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박그네정권의 방송통신 장악음모

이제 마음의 빚을 갚아야 할 때

장백산-1 2017. 9. 28. 21:46

이제 마음의 빚을 갚아야 할 때

김빛이라 입력 2017.09.28. 17:00


사회단체 집회 현장에 취재를 나가면 KBS 기자라고 쫓겨나기 일쑤였고, KBS 로고가 박힌 옷을 입고 있을 땐, 열에 아홉의 시민이 쓴소리를 하며 인터뷰를 거절했다.

“라디오 방송에서 ‘폭도들을 진압했다’는 뉴스를 들었어요. 그러고 나서 홀가분한 마음에 학교를 갔던 기억이 납니다. 참…. 마음의 빚이라도 조금 덜 수 있는 작품이 됐으면 좋겠어요.” 영화 <택시운전사>의 첫 공개를 앞둔 인터뷰, 어렵게 출연을 결정한 계기를 묻는 내게 배우 송강호씨는 이렇게 말했다. 너무 어려서 그때는 잘 알지 못했다고 넘길 수도 있는, 1980년 그날의 아침을 그는 ‘마음의 빚’으로 여기고 살아왔다고 한다. 1년 반 넘게 영화를 담당해오며 수많은 영화인들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잊을 수 없는 답변이었다. 우연히 마주한 비극을 외면하지 않은 시민들, 평범한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이뤄낸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알게 해준 <택시운전사> 송강호. 그는 1000만 관객에게 전한 큰 울림으로 결국 ‘마음의 빚’을 갚았다.

내게도 갚아야 할 빚이 있다. ‘KBS 기자’로 살아온 지 7년차, 공영방송의 추락 시기와 함께해온 시간만으로, 방송의 주인인 시청자들에게 큰 빚을 졌다. 공영방송 KBS는 권력 감시와 견제라는 본연의 임무를 충실히 해내지 못했고, 신뢰도는 추락했다. 제구실을 되찾으려는 시도는 계속됐지만,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히는 횟수가 늘었고, 내부 구성원들은 스스로를 검열했다.

그것만으로도 ‘공범자’였다. 유례없는 장기 파업을 겪던 2012년 봄, 그날의 내 모습을 다큐멘터리 영화 <공범자들>에서 발견했다. 파업 현장 방송국 바닥 구석에 매일 앉아 있던 그 시절의 내가 큰 스크린에 스치듯 지나갔다. 그토록 동경해온 KBS에 갓 입사한 뒤였다. 언론 장악을 막아내려는 선배들의 힘찬 함성, 함께 가자고 외치는 훌륭한 선배들의 이야기가 마냥 든든했고 자랑스러웠다. 마음 한구석엔 어떤 상황에서도 ‘좋은 뉴스’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이 가득 차 있었다. 바꾸면 되고,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순진한 생각을 하던 때였다.

사실상 공영방송의 책무를 제대로 수행하는 ‘KBS’를 경험하지 못한 채 기자로 살았다. 수습기자 시절부터 사회단체 집회 현장에 취재를 나가면 쫓겨나기 일쑤였고, 회사 로고가 박힌 옷을 입고 있을 땐, 열에 아홉의 시민이 쓴소리로 인터뷰를 거절했다. 처음엔 무서웠고 이내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든 표정조차 지을 수 없었던 상황들이 슬플 뿐이었지만, 그래도 선배들이 함께여서 버텼다. ‘좋은 시절도 있었다’고 말하는 선배들에게 취재를 배울 수 있어서 감사했다.

그 선배들이 하나둘 떠났다. 취재가 무엇이고, 열정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던 ‘참기자’ 선배들이 KBS 명함을 놓고 나가기 시작했다. 보도하고자 하는 리포트는 전파를 타지 못했고, 오랫동안 준비한 심층 고발 뉴스는 무기한 방송이 미뤄지기 일쑤였다. “함께하자고 하지 않았느냐”라는 투정 섞인 인사를 건넸지만, 아무도 붙잡을 수 없었다. ‘공영방송’을 되찾으려는 내부의 시도는, 이내 인사 보복으로 돌아왔다. 청와대의 KBS 보도 개입 의혹에 침묵하는 간부들을 비판하는 글을 기고한 정연욱 기자는 돌연 제주도로 발령이 났다. 인사명령 효력정지 가처분 소송을 위해 법원으로 향하던 순간에도 미소를 짓던 선배는, 승소하던 날이 되어서야 눈물을 보였다. 응원해준 선후배들을 하나하나 기억한다면서, 술잔을 기울이다 말고 울먹였다. 조직은 인사 보복을 통해 다른 구성원들에게 무력감과 공포를 안기려 했지만, 선배는 더 이상 자기 검열하는 자들을 양산해내지 않기 위해 굳은 의지로 버텼던 것이다.

ⓒ시사IN 조남진 9월13일 김빛이라 KBS 기자(앞줄 가운데)가 서울 KBS 본관에서 열린 집회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공영방송 자리 찾기 위해 발버둥친 ‘내부자들’

그렇게 ‘버텨온 자’들이 이제 더 이상 포기하지 않기 위해 뛰쳐나왔다. 취재 현장을 떠나, 스튜디오를 떠나, 카메라를 내려놓고 바닥에 함께 모여 앉았다.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지만, 또 그 어느 때보다 밝다. 매일 열리는 집회에서는 지난 시간을 반성하고, 새롭게 바뀔 미래를 논한다.

“왜 내 이름은 없었지?” 이명박 정부 당시, 국정원이 방송 장악을 주도한 ‘블랙리스트’ 문건이 공개된 뒤 열린 집회, 마이크를 잡은 PD들은 너도 나도 슬픈 웃음을 지었다. ‘KBS 라디오 제작자 지방전보 발령을 유도’하라고 적힌 문건이 실제 존재했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한 뒤였다. 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쓴소리를 이어가던 방송과 뉴스 프로그램들이 사실상 해체되어가는 상황, 앞장서서 ‘바른 말’을 했던 이들은 ‘문건’에 이름이 없어 오히려 서운했단다. 이해하기 어려운 전보 명령을 받고 지방으로 가야 했지만, 가만히 있지 않았기에 떳떳했다고 말하는 이들이다.

‘건강한 언론 노동자들은 아직 살아 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지난해 영화 <인천상륙작전>의 홍보성 리포트 제작 지시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징계 처분을 받은 두 기자가 있다. 부당한 징계라는 동료들의 외침, ‘이런 일로 정말 징계가 가능한가’라는 영화계의 눈초리에도 조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송명훈·서영민 두 기자는 징계무효 소송에서 이겼지만, 회사는 항소했고 재판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눈앞에 닥친 리포트 만들기에 매몰돼 있던 내게, 신념과 양심에 따라 취재할 권리가 무엇인지 보여준 선배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취재 현장을 떠나 휴직을 택했다. 부당한 상황에 분노한 대가는 너무도 컸지만, 아이들과 함께하는 아빠의 역할도 마음에 든다며 집회 현장을 찾아 동료들을 응원한다. “KBS는 무얼 하다 이제야 목소리를 내느냐”라고 묻는다면, 공영방송의 자리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발버둥쳐온 ‘내부자들’이 있었다고 말하고 싶다.

“나를 두 번 죽인 건 여러분의 사장이 아니고, 현장에 있던 바로 여러분들이었습니다!” 유경근 4·16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이 광화문 발언대에서 울부짖었다. 더 이상 언론의 피해자를 만들지 말아달라는 외침이었다. 2014년 봄, 뒤늦게 안산 분향소에 찾아가 유가족들 앞에 고개 숙인 KBS 구성원들이 들었던 바로 그 이야기였다. “우리가 바라는 건, 우리가 알아낼 수 없는 걸 취재하고 공부해서, 부디 세상에 알려달라는 것, 그것뿐이었어요.” 눈물과 함께 고개를 끄덕인 그날로부터 벌써 수년이 지났다. 국민의 방송이라는 제자리를 찾는 날을 꿈꾼다. 이제는 빚을 갚아야 한다.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 제공 2014년 5월20일 KBS 새노조 조합원들이 경기 안산 세월호 참사 희생자 정부 합동분향소에서 조문하고 있다.

김빛이라 (KBS 기자) webmaster@sisain.co.kr

싱싱한 뉴스 생생한 분석 시사IN - [ 시사IN 구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