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당과 야당, 보수와 진보 가릴 것 없이 여러 정치 지도자가 '경제 민주화'를 이야기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잘못된 관행을 고치고, 서민 복지와 일자리 창출에 더 많은 힘을 쏟아 궁극적으로 잘살고 못사는 사람의 차이를 좁히겠다는 것이다. 세계 경제위기가 확산되면서 나타난 현상인데, '경제 민주화'가 처음 나오는 얘기가 아니다. 우리 역사에서 복지사상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배영대 기자 < balancejoongang.co.kr >
고종때 황실 유학생으로 일본서 신학문 공부
그가 교육받은 이력을 먼저 살펴볼 만하다. 1887년 경기도 교하군(현재의 파주군)에서 태어난 그는 18세까지 사서삼경을 비롯해 전통 한학을 공부했다. 15세까지는 조부에게 배웠고, 16세 때 성균관에 입학해 학습했다. 나라 이름이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뀌고, 서구 열강과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를 호시탐탐 노리던 시절이다.
러일전쟁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904년 그는 고종황제가 실시한 '황실(皇室) 특파 유학생' 시험에 합격하는데, 인생의 한 전기였다. 그해 10월 인천을 출발해 일본에서 8년간 유학하며 서양 신학문을 본격 접하게 된다. 함께 선발된 유학생 50명 가운데 최남선·최린도 포함돼 있었다. 소앙은 동경부립제일중학교(東京府立一中)와 메이지(明治·명치)대학 법과에서 수학했다. 전통적인 유학 공부를 거친 후 일본의 정규 교육과정을 통해 서양 신학문까지 습득한 후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것이다. 1912년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 중국으로 망명했고, 45년 12월 임시정부 요인들과 환국할 때까지 32년간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독립운동의 정당성, 균등이란 보편적 가치로 이끌어내
삼균주의의 핵심 가치는 균등이다. 삼균에서 '균'은 '평(平)'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균등이란 평등과 같은 뜻인 셈이다. 삼균주의는 크게 두 개의 축으로 구성된다. 하나의 축은 개인·민족·국가 세 부문의 균등을 지향하는 것이다. 소앙은 "사람과 사람,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의 균등생활을 주의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다른 하나의 축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균등을 보다 구체화한 것으로 정치·경제·교육 세 부문의 균등을 가리킨다. 흔히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삼균주의의 중심 내용이자 출발점으로 간주한다.
소앙이 볼 때 삼균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기본조건은 다름 아닌 일본 제국주의로부터의 독립이었다. 식민 모국의 1등 국민과 식민지 2등 국민의 차별을 없애는 일은 독립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균등이란 보편적 가치를 통해 이끌어냈다. 그런 점에서 독립운동 지도이념의 자격을 갖춘 셈이지만,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독립 이후 새 국가 건설의 전망까지 포함하고 있다.
정치·경제·교육의 균등 … 임시정부 건국강령 기초
소앙은 6·25전쟁 때 납북된 후 1958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 평양시 충남 천안시 목천읍 독립기념관 안에 세운 조소앙 선생 어록비. 교외 신미리 애국열사릉의 조소앙 묘비.삼균주의에서 오늘날 새롭게 부각되는 것은 정치·경제·교육 부문의 균등이다.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 논리에 그치지 않고 독립된 사회의 구성원리를 전망하는 소앙의 특색이 드러난다. 균권(均權:정치 균등), 균부(均富:경제 균등), 균지(均智, 혹은 균학·均學:교육 균등)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에서도 특히 교육 균등을 주요 항목으로 포함시킨 점이 돋보인다. 중국 신해혁명의 지도자 쑨원(孫文)이 내세운 삼민(三民:민족·민권·민생)주의와 비교할 때, 소앙의 삼균주의가 두드러지게 다른 점은 교육에 대한 강조다.
소앙은 균권, 곧 정치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선 우선 보통선거제를 실시해 국민이 정치에 고르게 참여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를 통해 국민의 기본권을 균등하게 보장할 수 있을 것으로 이해한 것인데,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교육이었다. 교육 균등을 이루지 못하면 국민의 식견이 좁고 능력이 박약하게 되므로 정치가 부패하는 결과를 초래하며 진정한 정치 평등은 실현될 수 없다고 보았다. 이 때문에 소앙은 의무교육제를 확립하고 교육기관의 수를 늘려 교육기회를 고르게 제공할 것을 주장했다. 제도권 교육만 가리킨 것이 아니라 국민의 교양과 문화 전반의 수준 향상을 목표로 했다.
균부, 곧 경제 균등은 요즘 말로 치면 경제 민주화인데 삼균주의의 토대라 할 수 있다. 경제 균등이 없는 정치 균등은 '가짜 평등'이라고 하여 낮춰 보았다. 경제 균등의 대책으로 토지 국유화와 대규모 생산기관의 국영화를 제시했다. 토지의 70%가 일제와 일본인에게 빼앗긴 이른바 적산(敵産)이었으므로 이를 국가가 회수, 관리해야 한다는 구상이었다. 경제적 측면에서 소앙의 구상은 당시 유행했던 사회주의의 이상을 일부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소앙은 공산주의는 분명히 반대했다. 공산주의가 계급의 이름 아래 민족 내부의 폭력혁명을 유발한다고 그는 보았는데, 독립된 조국에서 같은 민족끼리 자칫 발생할 수 있는 '유혈 혁명'을 우려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소앙이 내세운 경제 균등은 폭력혁명을 예방하기 위한 일종의 '예방 혁명론'으로 해석되고 있는데, 1930~40년대 독립운동 지도부의 고민 수준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자본·공산주의 단점 극복한 민주화 이론 '삼균주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소앙의 인식은 단지 옛날이야기로만 읽히지 않는다. 소앙은 당시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을 모두 '독재'라 비판했다. 김기승 순천향대 교수의 해석에 따르면 소앙은 미국의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를 '지부(智富)계급의 독재'라고 했으며, 소련에 대해선 자신들이 '프롤레타리아(무산자 계급) 민주주의'라고 자칭해도 사실은 '노농(勞農)계급의 독재'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또 미국의 경우 정치 민주화를 중시해 경제와 교육의 민주화를 소홀히 했다면, 소련은 경제 민주화를 중시하면서 교육과 정치의 민주화를 소홀히 한다고 양쪽의 단점을 모두 지적했다.
결국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제도의 단점을 극복하면서 정치·경제·교육 세 분야의 민주화를 골고루 이루기 위한 이론이 바로 삼균주의라는 것이다. 일본 패망 이후 해방 정국에서 국내의 중도파 지도자들이 요즘 말로 치면 '제3의 길'을 모색하며 이른바 '조선식 민주주의' '신민주주의' 등의 표현을 사용했는데, 소앙의 삼민주의는 그 같은 흐름의 원류에 해당하며, 한국적 사회민주주의의 원형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1950년 국회의원 당선 … 6·25 발발후 납북
소앙의 1948~50년 행적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그는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면서 백범 김구 선생의 '남북 협상'에 합류해 북행길에 오른다. 48년 4월 김구·김규식 등과 함께 평양으로 가서 이른바 남북 지도자 연석회의에 참석한 것이다. 그런데 이 평양행은 소앙이 정치노선을 전환하는 계기가 됐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 북한의 실상 등을 체험한 이후의 변화다. 평양에 다녀온 후 그는 새로 태어난 대한민국 정부를 인정하면서 1950년 5·30 선거에도 참여해 국회의원이 된다. 그러나 새 조국에서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기도 전 6·25전쟁이 발발, 북한군에 납북됐고, 정확한 사인이 밝혀지지 않은 채 1958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도움 주신 분=조만제 삼균학회 이사장, 김기승 순천향대 교수, 김인식 중앙대 교수
◆참고 문헌=김기승 지음 『조소앙이 꿈꾼 세계』(지영사·2003년), 김인식 논문 '조소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삼균주의'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조소앙'
◆사진 자료=독립기념관
'삼균(三均)주의' 를 주창한 소앙(素昻) 조용은(1887~1958) 선생이다.
고종때 황실 유학생으로 일본서 신학문 공부
소앙 조용은이 창시한 삼균주의는 한국적 복지사상의 원류로 손꼽힌다. 삼균주의는 41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공포한 '대한민국 건국강령'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사진은 1940년 5월 16일 '통합 한국독립당' 제1차 중앙집행위원회 참석자들. 백범 김구(앞줄 오른쪽에서 넷째)가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 조소앙(앞줄 오른쪽 둘째)은 부위원장을 맡았다. 앞줄 왼쪽부터 둘째가 지청천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중앙에 앉은 이는 이시영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이다.
전통 한학과 서양 신학문을 섭렵한 후 독립운동에 투신한 소앙 조용은. 성균관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황실 특파 유학생'으로 선발, 일본에 8년간 유학하며 메이지대 법과를 졸업했다.소앙 조용은의 이력과 위상은 우리 근현대사에서 특이하다. 독립운동가이면서 대한민국 제2대 국회의원 선거 때 전국 최다 득표로 당선됐기 때문만은 아니다. 전통과 현대가 맞물리는 시대를 살며 당대 사회 현실을 타개할 자신만의 독창적인 이론을 제기한 인물이었다.
그가 교육받은 이력을 먼저 살펴볼 만하다. 1887년 경기도 교하군(현재의 파주군)에서 태어난 그는 18세까지 사서삼경을 비롯해 전통 한학을 공부했다. 15세까지는 조부에게 배웠고, 16세 때 성균관에 입학해 학습했다. 나라 이름이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뀌고, 서구 열강과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를 호시탐탐 노리던 시절이다.
러일전쟁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904년 그는 고종황제가 실시한 '황실(皇室) 특파 유학생' 시험에 합격하는데, 인생의 한 전기였다. 그해 10월 인천을 출발해 일본에서 8년간 유학하며 서양 신학문을 본격 접하게 된다. 함께 선발된 유학생 50명 가운데 최남선·최린도 포함돼 있었다. 소앙은 동경부립제일중학교(東京府立一中)와 메이지(明治·명치)대학 법과에서 수학했다. 전통적인 유학 공부를 거친 후 일본의 정규 교육과정을 통해 서양 신학문까지 습득한 후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것이다. 1912년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 중국으로 망명했고, 45년 12월 임시정부 요인들과 환국할 때까지 32년간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독립운동의 정당성, 균등이란 보편적 가치로 이끌어내
충남 천안시 목천읍 독립기념관 안에 세운 조소앙 선생 어록비.소앙의 위상은 그가 창시한 삼균주의에서 그 빛을 발휘한다. 삼균주의는 1930년대 초반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도이념으로 정착돼 갔다는 평가를 받는다. 1941년 11월 충칭(重慶) 임시정부가 공포한 '대한민국 건국강령'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 소앙은 임시정부 외무부장이었다. 소앙이 활약하던 무렵 유행했던 사상은 민족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무정부주의(아나키즘) 등이었다. 소앙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대신하거나 포괄하는 이념으로 삼균주의를 제시했다.
삼균주의의 핵심 가치는 균등이다. 삼균에서 '균'은 '평(平)'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균등이란 평등과 같은 뜻인 셈이다. 삼균주의는 크게 두 개의 축으로 구성된다. 하나의 축은 개인·민족·국가 세 부문의 균등을 지향하는 것이다. 소앙은 "사람과 사람,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의 균등생활을 주의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다른 하나의 축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균등을 보다 구체화한 것으로 정치·경제·교육 세 부문의 균등을 가리킨다. 흔히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삼균주의의 중심 내용이자 출발점으로 간주한다.
소앙이 볼 때 삼균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기본조건은 다름 아닌 일본 제국주의로부터의 독립이었다. 식민 모국의 1등 국민과 식민지 2등 국민의 차별을 없애는 일은 독립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균등이란 보편적 가치를 통해 이끌어냈다. 그런 점에서 독립운동 지도이념의 자격을 갖춘 셈이지만,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독립 이후 새 국가 건설의 전망까지 포함하고 있다.
정치·경제·교육의 균등 … 임시정부 건국강령 기초
소앙은 균권, 곧 정치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선 우선 보통선거제를 실시해 국민이 정치에 고르게 참여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를 통해 국민의 기본권을 균등하게 보장할 수 있을 것으로 이해한 것인데,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교육이었다. 교육 균등을 이루지 못하면 국민의 식견이 좁고 능력이 박약하게 되므로 정치가 부패하는 결과를 초래하며 진정한 정치 평등은 실현될 수 없다고 보았다. 이 때문에 소앙은 의무교육제를 확립하고 교육기관의 수를 늘려 교육기회를 고르게 제공할 것을 주장했다. 제도권 교육만 가리킨 것이 아니라 국민의 교양과 문화 전반의 수준 향상을 목표로 했다.
균부, 곧 경제 균등은 요즘 말로 치면 경제 민주화인데 삼균주의의 토대라 할 수 있다. 경제 균등이 없는 정치 균등은 '가짜 평등'이라고 하여 낮춰 보았다. 경제 균등의 대책으로 토지 국유화와 대규모 생산기관의 국영화를 제시했다. 토지의 70%가 일제와 일본인에게 빼앗긴 이른바 적산(敵産)이었으므로 이를 국가가 회수, 관리해야 한다는 구상이었다. 경제적 측면에서 소앙의 구상은 당시 유행했던 사회주의의 이상을 일부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소앙은 공산주의는 분명히 반대했다. 공산주의가 계급의 이름 아래 민족 내부의 폭력혁명을 유발한다고 그는 보았는데, 독립된 조국에서 같은 민족끼리 자칫 발생할 수 있는 '유혈 혁명'을 우려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소앙이 내세운 경제 균등은 폭력혁명을 예방하기 위한 일종의 '예방 혁명론'으로 해석되고 있는데, 1930~40년대 독립운동 지도부의 고민 수준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자본·공산주의 단점 극복한 민주화 이론 '삼균주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소앙의 인식은 단지 옛날이야기로만 읽히지 않는다. 소앙은 당시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을 모두 '독재'라 비판했다. 김기승 순천향대 교수의 해석에 따르면 소앙은 미국의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를 '지부(智富)계급의 독재'라고 했으며, 소련에 대해선 자신들이 '프롤레타리아(무산자 계급) 민주주의'라고 자칭해도 사실은 '노농(勞農)계급의 독재'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또 미국의 경우 정치 민주화를 중시해 경제와 교육의 민주화를 소홀히 했다면, 소련은 경제 민주화를 중시하면서 교육과 정치의 민주화를 소홀히 한다고 양쪽의 단점을 모두 지적했다.
결국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제도의 단점을 극복하면서 정치·경제·교육 세 분야의 민주화를 골고루 이루기 위한 이론이 바로 삼균주의라는 것이다. 일본 패망 이후 해방 정국에서 국내의 중도파 지도자들이 요즘 말로 치면 '제3의 길'을 모색하며 이른바 '조선식 민주주의' '신민주주의' 등의 표현을 사용했는데, 소앙의 삼민주의는 그 같은 흐름의 원류에 해당하며, 한국적 사회민주주의의 원형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1950년 국회의원 당선 … 6·25 발발후 납북
소앙의 1948~50년 행적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그는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면서 백범 김구 선생의 '남북 협상'에 합류해 북행길에 오른다. 48년 4월 김구·김규식 등과 함께 평양으로 가서 이른바 남북 지도자 연석회의에 참석한 것이다. 그런데 이 평양행은 소앙이 정치노선을 전환하는 계기가 됐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 북한의 실상 등을 체험한 이후의 변화다. 평양에 다녀온 후 그는 새로 태어난 대한민국 정부를 인정하면서 1950년 5·30 선거에도 참여해 국회의원이 된다. 그러나 새 조국에서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기도 전 6·25전쟁이 발발, 북한군에 납북됐고, 정확한 사인이 밝혀지지 않은 채 1958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도움 주신 분=조만제 삼균학회 이사장, 김기승 순천향대 교수, 김인식 중앙대 교수
◆참고 문헌=김기승 지음 『조소앙이 꿈꾼 세계』(지영사·2003년), 김인식 논문 '조소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삼균주의'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조소앙'
◆사진 자료=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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