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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모든 것이 다 소중하다.

장백산-1 2021. 2. 1. 17:31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소중하다.

덧 창문을 열였다. 아직도 찬 기운이 감돈다. 10년이 지났음 에도 아버님 어머님의 유골을 뿌렸던 기억이 되살아 난다.
가볍게 미소로 답을 하고 보니, 이른 시각 때문인가 해는 아직 드리우질 않았지만 동녘이 훤하다. 정월이라 바쁘게 지내다 보니 이제야 짬을 내서 글을 올립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업(業)을 짓고 살아갑니다. 선업(善業), 악업(惡業) 그리고 무기업(無記業)을 짓고 살아가는데, 예전의 오대산 노스님의 시대와는 달리 단순한 인연(因緣) 맺음이 아니라, 복합적이고 다단하게 그것도 지속적으로 인연(因緣)을 맺기 때문에 딱 한가지의 업연(業緣)으로 인해 세상에 드러나는 경우는 점점 드문 세상이 되어갑니다.

업연(業緣) 하나 하나가 모이고 쌓여서, 그렇게 쌓인 업연(業緣)들이 인식(認識)을 넘어서면 무의식(無意識)이 되어 생각없이 습관(習慣)이 되어 행동(行動)으로 옮겨집니다.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행동하는 것보다 무의식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대략 90% 정도됩니다. 이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증폭되어 나중에는 아주 고치기 어려운 습관으로 굳어집니다.

그러므로 이런 업연(業緣)을 풀어가는 것도 한번의 기도로 일생의 소원을 다 이루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거미줄처럼 얽히고 설킨 인연(因緣)의 줄을  풀어나가는 것은 합리적인 지식과 보편적인 생각만으로 판단하기는 어려울 때가 너무 많음을 보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병(病)이 생겨야 병원(病院)을 찾아가듯이, 불자(佛子)들 또한 업연(業緣)을 풀지 못할 정도의 인연(因緣)이 되어서야 절 문을 두드리거나 스님과 상담을 하기 위해 절을 찾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안타까움에 왜 건강하고 좋을때, 힘이 있고 능력이 될때는 뭐하고 있다가 다 죽게 되거나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에 절이나 스님을 찾아와서 뒤 늦게 참회하고 발심(發心)을 하겠다고 하며, 정진을 하겠다는 것인지에 마음이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세상은  각자 먹고 살기 바빠서, 자기다 지은 자기의 업(業)을 정화하고 기도를 하려 해도 예전처럼 녹녹하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각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 핵가족(核家族) 시대다 보니 부모와 자식들, 형제나 가족이라도 자기 삶이 바쁘다 보니 가족의 기도조차 해주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입니다. 저 산의에 있는 낙락장송이 하루 아침에 크게 자란 것이 아니듯이 기도도 성심과 정성, 시간 그리고 노력이 결합 될 때, 그 결과가 드러나서 소원성취라는 결실을 이루게 됩니다.

어제 11시쯤 한 불자님에게 전화가 걸려 왔는데, 지금 병원인데, 전문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는 울고, 또 머리도 아프고 몸도 지치고 답답해 하던 차에, 간호사의 말이 해당 박사님과 만나려면 무려 6개월이나 기다려야 한다는 말을 듣고 있다가, 병원에 있는 다른 교수님의 주선으로 스님을 찾아 뵙고 싶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소를 알려주자  단걸음에 찾아온 그 여자분은 00대학 교수님 이었는데, 남편과 함께 6살 딸을 데리고 왔습니다. 한 눈에 봐도 정상 아이가 아닌 지적장애아(知的障碍兒) 였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하소연에 가까운 말을 합니다. 딸을 낳고 부터 6년을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고, 그동안 굿도 여러번하고, 딸의 병을 낫게 해 준다면 여기 저기 다 찾아 다녔는데, 병원, 민간요법, 등 딸을 위한 일이라면 체면이고 뭐고 다 버리고 다녀보았지만 전혀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면서 계속 흐느껴 웁니다.

어렸을 때 어머님의 절에 다니던 모습, 그리고 힘들게 형제 자매와 버티며 여기까지 살아왔었는데, 또 딸의 불완전한 모습으로 인해서 삶의 행복은 기대할 수 조차도 없고, 도저히 나아질 기미나 방법이 없으니 차라리 죽고 싶은 심정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남편이 작년에 직장을 나왔고, 아이는 장애아라 돈도 돈이지만 마음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닌 것으로 보였습니다.

지적장애아 딸의 엄마는 이틀전 우연히 오대산 노스님의 책을 읽고는 업(業)의 인연(因緣), 즉 업연(業緣)에 대해서 조금 이해를 했고, 스님의 글 중에 모든 삶은 다 쓸때가 있어서 태어난다는 말을 듣고는 마음을 내어 찾게 되었다고 하면서, 어머님이 돌아가실 때 그렇게 간절히 마음을 내서 절에 열심히 다니셨어도, 돌아가실 때 말 한마디 못하고 돌아가시고, 절에서 사십구제를 지내고 닦았지만 너무 돈이 많이 들고 힘들었다고, 왜 이런 삶을 계속해서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노라고, 고생을 안하며 살려고 열심히 노력해서 이자리에 오르고, 학생들에게도 열성을 다해 강의하고 정직하게 살고 있건만 내 주변의 다른 사람들은 대충 대출 살아가도 그들은 잘 살고, 저에게만 이런  고난의 끝이 보이지 않는 것이 의문이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여자분에게 물었습니다. 지금 절에는 다니고 계십니까? "아니요, 안 다닙니다." 왜 안다나시나요? 제 엄마가 그렇게 열심히 믿고 다니셨어도 일생동안 고생을 못 면했고, 저 또한 그렇게 악하게 안 살아왔는데 장애를 가진 딸을 낳아 고생이 극심합니다. 절에 나간다고 뭐가 변할 리가 없을 것 같아 이제는 안 믿기로 했습니다.

보살님은 회는 안드십니까? 저는 회를 안먹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고기 반찬이 아니면 밥을 아예 안먹습니다. "그래요."
제가 하는 말을 잘 들어 보세요. 대저 온 우주(宇宙)는 생명(生命)을 살리려 함이지 생명(生命)을 죽이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모든 부처님 또한 마찬가지 입니다. 어떤 사람의 명(命)이 짧아지는 원인은 대게가 살생(殺生)이 원인인 경우가 가장 크며, 불안, 공포, 근심, 스트레스, 잘못된 생활습관, 잘못된 식습관, 악연(惡緣)이 주된 업(業)입니다. 그 악연(惡緣)이 때와 인연(因緣)을 따라 드러나게 되는데, 그 만남의 조건에 따라 다르게 작용할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개미를 백마리 죽였다거나, 강아지를 때렸다고 해서 그 개미들이나 강아지가 금방 나에게 업(業) 되값지는 못합니다. 왜냐 하면 그들은 힘이 작고 나의 힘은 커서 아직 나에게 영향을 주기에는 힘이 부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보다 힘이 센 호랑이나 사자를 내가 건드리면 오랑이나 사자는 나를  잡아먹으려고 달려들 것입니다,

나보다 강한 사람에게 욕을 하면 욕 대신에 주먹이 날아 오는 것 처럼 처음 행함의 인연(因緣)처럼 돌려 받기도 하지만 다르게 작용하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시간이 흐를 수록 그 업(業)은 증폭(增幅)이 되어 우리에게 다가서기에 우리가 그 증폭(增幅)된 업(業)을 알아차리거나 감지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그런 저런 인연(因緣)들이 세월이 지나서 만나고, 또 생을 달리해서 다음 생에서 만나게 될 경우 나에게 미칠 영향은 장기간 내지는 평생의 원한(怨恨)이 되어 만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일상(日常)을 살아가면서 부딪치고 만나는 모든 인연(因緣)들이 전부 다 내가 만든 업연(業緣)들과의 만남입니다. 좋을 인연(因緣) 경우에는 가족이 되어서도 사랑받고 행복하며 즐거운 인생이겠으나, 악연(惡緣)일 경우에는 서로 죽이려하고 상처를 주며, 앙갚음을 하기에 마음고생 몸고생 이루다 말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세상은 더욱 복잡해져서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인연(因緣)들을 만들면서 살기 때문에 앞으로의 업연(業緣)은 더욱 강(强)한 것이 드러날 것임이 분명합니다. 못 먹어서 병원에 환자들이 넘치는 것이 아니요, 지식이 모자라서 남에게 미움을 받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수없이 많은 악연(惡緣)으로 인해서 내가 많은 목숨(생명)을 죽이고 남을 시켜 죽이고, 고통받는 중생의 모습을 보고도동정없이 맛있다고 잡아먹고, 살생(殺生)을 아무렇지 않게 자행하며 즐거워 하는 모습들이, 나중에 내가 그 인연(因緣)을 갚으려고 만날 때에는 반드시 괴로워하며 신음하고 죽지 못해 살고 고통받게 되는 주요 요인(要因)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자비심의 화신인 보살이, 부처를 죽일 수는 없으며, 더욱 맛있다고 자랑하며 좋아하며 즐기지는 절대 안는다는 것입니다. 작은 생명이라도 같이 더불어 살아서 공존 번영의 길을 찾는 것이 보살의 길이요 우주의 진리입니다.

이것을 어렵다고 생각하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속인들의 깨달음의 인연길에 놓인 어려움을 능히 아시고 성불(깨달음) 보다는 보살의 길을 제시한 것입니다. 내가 성불하려하면 분명 악업(惡業)이 드러나서 설불하는데 장애(障碍)를 주게 되는데, 복연이 아니니 반드시 악연으로 만남을 통해 그 결과가 맑지 않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그러니 복을 지어 천상에 나길 발원하며, 복을 지어 세속에서의 행복을 구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보살님은 전생(前生)을 믿습니까?  "아니요 안믿습니다"  그럼 어제 있었던 일은 아십니까? 네. 어제 있었던 일은 알고 있습니다. 무엇으로 아시나요?  제가 어제를 살았고, 그 어제를 기억을 하고 있으니까요? 맞습니다. 그러나 어제라는 그 시간은 다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본래 마음(本心)에는 틀이 테두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본래 마음(本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超越)합니다. 기억속에 저장된 경험정보를 생각해내서 있었다라고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딸 아이가 태어나면서 부터 지적장애(知的障碍)가 있었다고 말했는데, 딸 아이가 지적장애를 원했을까요? "그렇지는 않을 것 같은 데요." 그럼 보살님이 그런 지적장애 아이를 원했나요? "아닙니다."  그럼 이것도 저것도 원하지 않았는데도 딸 아이가 저런 지적장애를 가지고 왜 나왔을 까요? "글세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업(業) 때문이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 보살님이 화가 잔뜩 나서 길을 가시게 된다면 과연 가시면서 무엇을 만나리라 생각하십니까? "글세요. 아무래도 좋은 인연(因緣) 보다는 좋지 않은 인연(因緣)을 만날 확율이 높겠지요. 그렇습니다.

그럼 만약에 지금 굉장히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길을 가게 된다면 어떤 인연(因緣)을 만나실 것 같습니까? "그야 반갑고 즐거운 인연(因緣)을 만나게 되거나 좋은 인연(因緣)을 만나게 되겠지요? "맞습니다." 악한 마음을 품고 나가면 작은 일도 나쁘게 받아들이게 되고, 그것이 시비가 되며, 좋은 관념이 없으니 용서(容恕)가 안돼서 악연(惡緣)을 더 깊게 맺어서 나쁜 결과(結果)를 거두게 되며, 선하고 즐겁고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다니면, 안 좋은 것도 너그러히 대하여 웃어 넘기며 시비를 만들지 않고 , 작은 일도 고맙고 즐겁게 생각하여 그것을 키워 더욱 기쁘고 행복하게 나를 이끌게 됩니다.
따라서 내가 오늘 하루 종일 즐겁고 행복했으면 잠자리에 들어 꿈을 꾸어도 꿈속 세상이 행복할 것이고, 내일 역시 행복한 꿈속 세상이 이어져서 행복한 인연(因緣)을 만들게 됩니다.

보살님께서는 어려서부터 어렵게 자식들을 키우시며 어려운 역경을 이겨내며 살아오신 어머님의 한스러운 모습과 본인이 장애아 딸을 낳아 키우면서 우울하고 슬프고 답답하고, 고뇌에찬 한스러운 아픈 마음이 본인의 가슴속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생활을 하다보면 즐겁고 행복한 마음이 아니다 보니, 좋은 것도 그렇게 좋게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와 남을 비교하며, 항상 불만과 불평 슬픔의 마음을 지속적으로 품고 살게 됩니다.

과연 그런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데 건강(健康)과 행복(幸福)이 깃들수 있겠습니까? " 아마도 힘들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눈이나 비가 한두 방울 내 몸에 떨어진다해서 해가 되지는 안습니다. 그러나 그 눈과 비가 지속적으로 내리는 데도 계속해서 맞고만 있다면 아마 당장에는 감기와 폐렴이 걸리겠지만 좀더 지나면 목숨을 장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것은 모이면 그 힘이 커져서 나 하나 뿐이 아닌 수없는 사람들의 기쁨과 행복, 또는 질병과 죽음을 불러 오게 됩니다. 기도나 불공 또한 시작은 아무것도 아닌 것 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쌓이고 축척되면 엄청난 힘이 되어 소원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니 다 인연(因緣)의 법칙(法則)입니다.

한반도 상공 3.000미터 위에 영하 30도의 찬기운이 강하게 자리를 잡으면 그 밑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영하 10도 이상의 추위를 느끼며 그 영향하에 있게 됩니다. 그런데 나는 괜챦아 하고 옷을 얇게 입고 다닌다면 당연히 감기에 걸리게 됩니다. 미련하게 그것을 계속 고집을 부리며 옷을 얇게 입고 다니면 점차 악화되어 폐렴이 되고 더 나아가면 죽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열심히 기도해서 그 기도의 맑고 강한 기운이 커지면 내가 건강해지고 행복해지며, 이어서 가정에 밝은 기운의 영향으로 식구들이 건강해지며 집안의 작은 동물들이나 식물들이 건강하고 잘 자라게 됩니다. 이와는 반대로 매일 화를 내거나 다투고, 미워하고 슬픔을 않고 산다면 그 집안에 있는 가족과 가축 내지 식물들이 다 고사하거나 병들게 됩니다.

이런 인연(因緣)으로 모든 것이 변화(變化)하게 되는 것입니다.

<중략 ........................................................................................>

마치 하루동안 욕을 하는 것과 매일 욕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루는 그나마 덜하지만 매일 욕을 한다면 그 독한 말이 밝고 행복함을 가로 막고 악하고 나쁜 인연(因緣)을 끌고와와서 성공을 기약할 수 없게 만듭니다. 하늘은 결코 악업(惡業)을 맺는 사람을 용서(容恕)하지 않으며, 세상의 다른 사람들 또한 악업을 짓는 사람을 좋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매일 매일 감사의 말을 하며 남을 도우며 선행을 하면, 하늘과 사람들은 반드시 성공하도록 그를 받들고 이끌어 줍니다. 모든 것은 다 작은 인연(因緣)에서 부터 비롯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어느 날 탁발을 나가셨는데 가난한  집에서 부처님께 드릴 것이 없어서 쌀뜨물을 드리게 되었는데,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 쌀뜨물을 드시고는 그 집에 축원(祝願)을 하십니다. 어느 여타한 불자의 공양에 못지 않는 공덕(功德)을 지었으니, 이제 큰 복덕(福德)이 맺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있던 옆집 사람이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의문이 들어서 여쭙니다. 아니 어떻게 쌀뜨물같이 제대로 된 공양도 아닌 것을 드시고는 큰 복(福)을 지었다고 말씀을 하시니 이해가 잘 안갑니다. 부처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기 저 큰 고목(古木)이 보이십니까?  "네. 잘 보입니다." 저 큰 고목의 씨앗이 얼마나 클까요? 아주 작아서 팥알보다도 훨씬 작습니다. 아니 어떻게 저렇게 큰 고목의 씨가 그렇게 작을 수가 있습니까? "사실입니다. 그 씨앗은 너무나 작습니다." 그렇다면 그 작은 씨앗이 자라서 저렇게 큰 고목이 된 것처럼, 이 사람이 지금 베푼 쌀뜨물은 비록 작은 공양이지만 이 보시의 인연(因緣)이 자라서 저 큰 고목처럼 커진다는 것은 왜 모르십니까? 부처님의 크신 뜻을 제 생각이 짧아 미처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저도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싶습니다. "그러시지요."

기도든 불공이든 다 기도하는 분의 마음이 맑고 행복하고 기쁜 마음으로 하는 것이 선행 되어야 합니다. 맑지 않은 마음으로 기도를 하거나 불공을 드리면 그 기도나 공덕은 기대만큼 이뤄지기 힘들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사람이 자기는 바빠서 시간도 없고 힘들다고 하면 안됩니다. 부처님은 더욱 존귀하고 바쁘신 분입니다. 대통령이 얼마나 바쁘겠습니까? 한 나라의 모든 중생들의 삶을 관장하고 잘 살피려면 아마도 촌음도 아까울 만큼 시간이 부족할 겁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 한나라, 이 지구 뿐만이 아니라 온 우주의 삼계 28천과 6도 세계를 대상으로 중생들을 건지시려 온 힘을 다하시는 분입니다. 그런 존귀한 분을 상대로 나의 작은 소원을 이루어 달라고 발원합니다. 그것도 자기의 욕심으로 바라보며 말입니다.

항상 생각 하십시요. 부처님은 나만 보는 것이 아니라 3계 28천의 6도 일체 중생을 위해 자비구현을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중생의 마음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계시다는 것을 꼭 상기하세요. 제가 지장기도를 권하면서 하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지장보살님은 항상 매일 아침 선정(禪定)에 들어서 중생들을 관찰하시고, 언제쯤 저 중생들을 건져야 할 지를 한 순간에 보십니다. 그러니 항상 순간에 마음을 다해서 선정에 든 지장보살의 눈에 들어야 한다고, 아니면 부지런히 매달리라고, 업(業)은 내가 짓고, 내가 지은 업(業)을 푸는 것은 지장보살님이 하시니, 이것은 마치 어린 아이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방을 마구 어질러 놓은 것을 어머니가 보고는 깨끗하게 청소하고 제자리에 돌려 놓아 다시 안락한 보금자리가 되게 해 주는 것과 같으니, 항상 나를 낯추고 정성을 다한 마음으로 최대한 노력하라고 당부를 드립니다. 

예전에, 어느 큰 마을에 가뭄이 극심하여 사람들이 기우제를 드리고 내려오는데, 어느 한 사람이 잔뜩 재물을 이고는 산에 올라가서 재를 드리다가 그만 벼락을 맞아 죽었습니다. 벼락맞아 죽은 이유인 즉 남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신령님께 빌기를, 신령님, 좀더 가물게 해 주세요. 그래야 제가 부자가 됩니다. 그사람은 바로 쌀가계를 하는 곡물상 주인이었습니다. 더 가물어야 쌀값이 올라서 자기가 부자가 되겠기에 이런 기도를 드리다가 그만 벼락을 맞아 죽은 것입니다.

불만과 의심, 그리고 남을 원망하고 해를 주려는 기도나 정성이라면 부처님이나 화엄성중님들이 달게 받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부처님이나 화엄성중님들의 호통을 받아서 고통을 받습니다. 그럼 바로 알아차리고 잘못을 뉘우치고 바로 나아가야 함에도, 워낙 잘못 된 분별 망상(妄想) 번뇌가 많아서 부처님이나 화엄성중님들께 불공을 드려도 들어주시지 않는다 하며 부처님이 화엄성중님이 있네 없네 하며 구업(口業)을 짓고는 더욱 악연(惡緣)의 구렁텅이로 빠져듭니다.


지금까지 내가 하는 말을 듣고 있던 여교수의 눈이 밝아지며, 스님,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부족하지만 스님께서 잘 지도해 주시면 따르겠습니다. 미혹한 중생을 가엽게 여기시고 바르게 이끌어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그래서 기도법을 일러주고 백일 기도를 절에 다니면서 할 것을 말해주었습니다. 스님의 가르침대로 최선을 다해서 남편과 아이를 데리고 와서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쉽게 말을 합니다. 남들은 별 노력을 안해도 잘 먹고 잘 살고 있다고.. 여러분의 눈에 보이는 것이 다 진실은 아닙니다. 그저 그렇게 진실한 것으로 보일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해 둡니다. 누가 와서는 당신 남편이 너무 자상하고 매력있고, 성실해서 부인에게 잘 해 줄것 같다고 말을 했다고 치자, 그 보살이 듣고 있다가 말하기를,  그럼 당신이 내 남편을 데리고 살아보세요.. 남 속 터지는 줄도 모르고는  아이구... 여러분 아시겠어요??????? 무슨 뜻인지를.....
인생이란 다 그렇게 남의 떡이 더 커 보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내가 행복할 때는 남의 잘난 모습은 하나도 안보입니다. 다 내가 남보다 못할 때만 그렇게 남이 잘나보일 뿐입니다. 그러니 너무 자기를 자책하거나 억울해 하지 마세요. 나름 고생없이 근심없이 사는 인생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기에 극락을 만든 것입니다.. 이생에서는 도저히 극락같은 그런 세상을 만날 수 없기 때문에 말입니다...

꽃밭에 아름답게 핀 꽃들이나 산 한 모퉁이에 작게 피어난 꽃이나 다 소중하기는 마찬가지이고, 또 필요한 곳에 다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를 바라면서 두서없는 글을 법구경의 시를 뒤로하며 마칩니다.

" 지붕을 허술하게 이어 놓으면 비가 올 때 빗물이 새는 것 처럼, 마음을 단속하지 않으면 탐욕이 틈을 타서 뚫고 들어온다. 많은 경전을 외울지라도 그 뜻을 바로 알고 실천하지 않으면, 남의 소를 세고 있는 목동처럼 실속없는 수행으로 그치게 된다."

여러분 모두의 행복을 기원드립니다. 행복하세요.. 지장사 주지 승현(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