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적 시민민주주의

체험 87년 6-10항쟁,영화 속 감동으로 오는 장면....

장백산-1 2011. 6. 11. 01:10

내가 겪은 6.10항쟁, 영화 속 감동적 장면처럼 떠오르는...
번호 54939 글쓴이 거다란 조회 751 등록일 2011-6-10 13:27 누리74
원문주소: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seoprise_13&uid=54939

87년 20살은 내게 행복한 한 해였다. 그전까지 철저히 통제받던 나의 시간과 공간을 이제 누구도 제한하지 않았다. 그건 나에게 혁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지옥같은 학교를 탈출했다는 행복감에 비하면 대학에 못갔다는 아픔은 정말 사소한 것이었다. 이문세의 노래만으로도 감성은 넘쳐났고, 컵라면에 샌드위치를 찍어먹어도 배부르고 맛있었다. 행복의 증거로 56kg이던 몸무게가 68kg까지 불어났다.

 

그 해 대한민국도 나처럼 압제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데모소식이 들리더니 재수생의 본거지인 초읍도서관에도 서면으로부터 최루탄 향기가 밀려왔다. 전두환은 독재자고 시위학생들은 애국자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최루탄냄새는 새파랗게 젊은 우리에게 정의에 대한 의무감으로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재수생이라는 자조가 이내 그 긴장감을 해체시켜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녀석이 우리의 나른한 오후를 깨트렸다. 시위현장으로 갈건데 같이 갈 사람 없냐는 소리를 던졌다. 외면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대답을 해야 했다. 안가겠다면 ‘정의’를 저버릴만한 타당한 이유도 말해야 했다. 그 녀석의 단 한마디에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져버렸다. 다들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가겠다고 대답했다.

 

날짜는 기억나지 않는 6월 어느 날 우린 남포동으로 갔다. 버스에 내려서부터 곳곳에 전경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먼저 자갈치 고래고기집으로 향했다. 천원씩 모아 고래고기에 소주를 시켰다. 일인당 3잔 정도 돌았다. 취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집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갈 수 없었다. 독재시대에 투사가 된 젊음들도 아마 나처럼 집에 가지 못해 투사가 된건 아니었을까?

 

집회 현장은 한 군데가 아니었다. 여기저기서 소리가 들렸다. 그 중 한군데 자리 잡았다. 대여섯줄 앞에 전경들이 보였고 한 여학생이 전경의 방패에 장미꽃을 꼽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얼마 후 뒤를 돌아보니 까마득한 대열이 보였다. 그때서야 우리가 시위대 거의 앞줄에 있다는 걸 알았다. 옆으론 전경들의 방패가 손 뻗으면 닿았다. 두려웠다. 여기 이 사람들은 두렵지 않은 걸까. 내가 모르는 무슨 확신같은 게 있는 걸까?

 

전경들이 바삐 돌아나가기 시작했고 우리도 데모가를 부르며 사람들의 움직임을 조심스럽게 따라갔다. 앞길이 열리는 듯싶더니, 얼마 뒤 하늘에서 최루탄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소리만으로도 효과는 충분했다. 바로 그 즉시 나는 뒤로 뛰었다. 열심히 뛰는데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 앞으로 오세요”

 

최루탄현장을 빠져나오니 한 녀석이 집에 가자고 했다.

그런데 갈 수가 없었다. 그건 처음 느꼈던 의무감과는 달랐다. 의무감에 흥분감이 섞이기 시작했다. 데모대가 잡은 버스에 올라타버렸다. 수십명이 올라탔지만 아무도 차비를 내지 않았다. 아저씨도 차비를 달라고 하지 않았다.

 

2차 시위현장의 규모는 어마어마했다. 광복로 4차선 대로를 꽉 채운 줄이 수십미터 이어졌다. 옆에 구경나온 아저씨들 소리가 들렸다. “부산이 지금 최고다. 서울도 이 정도 안된다” 정말 뉴스에서 나온 서울 시위대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의 인파였고 장관이었다. 아마 방송사의 화면조작도 그런 느낌에 한 몫 했을 것이다.

 

4차선 대로의 공방은 전투에 처음 참여하는 나에게도 잘 보였다. 시위대가 어느 정도 밀고 나가면 곧 최루탄과 지랄탄이 쏟아지고 전경들이 밀려들었다. 그러면 수만명의 시위대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대로는 텅 비어버렸다. 공백은 길지 않았다. 수 분 뒤 어디선가 “삼천만 잘들었을 때 우리는 깨어~~”라는 노래 소리가 들리고 구석구석에서 사람들이 나타나 어느새 아까 그 인원이 다시 모였다. 그런 흩어지고 모이는 퍼포먼스가 밤새 이어졌다.

 

영화속에 그런 장면이 있다. 아군이 고립되어 괴멸 직전에 있는데 언덕 너머 여기 저기서 지원부대가 등장한다. 장엄한 음악이 흐르고 아군의 감격적 얼굴들이 나타난다. 감동적인 영화장면이다. 그런데 그 장면을 나는 실제로 겪었다. 전경에게 도망간 줄 알았던 시위대가 희미하게 들리는 노래소리와 함께 골목골목에서 나타나는 영화같은 현장에 바로 내가 있었다. 지금도 ‘5월 그날이 다시 오면~~’ 이란 노래를 들을 때마다 그 때 장면이 생각나 목이 매어온다.

 

내 인생에서 그 때 처음 전율을 느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나는 이 같은 전율을 경험하지 못했다. 2002년 월드컵 세대가 가끔 87항쟁 세대와 비교된다. 두 세대가 대규모 길거리 연대의 추억을 공유한 세대라는 것이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2002년은 87년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2002년에 있는 것은 87년에 더 많고, 87년에 있는 것 중에 2002년에 없는 것이 많다. 두려움과 정의감이 섞인채 수만명이 보여준 그 역동적 모습은 월드컵 우승을 해도 재연하지 못할 장면이다.

 

개선문을 통과해본 적이 있는가. 난 그 느낌을 안다. 시위 대열이 대로를 행진하고 있었고 육교 위 시민들이 빽빽이 올라서서 우리의 행진을 지켜봤다. 대열이 육교 밑을 통과할 때 우뢰와 같은 박수와 함성이 터져나왔다. “느그들한테 이런 일 시켜서 미안하다” 박수뿐이 아니었다. 육교위에서 빵과 과자가 비오듯이 쏟아졌고, 빌딩에서 하얀 담배가치가 뿌려졌다. “이것밖에 주지 못해 미안하다” 하늘에서 과자와 빵이 떨어지다니, 동화 속에서나 나올법한 얘기 아닌가. 이제 나는 정말 집에 가기 싫어졌다.

 

부산역 근처에 가니 택시기사아저씨가 붙잡는다. “학생들 우리가 도와주께. 자 타라.” 택시 수백대가 전경과 대치 중인 시위대 앞으로 집결하여 크락숀을 울려댄다. 택시를 앞세워 돌파하려는 것이다. 번호판은 모두 수건으로 가렸다. 그게 오히려 기사아저씨들의 결의를 더 확실히 보여주었다. 택시마다 학생들 두 세명이 타고서 진압부대를 향해 돌진했다.

 

내 머릿속에 20살 그날의 기억들은 그대로 박혀버렸다. 그리고 그 기억들은 내 인생의 평생의 명령이 되었다. 이 사회의 정의를 위해 행동을 하는 그 수많은 사람들의 전율 넘치는 연대를 보았기에 난 좀 덜 야비해졌을 것이다. 박수쳐준 회사원들, 과자를 던져준 노동자들, 시위대를 도와주겠다던 택시기사분들 그들의 모습이 이 사회를 바라보는 나의 시각의 버팀목이다. 그 기억 때문에 나는 이 사회를 신뢰하고 변화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우리는 87세대다. 2002년 세대는 월드컵을 기다리겠지만 우리는 정치의 계절을 기다린다. 약자인 대중이 모이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현장에서 직접 목격했다. 박수소리, 환호성, 육교위의 회사원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시민운동과 정치의 가능성을 우리는 그때 봤다. 87세대는 대중정치운동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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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를 기대한다는 것은 바로 이 사회에 대한 신뢰의 표현이다. 그건 건강한 믿음이다. 87년 6월은 87세대에게 이 사회에 대한 건강한 믿음을 만들어 주었고 그 건강한 사람들이 대한민국 민주주의 성장에 큰 기여를 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87세대의 박수소리와 환호성은 몇 번 더 올것이라고 믿는다. 우리 세대의 건강함이 죽는 날까지 이 사회 민주주의의 버팀목이 될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20년전 그때의 그 전율을 절대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2007년 블로그에 적었던 글 다시 올려봅니다.

http://geodaran.com/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