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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딩보체에서 사라진 통증, 자연스러움과 관수행

장백산-1 2011. 2. 22. 16:21

 

가만, 그러고 보니 오늘은 연신 이어지는 풍경에 감탄하느라

아픈 무릎을 신경도 못 썼는데,

무릎을 자각하지 못한 이유가 있네.

돌이켜 보니 무릎 통증이 거짓말처럼 거기에 없다.

없었으니 오늘 하루 무릎을 인식도 하지 못하고 걸었겠지.

 

하도 이상하여 무릎을 이렇게도 돌려 보고,

조금 심하게 땅을 박차도 보지만

‘정말 그렇네!’

무릎 통증이 사라지고 없는게 맞다.

 

어제까지만 해도 통증이 계속되더니

오히려 계속 걸으니까 빨리 나은듯도 싶고,

또 인연 따라 온 통증이 인연이 다해

자연스럽게 치유가 되어 사라진 것이려니 싶다.

 

자연 속에 깃들어 자연과 하나가 되어 걸으니

자연치유의 힘이 더 깊이 관음의 손길이 되어

보듬어 준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자연치유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우리 몸의 자가 치유 작용에 대한

쉽게 간과되기 쉬운 신비로운 사실이 하나 있다.

 

자연치유란 말 그대로 자연스럽게 제 스스로 치유하도록 되어 있는

우리 몸의 자정작용이요, 일종의 자가 치료 시스템이다.

누구나 몸에 병이 오면 자연 치유 시스템이 작동하여

어지간한 병이라면 특별히 치료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치유가 되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자연치유 시스템이 잘 작동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인체 면역력이 떨어지고 자연치유 시스템에 문제가 생겨

잘 작동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어떻게 하면 우리 몸의 자가치유 시스템인

자연치유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을까?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상식으로,

자연치유를 극대화 하려면 말 그대로 ‘자연’을 가까이 하여,

자연과 하나가 되었을 때 자연치유는 극대화된다.

말 그대로 자연이 자연스럽게 치유하는게 자연치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위적이거나 가공한 먹거리가 아닌

자연 그대로의 생명력이 고스란히 살아 숨쉬는 자연식품을 먹었을 때

자연치유력은 극대화된다.

농약, 비료, 재초제로 범벅 된 연하고 보기좋은 보드라운 채소들이 아니라,

말 그대로 야생의 자연 속에서 얻어 낸 자연이 키워 낸 먹거리를 말한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자연과의 교감이다.

인공적이고 인위적인 도시 속을 벗어나

자연을 가까이 하고 자연의 살아 움직이는 생명력을

우리 안에 충분히 느끼고 받아들이며

그 안에 깃들어 살 때 자연치유력은 극대화된다.

 

그래서 수많은 요양원들이 자연 속에 지어지곤 한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진정한 ‘자연’의 의미를 아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연스럽게’ 사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스럽게 산다는 말이 얼마나 영적이며 근원적인 언어인지를 알게 된다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자연스럽게 산다는 것은

인위적이지 않고 억지스럽지 않으며 순리대로 사는 것을 말한다.

그야말로 법계의 질서, 신의 질서에

나를 완전히 내맡기고 물 흐르듯 맡기고 흐른다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법계의 질서, 신의 질서가 바로 자연의 질서다.

 

자연스러움에는 집착이나 아상, 아집이 개입될 수가 없다.

자연스럽다는 것은 무엇을 인위적으로 붙잡아 집착하지 않으며

그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을 의미한다.

 

현실을 ‘어떻게’ 해 보려거나, 바꾸려 들거나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내버려 두는 것이다.

거기에는 생각으로 옳으니 그르니, 좋으니 나쁘니 하며

따지고 분별하고 나누는 일체 인위적인 작용이 없다.

 

과거의 기억이나 경험을 끌어와 현재를 판단하거나

미래의 기대에 따라 현재를 분별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지금 이 순간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대해

그 어떤 인위적이고 가공한 무언가를 대입시키는 것이 아니다.

 

자연스러움에는 그 어떤 욕심도 집착도 판단도 억지도 없다.

아집이라는 것이 완전히 사라진 자리가 바로 자연스러움이다.

우리의 삶에 문제가 생기는 이유는 바로 자연스러움을 잃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언제나 자연스럽게 흐르고 있다.

자연스러운 진리의 삶이 내 앞에 자연스럽게 펼쳐지고 있다.

설사 그것이 내 생각과 판단에서 따져본다면

억지스럽고 억울하며 즐겁지 않다고 느끼는 현실일지라도

그것은 내 판단이요 해석일 뿐이지,

사실 본래의 현실 그 자체는 자연스러운 진리가 자연스럽게 흐르고 있는 것이다.

 

하나의 상황이나 사건이 내게 벌어진다.

그것은 그저 중립적이고도 자연스러운 상황이고 사건일 뿐이다.

나쁘거나 좋은 사건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기에 인위적인 판단을 가함으로써 중립적인 현실에

선악, 좋고 나쁨, 옳고 그름, 행과 불행이라는 억지스런 해석을 덮씌운다.

 

 

 

 

비가 온다.

비가 온다는 하나의 상황은 그저 중립적인 현실일 뿐이다.

그러나 이 상황에 어떤 사람은 ‘비 오는 날은 우울해서 싫다’거나

‘비 오는 날은 낭만적이다’거나 하는 등의 자기 판단과 해석을 가함으로써

그 상황을 피하고 싶은 싫은 상황

혹은 더 누리고 싶은 좋은 상황 등으로 몰아간다.

 

그렇게 좋거나 싫은 상황으로 해석하고 나면

더 붙잡아 집착하거나 싫다고 미워하는 등의

두 가지 극단적인 탐욕과 증오가 생겨나는 것이다.

만약 비 오는 중립적인 상황을 싫은 날로 해석했다면

그 결과 나의 세상에 있어서

비 오는 날은 괴로운 일들이 더 많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창조되곤 한다.

 

내 해석과 판단이라는 생각의 에너지가

그러한 현실을 계속해서 창조해 내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이 경험을 만들어 내고 나면

더더욱 그 생각은 굳어지고 집착이 되어 편견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우리 삶에 있어 가장 자연스러운 것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분별 없이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는 것’에 있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자기 식대로 판단하고 해석해서 본다.

그리고 그 비뚫어진 ‘바라봄’이야말로 모든 문제의 시작이다.

 

그렇기에 자연스럽게 산다는 말은 바로 ‘봄(觀)’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있는 그대로의 중립적인 평등한 현실을 인위적으로 판단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있는 그대로 자연스러움 그 자체로써 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관(觀)’이요, 자각(自覺)이고, 깨어있음, 명상이라는

인류 최고 지성들의 공통적인 사자후요 가르침이다.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는게 자연스러움이요

있는 그대로를 왜곡해서 보는게 부자연스러움인 것이다.

 

 

 

 

다시 자연 치유로 돌아가자.

병이 있을 때 병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판단 없이 지켜볼 수 있을까?

우리 몸, 신체 어느 부분이 아프고 저리고 쓰리다고 했을 때

바로 그 부분에

우리의 알아차림, 자각, 주의력, 예민한 바라봄의 빛을 쏘아줄 수 있는가!

 

있는 그대로 지켜본다는 것 자체가

무한한 우주적인 치유요 구원이고 자비이며 사랑을 의미한다.

그 아픈 부분에 사랑의 빛, 자각의 빛을 놓아주는 것이다.

왜 분별없이 지켜본다는 것이 사랑인가!

 

통상 우리가 행하는 사랑은 반쪽짜리다.

사랑 이면에 미움을 포함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배신하면 그 미움 또한 사랑의 크기만큼 클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사랑이 순수하지 않고 양 극단으로 나뉘며,

차별적인 사랑이란 것을 보여준다.

 

진정한 사랑은 그 이면에 증오를 포함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진정한 사랑에는 실패가 없다.

사랑 그 자체로 이미 사랑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랑이 바로 무차별, 무분별의 중도적인 사랑이고,

그것은 분별없이 사랑하는 대상을 바라볼 때 가능해진다.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병’을

무분별의 근원적인 사랑의 빛으로 감싸안아 줄 때

그 병은 근원적인 치유를 시작하게 된다.

 

그저 단순하게 바이러스만을 없애거나

표면적인 치료만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저 깊은 병의 원인에 까지 깊이 파고들어 가

근원적인 치유를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은 때때로 심리적인 측면의 치료일 수도 있고,

성격적인 원인의 치유일 수도 있으며,

심지어 전생까지 거슬러 올라가야만 하는

업이라는 병의 원인까지를 깊이 찾아내 근원적인 치유를 시작하는,

현대 의학적 치료를 넘어서는 범주의 근원적 치유이다.

 

병이란 어떤 한 가지 혹은 여러 가지 원인에 대한 결과로써 나타난다.

그 원인은 주로 좋지 않은 행위나, 마음의 행위일 것이다.

병이 있다는 것은 내 안에 어떤 그 병이 일어나도록 만드는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원인은 물론 부정적인 어떤 것이다.

거기에 사랑은 없다.

 

내가 병을 치유하고자 한다면

그 병의 원인인 내 안의 어떤 부정적인 에너지, 부정적인 업,

부정적인 어떤 원인에 대해 마음을 다해 참회해야 한다.

내 안의 병의 원인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는 없을지라도

그것에 대해 진심으로 용서를 구해야 하는 것이다.

 

진정한 용서는 차별없는 근원적인 사랑과 지혜를 통해서만 깃든다.

그리고 바로 그 사랑과 지혜의 빛이 바로 깨어있음이요,

관조, 자각이라는 알아차림의 빛이다.

그랬을 때 내 안의 병은 즉각 근원적인 차원에서부터

다각적이고도 전체적인 사랑의 치유를 시작한다.

 

물론 그렇기에 현대 의학의 치료에서와 같은

직접적이고 바로 바로 그 효과가 드러나는

그런 효능은 당장에 경험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병원이나 약이 할 수 있는 치료행위를 넘어서

본질적인 차원의 치유이자

우주적인 차원의 다차원적인 접근의 치유인 것이다.

 

심지어 그것을 통해 우리가 쉽게 업장소멸이라고 말하는

존재 자체의 근원적인 변화가 찾아 올 수도 있다.

 

 

 

 

어쨌거나 무릎이 나아져서 다행이다.

이것이 때가 되어서 그냥 나아진 것인지,

며칠간 계속되는 자각과 통증을 지켜보는 주의력을 통해 나아진 것인지는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

 

다만 우리 몸에 일상적인 흐름을 깨는 무언가를 느낄 때,

그것이 병이나 통증이 되었든,

혹은 분노나 화, 슬픔, 질투, 실패, 외로움 등 그 무엇이 되었든

바로 그 평상심을 깨는

바로 그것을 분명한 알아차림으로 분별없이 지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랬을 때 그 병이나 고통 혹은 슬픔과 비통한 현실은

오히려 존재의 새로운 진보와 성숙,

한단계 차원을 뛰어넘을 수 있도록 만드는 하나의 영적 수행의 재료인 것이다.

고마운 경계인 것이다.

 

그러니 우리 앞에 끊임없이 펼쳐지는

그 어떤 좋고 나쁜 상황들일지라도

거기에 좋거나 나쁘다는 분별을 짓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지켜보는 가운데에서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성숙과 진화와 깨어남이라는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내딛게 되는 것이다.

 

딩보체에 도착하자마자 산에 온 지 처음으로

따뜻한 물을 300루피에 사서 아쉬운대로 샤워를 한다.

 

점심을 먹고 오후 시간을 딩보체 마을 산책으로 여유있게 보낸다.

4,000고지가 넘는 이 척박한 곳에서

뿌리를 박고 농사를 지으며 삶을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그 자체야말로 신비이고 기적이다.

 

 

 

 

산책 중에 만나는 현지 원주민들에게 경이로운 시선이 머문다.

 

 

 

 

산책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눕체 봉우리에 걸린 황홀경의 저녁 노을과 조우!

 

 

 

 

출처 : 목탁소리 지대방
글쓴이 : 법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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