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돈수(頓修)와 점수(漸修)의 유래(由來)
불교를 공부한다면 으레 깨달음과 닦음의 문제는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관심사이다. 따라서 어떻게 닦아야 할 것인가? 또는 깨달음이란 어떤 것인가? 하는 깨달음과 닦음의 문제라는 것은 불자들로서는 일대사(一大事) 인연으로서 우리가 꼭 해결하고 넘어가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따라서 돈오돈수(頓悟頓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에 대해서 알고 넘어가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에 관한 문제는 근래에 조계종 종정을 오랫동안 지내고 선지식으로 추앙받는 성철(性徹) 스님께서 저서인 선문정로(禪門正路)에서 보조(普照) 스님의 돈오점수설을 비판하므로써 세상의 관심사로 등장을 한 것 같다.
보조(普照知訥 1158-1210) 스님은 약 800년 전에 계셨던 분이다. 한국 불교가 선교 일치(禪敎一致)의 회통불교(會通佛敎) 분위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직까지 돈오점수에 대하여 이의(異議)를 제기한 분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우리가 잘못 생각하면 돈오점수는 보조국사가 처음으로 제기하였고 돈오돈수는 성철스님께서 처음 제기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그렇지 않다. 돈오점수나 돈오돈수나 그 연원(淵源)을 밝혀보면, 역사적으로 분명히 맥을 이어오고 있는 권위 있는 말씀이다.
또한, 잘 주지하는 바와 같이 보조스님은 비단 한국 불교역사상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대 선각자(大先覺者)로 추앙을 받아온 분이며, 성철스님 역시 한국 불교를 대표할 수 있다고 얘기할 수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상징인 종정을 지낸 스님으로서 깊은 존경을 받는 분이라는 것 역시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가 깨달음이나 수행을 이야기할 때 보조 스님이 그르다 또는 성철스님이 잘못 해석했다고 함부로 말할 수가 없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개인의 견해나, 수행 경험에 의거해서 판단하고 결론 내리는 것은 무리가 따를 것이다.
따라서 이와같은 문제를 접근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꼭 유일하게 올바른 방법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권위있는 인용을 하기 위해서 우선 조사어록(祖師語錄)에 의거해 이 문제를 다루어 보고자 한다.
2. 심마물(什麽物) 임마래(恁麽來)
심마(什麽)는 무엇이란 뜻이고, 임마(恁麽)는 어떻게, 어찌해서란 뜻으로, 심마물 임마래란 곧 '무엇이 어떻게 이렇게 왔는가'라는 말인데,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습마물 임마래라고 읽는다.
나는 대체로 무엇인가? 또는 너는 대체로 무엇인가? '이 무엇' 이란 문제는 따지고 보면 선불교 전부를 들어서 얘기하는 말이나 같다.
조그만 티끌 하나도 잘 보면 반야지혜(般若智慧)고, 바로 부처님의 청정법신(淸淨法身)인 것이고 잘못 보면 하나의 티끌에 불과하다. 이것은 하나의 티끌에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중생이 잘못 보는가, 잘 보는가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깨닫는가 깨닫지 못하는가에 차이가 있을 뿐이지, 본래 물(物) 자체에는 조금도 차이가 없다. 따라서, 나란 대체로 무엇인가? 이것만 해답을 바로 내려버리면 모든 문제의 풀이가 다 된다는 말이다.
습마물 임마래의 연원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남악회양과 육조혜능이 처음 서로 만나볼 때에 육조가 물었다. “어디에서 왔는가?” 남악회양이 말하였다. “숭산에서 왔습니다.” 육조가 말하였다. “무엇이 어떻게 왔는가?”(南岳懷讓 六祖慧能 初相見時, 六祖問 什麽處來 曰嵩山來 祖曰 什麽物 恁麽來)
남악회양(南岳懷讓 677-744) 선사는 6조 혜능대사로부터 법을 받은 정통 조사 중 한 분이다. 남악회양이 육조혜능에게 맨 처음에 뵐 때 6조가 묻기를 "그대는 대체 어디서 왔는고?" 그러자 남악회양이 "숭산에서 왔습니다."고 한 것인데, 숭산은 그 당시에 노안(老安 또는 慧安 582-709? 五祖 弘忍法嗣)대사가 중생을 제도하였던 곳이다. 이에 육조혜능이 말하기를 “무엇이 어떻게 왔는가?”라고 다시 묻자 남악회양은 당장에 말문이 막혀 버렸다.
“무엇이 어떻게 왔는고?” “이뭣고”, 이는 선불교에서 가장 많이 드는 화두(話頭) 중의 하나로 “이뭣고”화두는 그 연원이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무엇인가? 내가 무엇인가?” 에는 나(我) 자체가 천지 우주와 같이 연기법으로 중중무진(重重無盡)으로 관계가 있기 때문에 “그 무엇인가?” 에 일체 존재가 다 들어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뭣고” 라는 화두에는 “오고 가고, 앉고 서고 하는 이것이 바로 무엇인가?” “부모님께서 아직 나를 나아 주시지 전의 내 본래면목(本來面目)은 무엇인가?” 라는 의심이 들어 있는 것이다. 눈이 보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는 놈이있고, 입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입으로 말하는 놈이 있고, 귀가 듣는 것이 아니라, 귀로 듣는 놈이 있는데, 보고, 말하고, 듣는 그 놈이 무엇인가? 그것이 “이뭣고”이다.
그렇기 때문에 금강경오가해서(金剛經五家解序)에서도 육조혜능은
“나한테 한 물건이 있는데,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으며, 이름도 없고 자(字)도 없다. 위로는 하늘을 바치고 아래로는 땅을 괴고, 밝기는 해와 같고 검기는 칠과 같은데, 이러한 것이 항상 일상생활해 나아가는 가운데 나와 더불어 있지만, 일상생활해 나아가는 가운데 거두어들이고자 하여도 할 수가 없다. 이것이 무엇인가?' (有一物 無頭無尾 無名無字 上柱天下柱地 明如日黑似漆 常在動用中 動用中 收不得者 是甚麽)
이와 같이, 본래면목이 무엇인가? 해야지, 그냥 상대 유한적인 것 가지고서 이것인가 저것인가 하면은 그때는 화두가 못되고 참선이 못되는 것이다. 분명히 습마물 임마래가 되어야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조혜능의 질문에 답이 막힌 남악회양은 그 후 8년 간 육조혜능을 시봉하면서 부단한 수련을 거친 뒤, 자기 본 성품을 깨닫고 나서 다시 혜능대사에게 나아가 "이제는 제가 얻은 바가 있습니다." 하고 말씀을 드리니까 "그럼 한번 말해보지" 라고 하자 남악회양은 육조 혜능의 말에 따라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남악회양이 말하였다.
“설사 한 물건이라고 해도 맞지 않습니다.” 육조가 물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더 닦고 증득할 만한 것이 있는가?” 회양이 말하였다. “닦고 증득할 것이 없지는 않으나, 물들여 더럽힐 수는 없습니다.” 육조가 말하였다. “다만 이 더럽히고 물들이지 못함이 모든 부처님께서 호념(護念)하시는 바이니 너 또한 이와같고 나또한 이와 같다.”(曰 說似一物卽不中 六祖問 還可修證否 讓云 修證不無 染汚卽不得 六祖曰 只是不染汚 諸佛之所護念 汝亦如是 吾亦如是 <<傳燈錄南嶽章>>)
불법에서 말하는 진리란 시공(時空)을 초월하는 것이고 인과율(因果律)을 넘어선 것이므로 제한된 인간의 말로써는 표현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남악회양은 “설사 한 물건이라고 해도 맞지 않습니다.” 라고 대답한 것이다.
이에 육조혜능은 다시 “그렇다면 앞으로 더 닦고 증득할 만한 것이 있는가?”라고 질문한 것인데, 일반인의 상식으로 생각한다면 이미 본래성품을 보고 깨달았으므로 다시 닦을 것이 없다고 대답할 것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오염이란 본래 평등무차별(平等無差別)의 자리, 일여(一如) 평등의 진리를 차별심을 두고서 자타(自他), 시비(是非), 고하(高下), 계급(階級)을 논한다는 말이다. 원래 내가 없는 것을 있다고 하고, 본래 성품에는 차서(次序)가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것이다. 중생의 분상에서 중생견(衆生見)으로 자타, 시비, 계급, 차서가 있는 것이지 무명(無明)을 떠난 자리에서는 그것이 없다. 높낮이도 없고 계급적인 차별도 없다.
따라서, 깨달은 분상에서는 마땅히 이것이 없어야 한다.
“다만 이 더럽히고 물들이지 못함이 모든 부처님께서 호념(護念)하시는 바이니 너 또한 이와같고 나또한 이와 같다.”는 말은 남아회양의 대답이 진리에 합당한 것으로 모든 부처님이 이것을 옳다고 긍정하고서 지키신다는 말이다.
남악회양이 깨달은 바가 없었다면 이런 대답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비록 깨달았다 하더라도 습기(習氣)까지 몽땅 떼어버리는 완벽한 깨달음이 아직은 못됐기 때문에, 닦음은 또다시 있어야 하고 또한 수증(修證)에 깊고 옅은 심천(深淺)이 있기 때문에 마땅히 닦음이 있긴 있지마는, 그것을 높다 낮다 또는 보살 몇 지(地)라든가 하는 것을 관념에 두어서는 참다운 무염오수행(無染汚修行)이 못되는 것이다.
무염오수행이란 것은 분명히 느끼지 못하게 될 때 돈오돈수라든가 돈오점수에 관해서 판단의 착오를 일으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미묘한 문제로서 논쟁거리가 되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신중하고 허심탄회한 마음에서 깊이 통찰해야 하는 것이다.
3. 육조(六祖)의 돈오돈수(頓悟頓修)
돈오돈수(頓悟頓修)는 우리가 흔히 상식으로 알듯이 성철스님이 맨 처음에 말한 것이 아니라 이미 <<육조단경(六祖壇經)>> 제7 <남돈북점장(南頓北漸章)>에 나와 있다.
물론 돈황본(敦煌本)이라든가 혜흔본(惠昕本)이나 종보본(宗寶本)이나 덕이본(德異本)이 다 각기 차이가 있는 것을 보면, 육조단경 역시 어느 정도의 문제점이 있다고도 할 수 있겠으나, 그러나 그래도 역시 선(禪)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육조단경에 의지 해야 하는 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단경 제7 <남돈북점장>에는 주로 하택신회(荷澤神會 685-760)대사가 북종(北宗)을 비판하고 남종(南宗)을 세우는 남종정시비론(南宗定是非論)의 논쟁같은 말이 보인다. 이른바 남쪽인 육조 대사는 문득 깨닫는 법인 돈교(頓敎)라고 찬양하고, 북쪽 신수(神秀 ?-706) 대사는 점차로 닦아나가는 점교(漸敎)로서 본질적인 가르침이 미처 못된다고 비판하는 내용이다.
스승(육조혜능)께서 말씀하셨다. 자성이란 그릇됨이 없고, 어리석음이 없으며 어지러움이 없는 것이다. 생각과 생각은 반야의 관조여서 항상 법의 모양을 떠나 자유자재하고 종횡으로 다 얻을 수 있는데, 났는데 무엇이 있어 세우겠는가? 자성은 돈수하는 것이니 역시 점차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우지 않는 것이다. 일체의 법은 모든 법이 적멸한 것이니 무슨 차제가 있겠는가?<<단경제칠, 남돈북수>>장. (師曰 自性 無非 無痴 無亂 念念般若觀照 常離法相 自由自在 縱橫盡得 有何可立 自性自悟 頓悟頓修 亦無漸次 所以不立 一切法 諸法寂滅 有何次第. <<壇經第七 南頓北漸章>>)
자성은 그릇됨이 없고 어리석음이 없고 어지러움이 없다는 것은 내나 계(戒), 정(定), 혜(慧) 삼학(三學)을 말한 것으로, 그릇됨이 없는 것은 바로 계율로 말하고 어리석음이 없으니까 지혜를 말하고 어지러움이 없으니까 선정을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이 계, 정, 혜 삼학을 닦아서 생각 생각에 반야의 지혜를 관조한다는 말이다. 반야의 지혜는 제법공(諸法空)의 지혜이다. 무아, 무소유의 지혜이다.
생각 생각에 제법공 지혜를 닦아나가면서 항상 모든 법이 실제로 있다는 상을 여의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아무런 막힘이 없이 자유자재하고 종횡으로 모두를 다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반야로 비추어 보아 모든 법이 있다는 실아실법(實我實法)을 떠나서 즉 아공법공(我空法空)이 되어서 볼 때에는 자유자재하고 이것이나 저것이나 모두를 다 얻는 것이기 때문에, 무엇을 새삼스럽게 세울 것이 없다.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고 하면 이것과 저것을 구별 하겠지만, 평등무차별의 자리에서 볼 때는 무엇을 어떻게 세울 수가 없다는 말이다. 천지 우주가 바로 부처님 몸인데 어떻게 어디에다가 무엇을 세우겠는가?
위의 인용문에서 보면 “자성은 돈수하는 것이니” 라고 하였는데, 이와같이 육조혜능 역시 분명하게 돈오돈수를 이야기 하고 있다. 그리고 “나아가 역시 점차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우지 않는 것이다.”고 하였는데, 순서가 없고 높고 낮고 또는 어떠한 계급적인 차별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어느 한 가지 법도 세울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모든 법이 본래 적멸해서 하나의 번뇌도 없는데 무슨 차제를 차제를 세울 것인가?
4. 보조(普照)의 돈오점수(頓悟漸修)
<<보조어록(普照語錄)>>에 있는 보조스님의 돈오에 대한 해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모든 범부가 미혹(迷惑)할 때는 사대(四大:지수화풍)를 몸으로 하고 망상을 마음으로 하니, 자기의 영지(靈知)가 참된 부처임을 모르는 것이다....... 한 생각 돌이켜 자기의 본래성을 보개되면 이 본성의 자리는 완전히 번뇌가 없고, 무루(無漏)한 지성(智性)으로서 본래 스스로 구족되어 있는 것이니, 바로 여러 부처와 더불어 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돈오라고 이르는 것이다.(凡夫迷時 四大爲身 妄想爲心 不知自己靈知是眞佛也.....一念廻光 見自本性 而此性地 元無煩惱 無漏智性 本自具足 卽與諸佛 分毫不殊 故云頓悟也.)
사실 중생들은 대체로 사대(四大)의 원소로 합해진 이것을 자기 몸이라고 하고, 자기의 망상을 자기 마음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므로 차별을 떠나서 신령스럽게 깨달은 자기 마음이 바로 참다운 부처임을 미처 모르다가 밖으로 향하는 대상적인 생각을 돌이켜서 자기 본성을 볼 때에, 견성한 자리에서 볼 때는 원래 번뇌가 없고, 번뇌에 때묻지 않은 지성(智性)이 본래 스스로 원만히 갖추어져 있다. 그리고 이 자리가 바로 부처와 더불어서 털끝 만큼도 차이가 없는 것이다.
이 자리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다하고 무량공덕을 갖춘 자리나, 삼세제불의 성품공덕이나 조금도 차이가 없다. 깨달아서 얻은 그런 자리란 것은 본래에 있어서는 조금도 차이가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아는 것이 바로 돈오(頓悟)이다.
따라서, 보조국사도 단경(壇經)에서 말하는 돈오의 도리를 분명히 밝힌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보조국사는 육조혜능보다 시대적으로 뒤의 인물이기 때문에, 단경도 숙독해서 많이 보았고, 또 단경을 대혜어록(大慧語錄)과 더불어서 가장 중요한 전거로 삼았다. 따라서 돈오의 뜻을 익히 알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보조가 주장하는 점수(漸修)는 무엇인가? 돈오를 알았으면 어째서 또 점수를 말했을까?
문득 본성을 깨달으면 부처와 더불어 차이가 없지만 시작도 없는 습기(習氣) 때문에 졸지에 문득 제거하기가 쉽지가 않다. 그러므로 깨달음에 의거해서 닦아 나아가면 점차로 (勳修)하여 공이 이루어진다. 성자의 태를 길이 기르니, 오래하고 오래함에 성인의 경지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점수(漸修)라고 이르는 것이다.(頓悟本性 與佛無殊 無始習氣 難卒頓除 故依悟而修 漸熏功成 長養聖胎 久久成聖 故云漸修也)
문득 자기 본성을 깨달으면 부처와 더불어서 조금도 차이가 없지만, 중생들은 과거로부터 숙세 무시(無始) 이래로 우리가 익혀 내려온 번뇌의 습기가 있다. 그러므로 평소 부처와 내가 둘이 아니고, 천지와 더불어서 둘이 아니라는 때묻지 않은 진리를 분명히 느끼고 깨달았지만, 만일 우리가 풀을 뽑지 못하고서 우듬지만 베어버리면 그냥 다시 또 뿌리가 나오듯, 모든 번뇌가 다시 생겨나는데, 이것을 구생기(俱生起)번뇌 라고 한다. 또한 우리가 금생에 나와서 보고 듣고 생각하고 배워서 갖게되는 번뇌는 분별기(分別起)번뇌로서, 분별기번뇌는 수행을 통해 단박에 끊어졌다 하더라도, 구생기번뇌는 전생과 더불어 지어온 본능적인 번뇌로서 남아있을 수 있다. 이것은 숙세의 습기를 미처 녹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말은 다시 말하자면 깊은 선정(禪定)을 아직 얻지 못했다는 말로 바꾸어 표현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해탈에는 지혜해탈(智慧解脫), 선정해탈(禪定解脫)이 있는데, 수행을 해 나아감에 있어 이 지혜해탈과 선정해탈을 분명히 구분해서 생각해야 앞으로 공부하는데 방황하지 않을 수 있다. 지혜해탈과 선정해탈을 분명히 모르면 공부 경계에 대한 불조의 가르침을 모르고 어두운 가운데서 암중모색(暗中摸索)하는 참선을 하게 되는데, 이를 암증선(暗證禪)이라고 한다. 이는 수행자에게 있어서 특히 불법의 대요인 참선(參禪)에 있어서 여러 가지 병폐 주에서 가장 경계해야할 중요한 병폐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공부하는 수행자들은 특히 수증(修證)문제, 즉 어떻게 닦고 증(證)할 것인가에 있어서, 문득 부처와 더불어서 둘이 아닌 자리를 깨달았다 하더라도, 과거 숙세 무시 이래로, 무시 무명으로부터 오염된 우리 본능을 꼭 생각하고, 그것이 졸지에 문득 제거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록에 보면 종종 “견도여파석(見道如破石)”이라는 말을 볼 수 있는데, 직역하면 “도를 봄은 돌을 깨는 것과 같다”는 말로, 우리가 진리의 이치를 깨닫는 것은 돌을 깨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마치 돌을 깰 때는 순간에 깨지듯이 견도할 때는 문득 활연대오(豁然大悟)해서 환히 깨닫지만 도를 닦을 때에는 오랫동안 끊임없이 정진해야 습기가 녹아 없어질 수있는 것이다. 이것을 어록에서는“수도여우사(修道如藕絲)” 즉 “도를 닦을 때에는 연실과 같이 하라”고 말하고 있다. 연뿌리를 손으로 부러뜨리면 연뿌리에 실이 있어서 단번에 부러지는 것이 아니라, 끈끈한 실이 나온다. 이와 같이 수도(修道)할 때는 끈끈하게 오랫동안 해야 하는 것이지, 돌 깨듯이 되는 것이 아니며, 도를 닦아 습기를 녹일 때는 오랫동안 두고두고 녹여야 한다는 말이다.
이와같이 습기란 졸지에 바로 제거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깨달음에 의지해서 닦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깨달은 그 자리에서 분별 시비를 떠나서 닦는 무념수(無念修)이다. 본래는 석가와 내가 둘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달마와 내가 다른 것도 아니며, 석가가 높고 내가 낮은 것도 아니고, 본래 분상에서 둘이 없는 자리를 느끼고 닦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염오(無染汚)수행이다. 무념수와 무염오수행은 같은 뜻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깨달음에 의지해서 닦으면 점차로 훈수(勳修)해서 공덕이 성취가 되는 것이다.
훈습(熏習)은 번뇌가 가라앉는 것이고, 훈수(勳修)는 부처님의 지혜로써 닦아 나가는 것이다.
이렇게 훈수하여, 깨달은 그 자리를 놓지지 않고 닦아 나갈 때 공덕이 성취가 되어 성자의 태를 오랫동안 길러 나아가게 된다. 성인의 경지에서는 자타, 시비, 구분이 없다. 따라서 분명히 느끼는 그런 성태(聖胎)를 두고두고 오랫동안 닦아 나아가야 이룰 수 있다. 사량(思量) 분별로 닦는 것이 아니라 무념수(無念修)로 닦는 수행을 장양성태(長養聖胎)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두고두고 일구월심(日久月深)으로 닦아 나아가야 비로소 참다운 구경지(究竟地)인 성인(聖人)의 지위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성자(聖者)와 범부의 한계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대체로 문득 깨닫는 그 자리부터 성자라고 한다. 왜냐면 진여불성의 자리를 바로 현전에 증명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때는 벌써 성자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직 불지(佛地)를 성취한 성자는 아니다.
이는 습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므로 두고두고 일구월심으로 닦아야 참다운 구경각(究竟覺)을 성취하기 때문에 보조국사는 점차로 닦아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따라서, 이 도리는 화엄경에서 말하고 있는 도리와 같고, 또는 달마로부터 육조혜능까지의 말과도 다름이 없는 말이다.
다만 돈오돈수란 말도 단경에 있기 때문에 “돈오돈수하고 돈오점수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생각할는지 모르겠지만, 무염오수행(無染汚修行)의 도리를 분명히 느낀다면 하등의 논쟁거리가 될만한 차별은 없다고 볼 수 있다.
5. 돈점(頓漸)
그러면 단경에서 점수에 대해서는 어떻게 표현하고 있을까? 단경에서는 돈오점수라고 표현하지는 않지만 다음과 같은 표현이 있다.
스승(육조혜능)께서 대중에게 일러 말씀하셨다. “법이란 본래 하나의 종지이지만 사람에게는 남북의 구별이 있다. 법은 곧 하나의 종자이지만 보는 견해에 따라 더딤과 빠름이 있다. 그러니 무엇을 이름하여 돈점(頓漸)이라고 하겠는가? 법에는 돈점이 없지만 사람에게는 날카로움과 무딤이 있다. 그러므로 돈점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師謂衆曰 法本一宗 人有南北 法卽一種 見有遲疾 何名頓漸 法無頓漸 人有利鈍 故名頓漸)
법(法)은 본래 하나의 종지(宗旨)이지만, 다만 사람의 근기 따라서 남북이 있을 뿐이다. 또한 법은 본래 종자가 하나이고, 평등 무차별의 진여불성자리 하나이지만, 다만 사람의 근기와 선근 따라서 잘나고 못나고 어리석고 총명하고의 차이가 있다. 그리고 법은 본래 하나의 성품이지만, 보는 견해에 따라서 더딤과 빠름이 있다. 따라서 무엇이 돈(頓)이고 무엇이 점(漸)이라고 할 수 있는 구분을 가릴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무엇이 문득 아는 것이고 또는 점차 아는 것인가? 원래 법에 있어서는 돈법과 점법이 없지만, 사람의 근기에는 날카로움과 둔함이 있다. 그러므로 돈과 점이라는 말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것을 볼 때 육조혜능 역시 돈점을 말했음이 분명해진다.
또 <<능엄경(楞嚴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理)가 곧 돈오이다. 사(事)는 문득 제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을 타고 아울러 소멸시키면 차제에 따라 다 끊어진다.(理卽頓悟 事非頓除 乘悟倂消 因次第而盡)
능엄경(楞嚴經)은 선수(禪髓)라고도 한다. 이른바 선법(禪法)의 골수란 뜻이다. 따라서 참선수행을 할 때 점차로 닦는다든가 장애를 없앤다든가 하는 것은 능엄경을 참고로 하면 별로 헤매지 않을 수 있다다. 그러나 능엄경같은 선에 관한, 여러 가지 점차 수증에 관한 중요한 말을 무시해 버리면 공부할 때에 방황도 많이 하고 또는 그릇 해석도 할 수가 있다.
“이가 곧 돈오이다”라는 말은, 우주의 본체적인 원리는 문득 깨닫는다 하더라도, 우리가 불교를 교리적으로 공부할 때는 이(理)와 사(事)를 구분해서 생각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이사무애(理事無碍)라고 하여 이와 사를 원래 둘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중생의 차원에서 볼 때는 본질적인 리(理)와 또는 현상적인 문제를 사(事)로 구분하게 되므로 현상적인 상대, 유한적인 문제는 문득 제거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사는 문득 제거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따라서 마치 바다를 건널 때 배를 타고 가야 건널 수가 있듯이 깨달음에 편승해서 닦아나간다고 한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차제에 따라서 다 끊어지는 것이다.
팔만대장경이 있으나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는 석가모니 부처님 말씀이나 육조혜능의 말 표현에 지나치게 걸릴 필요는 없다. 다만 대의(大義)를 알면 되는 것이다.
또한 조사어록이나 또는 선지식의 말씀을 들을 때에도 그 말씀을 경직된 마음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조사나 선지식의 말씀은 으레 노파심에서 우리 들이 그때그때 어떤 문제에 막혀 있는가? 무슨 문제에 고민하는가에 따라 간절히 주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너무나 점수(漸修)에 치우쳐서 자꾸만 계급을 따지고 고하, 심천을 가리는 사람들한테는 돈오돈수로써 마땅히 분별을 쳐부수어야 하겠지만, 그러나 “본래가 부처인데 닦을 것이 무엇이 있는가?” 하는 분들한테는 점차로 닦아 나가는 점수를 역설해야 할 것이다.
'성철스님의 주례사 [금고옥조]입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성주괴공(成住壞空)이란? (0) | 2010.03.01 |
---|---|
[스크랩] 성주괴공 (0) | 2010.03.01 |
[스크랩] 성취의 문으로 들어가는 첫번째 열쇠 / 無一우학큰스님, 한국불교대학 大관음사 회주 (0) | 2010.02.22 |
[스크랩] 그러지 않고는 입만 대보살이 된다 / 無一우학큰스님, 한국불교대학 大관음사 회주 (0) | 2010.02.22 |
[스크랩] 사랑의 힘은 / 無一우학큰스님, 한국불교대학 大관음사 회주 (0) | 2010.0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