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재미 삼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제 얘기라 쑥스럽군요. 평생 안고 갈 비밀로 생각했는데, 당사자인 한겨레신문이 먼저 보도를 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됐습니다. 그래도 좀 민망합니다. [한겨레신문 보도 김도형 선임기자] 보안사 민간인사찰 폭로 과정에 양정철씨 역할 밝혀져 / 윤석양씨에게 받은 사찰자료 한겨레에 건네 / 28일 당시 사건의 주인공들 한자리에 모이기로 1990년 9월24일 저녁. 당시 <언론노보> 기자로 일하던 양정철(47·전 청와대 홍보기획 비서관)씨에게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불안감에 약간 떨렸다. “형 지금 어려운 처지예요. 엄청난 일이예요. 단 둘이서 만났으면 좋겠어요.” 목소리의 주인공은 양씨의 외대 학보사 1년 후배인 윤석양 이병. 당시 윤씨는 보안사에 근무하던 중 김대중, 김영삼, 노무현 등 정치인과 민간인 주요 인사 130여명에 대한 보안사 사찰 기록이 담긴 플로피디스크와 각종 관련 서류를 가지고 전날 탈영해 보안사 요원들에게 쫓기는 신분이었다. 다음날 점심 무렵 서울 종근당 네거리 근처에 있는 중국음식점에서 두 사람은 만났다. 윤씨는 전날 전화에서 귀띔한 대로 엄청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보안사에 있다고 밝힌 윤씨는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자료를 들고 나왔다. 도저히 양심의 가책 때문에 그냥 있을 수 없었다. 세상에 알리고 싶다. 이 내용이 폭로되면 군사독재에 심대한 타격을 입힐 것이다. 형에게 맡길 테니 세상에 알려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양씨는 아무리 후배라고 해도 너무 엄청난 내용이어서 반신반의했다. 일단 “자료를 검토할 테니 시간을 달라”고 한 뒤 윤씨에게 “조심해서 몸을 피해 있어라”라고 신신당부했다. 도청을 우려해서 언노련 사무실로 전화할 때는 제3자를 통해서 공중전화로 하기로 했다. 영화 <모비딕> 소재 윤석양 이병 사건의 숨은 주역 윤씨의 사건을 주요 모티브로 삼은 영화 <모비딕>의 개봉으로 보안사 민간인 사찰사건이 21년 만에 다시 주목을 받고 있는 가운데 이 사건의 폭로 과정에서 양씨의 숨은 역할이 밝혀져 눈길을 끌고 있다. <한겨레>는 당시 윤씨가 들고 나온 사찰기록을 입수한 뒤 독자 취재를 통해서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사건의 전모를 연일 폭로했다. 사건의 여파로 국방장관과 보안사령관이 경질되고 보안사가 기무사로 개편되는 등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낳은 이 사건의 연결고리에 양씨가 개입된 사실이 새로 밝혀진 것이다. 양씨는 최근 <한겨레>와 한 전화통화에서 “보안사 민간인사찰 사건은 한겨레가 사찰자료에도 없는 내용까지 발굴해서 폭로하는 등 진상을 밝히는 데 큰 기여를 했다”며 윤씨와 얽힌 이야기를 자세히 풀어놓았다. 양씨는 자료를 가지고 전국언론동조합연맹(언노련) 사무실에 돌아와 권영길 언노련 위원장(현 민주노동당 의원) 등 간부들과 사찰 자료를 놓고 심야대책회의를 벌였다. 처음에 언노련 관계자들은 윤씨의 주장에 반신반의했으나 플로피디스크에 담긴 내용을 확인하는 순간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일부 관계자들은 “혹시 조직에 타격을 입히기 위한 공안기관의 미끼 아니냐”고 일말의 의심을 풀지 못했다. “당시 언론사의 노조운동이 대단히 활성화돼 있던 때여서 공안기관의 주목 대상이었기 때문에 혹시 폭로가 잘못됐을 경우 조직에 심대한 타격을 입을 것을 우려했죠.” 그러나 양씨가 자료의 일관성, 탈영의 진정성을 충분히 설명하자 참석자들 대부분이 역공작은 아닌 것 같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현역 군인을 미끼로 써서 역공작을 펼치기에는 그 내용이 너무 엄청났던 것이다. 문제는 이것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로 모아졌다. 양씨는 기자로서 언론노보를 통해 특종보도하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그러나 권영길 위원장이 “우리가 욕심낼 게 아닌 것 같다. 다른 곳에 넘기자”고 말을 꺼냈다. <한겨레>와 사주가 있는 다른 신문사 한곳이 거론됐다. “갑론을박 끝에 사주가 있는 신문사는 권력의 압력과 로비에 굴복할 것이라는 결론이 나왔어요. 결국 당시 막 창간한 한겨레에 자료를 넘기기로 의견을 모았죠.”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다른 언노련 간부들과 사무실에서 밤샘을 한 양씨는 <한겨레>에 근무하던 대학 학보사 선배 이인우 당시 경제부 기자(현 기획위원)에게 아침 일찍 전화를 걸어 “굉장히 급하게 만날 일 있다. 나올 때 신경 써서 나와 달라”고 말했다. 이 기자가 출입하던 여의도 증권거래소 근처 커피숍에서 양씨는 사찰자료를 건네며 “모든 것을 인우 형만 믿고 맡긴다”고 말했다. “만약 보도하지 않으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사찰기록 입수한 한겨레, 철저한 사전취재 이 기자는 회사로 돌아와 성유보 당시 편집국장에게 관련 내용을 보고했다. 성 국장은 “사안이 사안인 만큼 최대한 철저하게 취재하되 보안을 잘 유지하라”고 지시했다. <한겨레>는 김종구 당시 경찰청 출입기자(현 논설위원)를 팀장으로 김성걸 기자(현 국방연구원 책임연구원), 곽윤섭 사진부 기자 등으로 취재팀을 구성했다. 이 기자는 취재팀에서 스스로 빠졌다. 공안당국이 윤 이병과의 선후배 관계를 알고 추적해올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취재팀은 전산팀의 협조를 얻어 플로피디스크의 암호를 풀었으나 곧바로 보도하지는 않았다. <한겨레>가 이 사건을 처음 인지한 1990년 9월25일부터 윤 이병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에서 양심선언한 10월4일까지 열흘 동안 특별취재팀을 꾸려 철저한 사전취재를 했다. 당시 인권 및 민주화운동에 큰 활약을 펼치고 있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 윤 이병으로 하여금 양심선언하게 하는 형식을 취했다. 사건의 중대성을 고려해 1보를 특종 보도하는 것보다는 사후에 철저히 추적보도해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 실태의 전모를 파헤치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실제 한겨레 취재팀은 보안사의 사찰 활동을 독자적으로 취재해 보안사가 서울대 근처에서 ‘모비딕’이라는 호프집을 운영하고 있던 사실을 확인해 보도함으로써 윤 이병의 폭로내용에 대한 신뢰성을 높였다. 이인우 <한겨레> 기획위원은 “일주일이 넘는 잠복 취재를 통해 모비딕에 자주 드나들던 차량의 번호판을 확인한 결과 윤 이병 말대로 보안사의 차량임을 확인했다”면서 “이런 한겨레의 취재과정은 영화 <모비딕>에서 그대로 묘사돼 있다”고 말했다. 이 위원은 몇 년 전에 윤석양 이병 사건을 영화화하겠다고 찾아온 박인제 감독에게 취재에 얽힌 뒷이야기를 자세하게 말해주었는데 그것을 참고로 한 것 같다고 말했다. 28일 당시 사건의 주역 한자리에 모이기로 양씨는 “저희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한겨레가 보도를 했다”면서 “지금도 한겨레에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 시대를 뒤흔든 대특종인데 한겨레니까 가능했던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요. 창간 초기 방북취재 계획으로 편집국이 압수수색까지 당하는 상황에서 그만큼 투지가 있었던 것이죠. 저는 특종을 놓쳐 억울하거나 아쉬움은 전혀 없어요. 기분 좋은 일이죠.” 양씨는 그동안 윤씨 사건에 대해 침묵했던 이유에 대해 “제가 일부러 침묵했던 것은 아니고 한겨레에게 역할을 넘겼기 때문에 제 스스로 이야기하는 게 민망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다만 윤씨가 양심선언을 한 이후 한동안 세상과 연을 끊고 꽤 오랜 기간 동안 은둔 생활을 하다시피 한 것이 몹시 마음에 걸렸다고 한다. “하지만 노 대통령이 돌아가신 뒤 석양이가 봉화마을로 조문을 와서 너무 반가웠어요. 잘 지내냐고 안부도 묻고 그랬는데 표정도 밝아졌구요.” 양씨는 언노련 활동 이후 민간 기업을 거쳐 노무현 전 대통령 캠프에 참가해 청와대 홍보기획 비서관을 지냈다. 현재는 <양정철닷컴>을 개설해 정치·사회문제에 대해 글을 쓰고 있다. 양씨는 영화 <모비딕>을 계기로 이인우 기획위원, 성유보 당시 <한겨레> 편집국장, 윤석양씨와 함께 오는 28일 21년 만에 한자리에 모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