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민주항쟁' 30주년]
"그날의 희생, 헛되지 않았음을 30년 지나
촛불 보며 알게 돼"
최미랑 기자 입력 2017.06.11. 22:57 수정 2017.06.11. 23:05
[경향신문]
ㆍ1987년과 2017년…‘이한열 영정 든 사진’ 킴 뉴턴 동행취재
1986년 당시 33세이던 한 미국 사진기자가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한국 관광에 대한 관심이 세계적으로 높아지던 때였다. 처음에는 제주도 관광 사진을 주로 찍었다. 그러다 민주화운동이 격화되면서 외신 기자들의 관심은 학생과 시민들이 “독재 타도”를 외치는 한국의 거리로 옮겨갔다. 그 역시 1987년이 되자 서울의 거리를 누비기 시작했다. 대학생들의 시위가 잦던 서울 연세대학교 앞을 찾은 첫날에는 최루가스를 마시는 바람에 사진을 한 장도 찍지 못했다. “미군 부대 근처로 가서 방독면부터 사 가지고 오라”는 동료 기자들의 조언에 방독면을 사다 쓰고 매일 연세대 앞을 지켰다.
30대에 프리랜서 사진기자로 6월항쟁을 취재한 킴 뉴턴 미국 애리조나대 교수(64·저널리즘) 이야기다. 그가 6월항쟁 30주년에 한국을 다시 찾았다.
지난 9일부터 10일까지 연세대에서 열린 이한열 열사 추모식을 비롯한 6월항쟁 관련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해 사진을 찍은 그를 경향신문이 동행 취재했다. 9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이한열 열사 추모제에서 광장으로 들어오는 이한열 열사의 상여와 삼베를 가르며 살풀이춤을 추는 이애주 전 서울대 교수의 모습이 30년 전처럼 다시 그의 카메라에 담겼다. 그는 30년 만의 한국 방문이 “1987년에 시작한 취재의 연장선상”이라고 말했다.
이한열 열사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쓰러지던 30년 전 6월9일 뉴턴도 연세대 앞에 있었다. 그즈음 사진기자들은 기차가 지나다니는 연세대 정문 앞 굴다리에 올라가 사진을 찍곤 했다. 누가 먼저였는지 몰라도 외신 기자들은 모두 이곳을 ‘연세 해변(Beach)’이라 불렀다. 뉴턴은 “학생들이 정문 쪽으로 몰려나와 전경과 대치하다 최루탄이 터지면 다시 학교 안쪽으로 달려가곤 하는 모습이 마치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가는 모습과 비슷해 그런 이름이 붙은 것 같다”고 회상했다.
외신 기자들도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사건에 크게 놀랐다. 그는 “그해 여름 경찰은 엄청난 숫자의 학생들을 잡아가고 가뒀지만 누가 죽은 적은 없었다. 이건 정말 큰 사건인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이한열 열사 장례식 전날인 7월8일 그는 방패를 든 전경들 앞에 선 두 학생의 사진을 찍었다. 한 사람은 양손에 이한열 열사의 영정을 든 채, 다른 한 사람은 태극기를 매단 깃대를 손에 꼭 쥔 채 필름에 담겼다. 후에 영정을 든 청년은 국회의원(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 태극기를 든 청년은 배우(우현씨)가 됐다.
뉴턴은 지난 10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6·10항쟁 기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만나 이 사진을 선물했다. 아울러 그는 6월항쟁 30년의 소회를 담은 편지도 문 대통령에게 직접 전달했다.
6월항쟁으로 쟁취한 대통령 직선제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이 당선되는 것을 목도한 그는 1988년 한국을 떠났다.
그는 “외신 기자들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특별한 리더라고 생각했다. 그가 대통령이 될 줄 알았다”고 했다. 이후 로이터통신 런던지부, 미국의 트리뷴지 등에서 국제사진에디터를 거치며 20여년 동안 포토 저널리스트로 일했다.
2007년 모교의 교수로 돌아간 그를 다시 한국으로 불러낸 것은 MBC ‘6월항쟁 30주년’ 다큐멘터리 제작팀이었다. 6월항쟁부터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요구 촛불집회까지, 이방인의 눈으로 본 민주화운동 30년의 여정을 조명하자는 것이 제작팀의 기획의도였다.
고등학생 때 베트남전 반대 시위에 참여했고, 사진기자로 활동하면서 전 세계 시위 현장을 경험해본 뉴턴은 “다큐 진행자를 맡아달라”는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여 지난 3월 초 한국에 왔다. 그에게 한국은 완전히 다른 곳이 돼 있었다. 그는 “<스타워즈>의 다스베이더와 같은 복장을 하고 있던 1987년의 경찰들을 생각하면 지금 경찰들은 복장이 ‘세련됐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촛불집회는 시위라기보다 축제의 자리에 가까워 보였습니다.” 탄핵 국면이 한창이던 지난 3월 그는 열흘간 한국에 머물며 낮에는 탄핵반대 태극기집회, 밤에는 탄핵촉구 촛불집회에 나가 사진을 찍었다. 탄핵심판 선고 당일에는 헌법재판소 앞에 있었다. “30년 전 사람들은 거리에 나와 ‘헌법을 바꾸자’고 얘기했고, 이제 30년 동안 그 헌법이 ‘시스템’으로 제대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을 이번 탄핵이 보여줬다”고 뉴턴은 말했다.
당시 한국에 머무르는 동안 서울광장과 광화문, 명동성당 그리고 연세대 등 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곳곳을 다니면서 그는 한국의 지난 30년과 민주주의, 그리고 저널리즘에 대해 얘기했다. 이는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겼지만 그가 진행한 ‘6월항쟁 30주년’ 다큐는 6월10일이 지날 때까지 전파를 타지 못했다. 전국언론노동조합 MBC본부는 MBC 경영진이 다큐의 제작을 중단시켰다고 주장했다.
지난 10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6·10항쟁 기념식 행사에 참석한 한 무리의 고등학생들이 뉴턴 주변에 모여들어 ‘무엇을 하러 한국에 왔는지’를 물었다. 학생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설명한 것을 뉴턴은 이번 한국 방문 최고의 순간으로 꼽았다.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많은 분들이 이후에도 직업을 갖지 못하고 힘든 세월을 보냈다는 것을 우상호 의원에게서도 들었습니다. 1980년대 민주주의를 이 사회에 가져오기 위해 희생한 사람들의 노력이 바로 다음 세대, 이런 학생들을 위해서였다는 것을 오늘 알게 됐어요.”
6월항쟁과 1987년 대선, 그리고 촛불집회와 박 전 대통령 탄핵을 모두 현장에서 지켜본 그는 “저널리스트로서 큰 영광”이라고 말했다. 11일 모든 일정을 마치고 여름 학기 강의를 진행 중인 이탈리아의 한 도시로 날아간 그는 내년 6월 다시 한국을 찾을 계획이다.
<최미랑 기자 ra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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