된다면, 한 쪽에 치우친 것이고, 취사간택한 것이기에 참된 중도가 될 수 없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이것이다’ 하고 딱 정해 주는 법이 없다. 어디에도 의식이 머물게 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이것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될 것이고, 요즘 사람들은 이해가 안 되면, 그것을 공부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공부는 바로 그 이해를 막히게 함으로써 단박에 이해를 뛰어넘는 공부다.
처음에는 조금 어렵더라도 지극한 마음으로 공부를 하다보면, 시절인연이 저절로 성숙되어 애쓰지 않고서도 모든 것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인연이 깃들 것이다.
이처럼 중도를 자유자재하게 세우기도 하고 부수기도 할 수 있는 중도를 빚는 솜씨야말로 선지식의 기량이요 견처다. 쓰고자 하면 곧장 쓰고, 쓰지 않으면 그저 쉰다. 아무 일도 없지만, 모든 일을 다 행한다. 참으로 자유자재하니 오래도록 원만한 보임을 이룬 이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견처가 아닐 수 없다.
이 꿈과 같고 환영과 같은 현실 세계를 사람들은 반려자처럼 끔찍이도 사랑하고 애착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머지않아 곧장 무상하게 죽음으로 돌아간다. 영원한 것은 없다.
그러니 이러한 생겨나고 사라지는 꿈과 같은 생사법(生死法)의 세계 속에서 도대체 어떤 값진 물건을 구하려고 하는가? 이 세속에서의 행복과 값진 가치들은 전부 잠깐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일 뿐, 참된 것이 아니다.
가난하고 볼 품 없이 살더라도, 부자로 살며, 남들 인정받고 살고, 명예와 권력을 쥐는 삶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시급히 깨달아야 한다. 그러자면, 생사법이 아닌 불생불멸법을 찾아야 하니, 그것은 선지식에게서 나온다.
시급히 선지식을 찾는 일이야말로 가장 시급한 일이다.
글쓴이:법상
'법상스님의 날마다 해피엔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임제의현의 선어록] 선의 시크릿 (0) | 2025.03.30 |
---|---|
업장은 소멸이 될까? 아니면 끝내 받아야만 할까? (0) | 2025.03.29 |
대승경전의 일종인 반야심경 (0) | 2025.03.29 |
제대로 복수하는 법 (0) | 2025.03.25 |
[법구경/쿳다까 니까야] (0) | 2025.03.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