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과 현대물리학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청화 큰스님 법문

장백산-1 2015. 3. 9. 13:11

 

 

 

 

 

 

 

阿彌陀佛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청화 큰스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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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삼년결사를 몇 번이나 해 보았습니다. 태안사(泰安寺)에 들어와서 정식으로 대중과 더불어서

한 적도 있고, 그 전에는 혼자 묵언정진(黙言精進)을 여러 해를 했습니다. 더욱더 가깝고 친밀한 감동을

느낍니다. 달마(達磨)스님의 觀心論에 보면, 지금은 돈황(敦煌) 문서들이 發見된 뒤로 달마스님이 쓰신

觀心論이 아니라 신수(神秀)大師가 썼다는 說도 있습니다만, 觀心論에 보면

 

약능요심수도(若能了心修道)면  즉생공이이성(則省功而易成)이요,

깨달을 요(了)자, 마음 심(心)자, 만약 능히 마음이 무엇인가를 깨달아 알고 닦으면

省功而易成이요, 생략할 생(省)자, 공들일 공(功)자, 공을 별로 들이지 않고 이성이요,

쉬울 이(易)자 이룰 성(成)자, 쉽게 이룰 수가 있는 것이고,

 

그 反對로 약불요심수도(若不了心修道)면 내비공이무익(乃費功而無益)이라.

만약 마음이 무엇인가를 깨닫지 못하고, 닦으면 헛수고만 할 뿐 이익이 없느니라.

그런 法門이 達磨스님 觀心論에 있습니다.

 

마음이 무엇인가를 깨닫지 못하고 닦으면 증사작반(烝砂作飯)이라.

마치 모래를 쪄서 밥을 짓는 것과 같아서 밥이 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마음工夫할 때는 꼭 了心修道 하는 그런 쪽으로 工夫를 하여야 이제 工夫도 더 쉽고

또 성취도 빠른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던지 간에 먼저 理論的인 體係가 서야 합니다.

「아인슈타인」이 자기 제자인 「하이젠베르그」에게 한 말도 實驗을 하려고 하면 正確한 理論이

먼저 앞서야 實驗이 제대로 成功할 수 있다는 말을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참선(參禪) 공부, 우리 불도(佛道)를 찾는 工夫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기에 八正道 가운데 정견(正見)이

제일 앞에 앞선단 말입니다. 正見이 먼저 앞서지 않으면 바른 工夫가 못 되는 것입니다. 正見만 明確히

確立이 된다고 생각할 때는 自動的으로 말도 여법(如法)히 해지는 것이고 生覺도 바르게 해지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의 대요(大要)라는 것은 공부해 보면 팔정도(八正道) 가운데 다 들어 있습니다. 참선 공부하는

內容이 다 들어 있습니다. 正見자리에 가서 우리 工夫의 갈림길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根本佛敎쪽으로 正見을 생각할 때는, 正見을 그냥 四諦法門으로나 말하고 人生苦의 原因과

또는 苦의 消滅과 苦를 解脫하는 方法이 八正道로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根本佛敎 小乘的인

八正道의 解釋이지만 大乘佛法으로 생각할 때는 次元이 그렇지가 않습니다. 大乘的인 正見자리에서는

本來是佛자리, 本來 바로 부처의 자리를 우리가 느껴야 합니다. 本來是佛자리, 본래 바로 부처라!

닦은 뒤에 부처가 아니라, 本來 바로 부처라! 이렇게 느껴버려야 이른바 참다운 大乘的인 正見이 됩니다.

 


따라서 本來 부처니까, 無限한 佛性功德을 우리 모두가 다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自己한테 대한 自己의 功德이, 설령 보조(普照) 어록대로 말하면 果佛功德이 分毫不謬라.

果佛功德이 分毫不謬란 말입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인가 하면 釋迦牟尼佛께서나 三世諸佛이 成就하신

佛果功德이 우리 衆生이 成就한 佛果功德과 더불어서 分毫不謬라, 조금도 差異가 없다는 말입니다.

釋迦牟尼부처님만 三明六通을 다 하고 無量한 신통(神通)을 갖춘 것이 아니라, 우리들 한테도

호리불차(毫釐不差)라, 호리도 差異가 없이 갖추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와 같이 果佛功德이 分毫不謬라.

佛果를 成就한 그런 功德이 만중생(萬衆生)과 더불어서 조금도 差異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알아버려야

응당 正信 즉, 信心, 참다운 믿음이란 말입니다. <방성신야(方成信也)>따라서 참다운 믿음도 本來是佛의

바른 見解, 正見이 있어야 참다운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參禪할 때는 바른 믿음이 앞서야 하고, 또 勇猛心과 參究하는 마음이 함깨 곁들어야 하는 것인데,

바른 믿음이 前提가 되기 위해서는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바른 見解 바른 價値觀 바른 哲學이

앞서야 하는 것입니다. 바른 철학(哲學)이란 무엇인가? 앞서 언급한 本來是佛자리, 當來부처가 되는

當來成佛이 아니라, 本來 바로 부처가 되어 있다는 자리,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 이 자리를 分明히

느껴버려야 이른바 頓悟頓修가 됩니다. 그 자리를 느끼지 못하면 돈오(頓悟)도 못되고 돈수(頓修)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특히 三年동안이나 工夫하시는 스님들은 그때그때 善知識들 한데서 法門을 많이 들으시겠지만

그래도 自己 工夫하는 길에 關해서 確然히 見解와 신(信)이 차있어야 합니다. 신해(信解)>그래서

先行的으로 本來是佛자리를 느낀 다음에는 무엇이 必要할 것인가? 그 다음에는 우리 凡夫 衆生이

本來 부처라 하더라도 自己 宿世 累劫의 宿業)때문에 습기(習氣)가 우리한테 끼어 있으니까 習氣를

녹여서 성불(成佛)까지 가는 길목<修道의 位次>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길목을 잘 모르면 工夫하는 境界가 많기 때문에 더러는 自己 몸뚱아리가 텅~텅 비어 오기도 하고,

더러는 空中으로 떠올라가는 듯한 경쾌한 마음도 느끼는 것이고, 가지가지 境界가 많이 있습니다.

부처님 같은 모양이 나오기도 하고, 또는 빛이 훤히 이렇게 밝아서 나오기도 하고 방안도 훤하고,

벽을 뚫고서 저편도 보인단 말입니다. 그런 때가 있는 것인데 그런 때를 당할 때 기분이 나쁠 때는

모르거니와 쾌적하고 그렇게 상쾌하고 자기 몸에 부담을 느끼지 않고, 그런 때는 아! 見性悟道가

이런 자리가 아닌가? 이렇게 혼동(混同)을 느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工夫 하는 境界에 대해서 分明히 알아야 이른바 암중모색(暗中摸索)이 안 되고 同時에

증상만(增上慢)이라, 못 通하고 通했다하고, 또 못 증(證)하고 證했다하는 그런 增上慢을 안 내는 것입니다.

증상만을 한번 내버리면 공부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수도(修道)의 과정, 수도의 위차가 그것이 비록

한번 깨달으면 다 된다. 이렇게 하더라도 깨닫기 자체도, 앞서 말씀과 같이 깨닫는 과정에 경계가 많아서

참다운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점검하기가 쉬운 것도 아니고, 설사 초견성(初見性)을 했다 하더라도

성불까지 가는 길은 또 요원한 길입니다.

 


그러기에 本來是佛자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分明히 돈오(頓悟)이지만 부처까지 간다고 생각할 때는

習氣를 녹이는 過程을 생각할 때는 또 역시 점수(漸修)란 말도 옳단 말입니다. 따라서 따지고 보면

頓悟頓修나 돈오점수(頓悟漸修)가 거리가 먼 것이 아닙니다.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라, 모든 중생들이

부처와 더불어서 本來로 成佛되어 있다. 이런 本來是佛자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분명히 돈오인데

그렇다고 그 자리를 분명히 좀 느끼고 안다고 해서 그것이 끝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른바 해오(解悟)라, 풀 해(解)자, 깨달을 오(悟)자, 해오로 해서는 이치로는 안다 하더라도, 자기가 정작

자기 자성(自性)을 증명 못한 경우에는 불공덕(佛功德)은 안 나오는 것입니다. 부처님 명호(名號) 가운데,

여래십호(如來十號) 가운데 明行足이란 이름이 있습니다. 밝을 明, 행할 行, 足자입니다. 이것은 무엇인가

하면 ‘밝음’ 이것은 바로 지혜(智慧)를 말합니다. 그런 智慧가 部分的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完璧한 智慧를

다 갖추고 있다는 것 이것이 明行足입니다. 따라서 참말로 깨달으면 그때는 그런 모든 智慧를 完璧하게

갖추어야 합니다.

 


마음만 좀 개운하고 무엇에 막힘이 없고  그 정도가 참다운 깨달음이 아니라 明行足이 되어야 합니다.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다 갖추어야 합니다. 우리가 成佛하는 길이 本來是佛의 자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한 걸음도 옮기지 않고 本來 부처가 되어 있지만 習氣를 녹여서 간다고 생각할 때는 요원(遙遠)한 길입니다.

그러기에 십지명(十地名)에서 보살초지(菩薩初地), 이지(二地), 삼지(三地), 사지(四地), 그런 것이 있습니다.

 


그런 道理를 잘 모른 사람들은 그것은 敎가 아닌가? 禪法에서는 그런 것이 必要 없지 않는가?

禪과 敎가 原來 둘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앞서 서두에서 말씀드린 요심수도(了心修道),

마음이 무엇인가, 마음이 本來부처인 것을 깨닫고 닦으면 생공이이성(省功而易成)이라, 功을 많이

안 드리고도 성불(成佛)하기가 쉽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와 나와 나누어 생각하고, 마음 밖에서

도(道)를 구하고 진리(眞理)를 구하고 부처를 구한다고 생각하면 공부가 굉장히 더딘 것입니다.

 


그러기에 불요심수도(不了心修道)면 증사(蒸砂)가 작반(作飯)이라. 다만 自己 마음이 무엇인가를 모르고서

암중모색(暗中摸索)으로 애쓰고 닦는 것은 모래를 삶아서 밥을 짓는 것과 마찬가지로 밥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應當 本來是佛자리를 분명히 느끼고, 느꼈다고 생각하면 그 자리를 여의지  않고

工夫를 持續的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參禪工夫나 一般工夫나 한말로 하면, 六祖壇經의 맨

나중에 있습니다만 무슨 經이나 咐囑品이 經의 結論인데, 부촉품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그대들이 만약 如來의 一切種智를 成就하고자 하면 마땅히 一相三昧와 一行三昧를 증(證)할 지니라.

四祖 道信大師의 法門이나, 또는 5祖弘忍大師의 法門이나, 六祖慧能大師의 法門이나 그와 같이 一貫되어

왔던 것입니다. 一相一行란 말입니다. 一相三昧는 무엇인가 하면 天地宇宙萬物 모두를 眞如佛性 하나로

보는 것입니다. 天地宇宙에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른바 佛性 一元論, 오직 佛性 뿐입니다.

 


物과 神이 따로따로가 아니고, 부처와 내가 따로 둘이 아닌 것이고, 天地宇宙萬物을 하나의 佛性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것보고 一相三昧라고 말하고, 그렇게 分明히 느끼는 것을 보고 解悟라고 하는 것입니다.

풀 解 자, 解悟입니다. 그래가지고서 本來是佛자리 그런 자리, 一切 存在가 다 眞如佛性 아님이 없다. 그런

자리를 놓치지 않고서 念念相續으로 工夫를 이어 가야한단 말입니다. 그래야 참다운 참구(參究)가 됩니다.

 


* 돌담에 걸린 하귤 지금부터 색깔이 나기 시작하여 내년 3월에 먹는 귤입니다

 

 

[출처]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201|작성자 미타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