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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교과서는 알려주지 않는 제주4.3사건 이야기

장백산-1 2017. 4. 3. 00:50



[이런 오늘]
국정교과서는 알려주지 않는
제주4.3사건 이야기


오늘(3일)은 제69주년 제주4·3사건 희생자 추념일이다. 이날은 제주도에서 일어난 현대사의 큰 비극을 떠올리며 3만 명이 넘는 희생자의 영혼을 위로하는 날이다.

바다로 둘려싸여 고립된 섬 제주도가 ‘거대한 감옥’이자 ‘학살터’로 바뀌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제주4·3평화재단에서 제시한 자료 중 박찬식 4·3추가진상조사단장이 쓴 글 ‘4·3의 진실’ 중심으로 사건을 정리했다.

2000년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는 제주4·3에 대해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북청년회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남한의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정의했다.



제주4·3사건을 다룬 영화 <지슬-끝나지 않은 세월 2> 스틸컷


1947년 3월 1일, 제주도에서 열린 3.1절 기념식에서 기마경관이 탄 말에 어린이가 치이는 사건이 있었다. 이에 분노한 군중은 경찰을 향해 돌을 던지며 경찰서까지 쫓아갓다. 경찰은 이를 경찰서 습격으로 오인하고 총을 들었다. 경찰의 발포에 민간인 6명이 사망하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3·1절 발포사건’은 어지러운 민심을 악화시켰다.

사건 이후 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직적인 반경찰 활동을 전개했다.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 이상이 대규모 민·관 총파업에 참여했다. 미군정은 사후 처리에서 경찰의 발포보다는 남로당의 선동에 비중을 두고 강공정책을 추진했다.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들은 모두 외지인으로 교체됐다. 경찰은 파업 주모자에 대나 검거작전을 벌여 한 달만에 5백여 명을 체포했고, 1년 동안 2천5백 명을 구금시켰다. 구금자에 대한 경찰의 고문이 잇따랐다. 

1948년 4월3일 새벽 2시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탄압이면 항쟁이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봉기했다. 350명의 무장대는 이날 새벽 12개의 경찰지서와 서북청년회원(이하 서청) 등 우익단체 요인들의 집을 습격해 12명을 살해했다. 무장대는 경찰과 서청의 탄압중지, 단독선거 · 단독정부 반대, 통일정부 술비촉구 등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1992년 4월 3일 제주 4.3 연구소 현장 조사반이 4.3 사건 희생자로 추정되는 유골 11구가 발견된 북제주군 구좌읍 세화리 남서쪽 6km 지점 다람쥐굴 내부를 조사하고 있다. 사진 경향신문 DB


제주4.3사건으로 인한 비극과 고통의 상징인 ‘무명천 할머니’ 진아영씨의 생전 모습. 진아영 할머니는 경찰에 쏜 총탄에 턱을 잃고 천으로 턱을 두른 채 55년을 살았다. 사진 연합뉴스


1948년 5월 10일 전국 200개 선거구에서 선거가 실시됐다. 제주도의 세 개 선거구 가운데 두 개 선거구가 투표소 과반수 미달로 무효 처리됐다. 제주도는 남한에서 유일하게 5·10선거를 거부한 지역이 됐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제주도 사태는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됐다.

1948년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됐다. 토벌대가 저지른 방화로 중산간마을이 불바다가 됐다. 가옥 2만여 호, 4만여 동이 소실되는 등 중산간마을의 95% 이상이 불에 타 사라졌다. 이 과정에서 중산간에 남아있던 주민들이 집단으로 희생됐다. 중산간 지대 뿐만 아니라 해안마을에 있던 주민들까지도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희생됐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입산하는 피난민이 늘어났고, 그들은 추운 겨울 한라산 속에서 숨어 다니다 경찰에 잡히면 사살되거나 형무소 등지로 보내졌다.

2003년 10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확정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 의하면 4·3사건의 인명 피해는 2만5000명∼3만명으로 추정되고, 강경진압작전으로 중산간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으며, 가옥 3만9285동이 소각됐다. 4·3사건진상조사위원회에 신고 접수된 희생자 및 유가족에 대한 심사를 마무리한 결과(2011. 1. 26 기준) 희생자로 1만4032명과 희생자에 대한 유족 3만1255명이 결정됐다.



2006년 4월 3일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에서 열린 ‘제58주년 제주4.3사건 희생자 위령제’에 참석한 고 노무현 대통령이 묵념을 올리고 있다. 사진 청와대사진기자단


1980년대 이후 4·3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각계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2000년 1월에 4·3특별법이 공포됐다. 2003년 10월 정부의 진상조사보고서 채택과 대통령의 공식 사과 등이 이뤄졌다.

2006년 4월 3일 제58주년 제주4.3사건 위령제에서 고 노무현 대통령은 “불행한 역사 속에서 무고하게 희생당한 분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함께 모였다”면서 “오랜 세월 말로 다 할 수 없는 억울함을 가슴에 감추고 고통을 견디어 오신 유가족 여러분께 진심으로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전했다.

2014년 3월, 제주4·3사건 희생자 추념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 사건 발생 66년 만이다.



4·3 사건 때 동광리 주민들이 2개월 가량 집단적으로 은신생활을 했던 천연동굴인 동광 큰넓궤 입구. 사진 박미라 기자


하지만 우리 국민이 제주4·3사건의 의미를 찾을 기회가 점점 줄어드는 것으로 보인다.

2016년 11월 28일 교육부가 공개한 중고등학교 국정교과서 내 4·3사건 내용은 5줄 안팎으로 간략하게 기술됐다. 지역사회에서는 이를 놓고 4·3사건 발발 배경과 희생자 규모 등이 생략되고 변질됐다며 반발했다. 국정교과서에 기술된 내용만으로는 학생들이 4·3사건을 이해하고 공부하는데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당시 양윤경 4·3유족회장은 “국정교과서를 보니 4·3의 전후과정도 생략하고 피해자수도 언급안한 채 대여섯줄로 간략하게 기술했더라. 우려가 현실이 됐다”며 “제주도민의 10%가 국가공권력에 의해 희생당한 엄청난 사건을 이렇게 설명하고 학생들에게 교육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 4·3을 축소해 교육하겠다는 것으로, 이대로 가겠다고 하면 국정교과서 폐기 운동에 적극 앞장설 것”이라고 말했다.



2016년 11월 28일 오전 교육부가 국정교과서 공개를 앞두고 기자들에게 배포한 중·고등학교 과정 역사 교과서 현장 검토본. 사진 강윤중 기자


2017년 2월 13일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2018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연계 교재인 EBS <수능특강 한국사영역 한국사>가 제주4·3사건의 원인을 “좌익세력의 무장봉기”로 서술해 국정 역사교과서에 이어 편향성 논란이 가열될 것으로 전망된다고 보도했다. 

제주 4·3사건 연구자인 이영권 교사(제주 영주고)는 “아무리 간략히 서술해도 최소한의 용어와 사실은 기술해야 한다”며 “남로당이 주도했지만 일반 도민 참여도 많았는데 ‘좌익세력 등’으로 뭉뚱그렸으며 ‘5·10 총선거’가 ‘남한만의 단독선거’라는 문제가 있었다는 점도 언급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또한 “무장봉기 배경이 드러나지 않으면서 무력을 사용한 측을 ‘악’의 세력으로 인식하게 되고, 최소 3만명이 숨진 진압 과정에서도 ‘이승만 정권의 군경에 의한 희생’이라는 점이 드러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제주도 측은 이에 굴복하지 않았다. 

2017년 3월 23일 제주도교육청은 올해부터 자체적으로 개발한 4·3교재를 학교에 보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4·3유족들이 직접 학교를 찾아 학생들에게 당시 4·3이야기를 들려주는 ‘4·3평화인권교육 명예교사제도’도 운영한다. 4·3유족 29명이 초등학교 58개교와 중학교 18개교, 고등학교 7개교 등 모두 87개의 학교를 찾아 현장 교육을 할 예정이다.



2016년 4월 3일 제주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에서 한 시민이 희생자 명패를 닦고 있다. 사진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2004년 4월 5일 제주4.3사건 당시 군경 토벌대에 의해 초토화됐던 제주시 화북동 곤을동마을에서 해원상생굿이 열려 유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제주칠머리당굿(무형문화재71호) 소속 무당이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제주4·3평화공원에 백비(白碑)가 있다. 백비는 어떤 까닭이 있어 글을 새기지 못한 비석이다. 해당 비석 앞에는 “‘봉기·항쟁·폭동·사태·사건’ 등으로 다양하게 불려온 제주4·3은 아직까지도 올바른 역사적 이름을 얻지 못하고 있다. 분단의 시대를 넘어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통일의 그날, 진정한 4·3의 이름을 새길 수 있으리라”라는 글이 적혀있다.

오늘 제주4·3사건 69주년을 맞는 제주도, 의회, 도교육청 등 도내 기관·단체는 “평화와 인권의 시대를 함께 만들어가자”며 사건에 대한 완전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등을 위한 목소리를 낼 예정이다.

이날 하루만큼은 우리도 제주도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여 보는 것은 어떨까. 제주4·3사건의 희생자와 유가족을 떠올리며 현대사의 아픈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을 함께 고민해보자.

<이진선 PD dora@kyunghyang.com>


입력 : 2017-04-03 00:00:00수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