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뜨겁지 않은 불

장백산-1 2023. 4. 9. 00:28

7. 뜨겁지 않은 불

 

모든 언어는 실물 세계 위에 덧붙여진 환영

‘불’이라는 말로 진짜 불 아니라 안 뜨거운 가짜 불에 도달
모든 언어는 自相에는 이르지 못하고 오직 共相만 얻게 돼
대장경 무수한 글자들은 이 세계 드러내려는 부수적인 방편

 

부처님이 들어 올린 꽃은 단지 비유의 언어로서가 아니라 본래 뭐라 말해질 수 없는 그 자체로서 항상 이 세계에 존재하고 있었다.

 

미륵의 후예들이 우리에게 애써 가르쳐주려 했던 비밀스런 의미들 중에 가장 앞자리에 놓일 테지만, 우리가 정말 별것 아닌 듯이 생각하는 것이 있다. 철학에서는 그것 자체를 하나의 신비한 일로 여김에도, 우리에게는 너무 익숙한 것이기에 우리 눈앞에 그 신비의 베일이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먼저 ‘뜨겁지 않은 불’이라는 아리송한 제목으로 잠들어 있는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해 보았다. 또 ‘그것이 뭘까’하는 의문이 조금 더 길게 이어지길 바라기 때문에 잠시 뜸을 들인 후에 그것의 정체를 밝히겠다. 아마도 몇 개의 문장을 읽는 것만으로도 모두 금방 그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현장 스님의 문하에 있던 규기에 따르면, 우리는 ‘타인의 소리[他聲]’를 통해서 그것의 마술적 기능을 익힌다. 만약 이 문구만으로 어떤 것을 떠올렸다면, 그것은 단지 짙은 안개 속에서 희미한 형상을 본 것에 불과하다. 내 안에서, 또 내게 자기의 소리를 들려준 타인 안에서 어떤 마술적 사건이 벌어지는지를 아직 잘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직업상 그것을 가장 생생하게 다룰 수밖에 없는 문학가의 도움을 받으면 좋을 듯하다. 나는 남미의 한 작가의 전집 겉표지에서 이런 경이로운 문구를 발견하였다. “사실 모든 명사는 사물의 요약이다. 우리는 차갑고 날이 서 있으며 상처를 입히고 견고한 데다 번쩍번쩍 빛나고 끝이 뾰족하다고 말하는 대신에 ‘비수(匕首)’라고 발음한다. 또한 태양이 멀어지고 그늘이 짙어진다고 하는 대신 ‘날이 저문다’고 말한다.” 이제는 내가 말하려 했던 것의 정체가 바로 말[言], 즉 언어임을 눈치 챘을 것이다. 규기가 ‘타인의 소리’라고 했던 것은 바로 우리가 말을 처음 배울 때 들었던 누군가의 목소리이고, 보르헤스가 ‘사물의 요약’이라 한 것은 바로 그 목소리가 실행하는 어떤 마술적 기능을 가리킨다.

사실 언어의 마술적 기능에 관해서라면 미륵의 후예들이야말로 진정한 전문가들로, 그들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수많은 용어들이 대부분 그것과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낯선 용어를 모두 알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것들은 단지 우리가 거의 본능적으로 알게 된 어떤 일을 일깨워주는 방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거 언젠가 타인의 목소리를 하나의 ‘말’로 받아들이게 되었을 때, 너무나 다채롭고 어지럽게 변하고 있는 일군의 사물들을 하나의 소리로 단번에 압축해서 표현하는 법을 이미 터득하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저 작가가 ‘사물의 요약’이라 한 것도 실은 우리가 오래전부터 눈치채고 있던 것을 달리 표현한 것이다. 그것은 이런 것이다.

우리는 그것에 가까워지고 멀어짐에 따라 그 형태가 커지거나 작아지기도 하는 수많은 실물들을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지각하였다. 그중 어떤 것들은 뜨겁고 태우는 성질이 있었다. 그것은 거센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나무들 사이에서 맹렬하게 솟구치기도 하고, 하늘의 천둥 번개로부터 섬광처럼 내려치기도 하며, 아궁이 속 땔감들로부터 서서히 일어나기도 한다. 우리는 그것의 수많은 변화무쌍하고 다채로운 형상들이 각기 서로 다르고 그래서 딱 집어 ‘무엇이라 말해질 수 없는[不可說]’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오랫동안 그 뜨거운 실물을 나타낸다고 생각하면서 ‘불’이라고 발음하였고, 그때마다 언어의 마술적 기능을 경험하였다. 말하자면 우리는 ‘불’이라는 말이 뜨거운 진짜 불이 아니라 뜨겁지 않은 가짜 불에 도달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린다. 왜냐하면 입으로 ‘불’이라고 발음할 때마다 그 ‘불’이 진짜로 우리의 입을 뜨겁게 태워버리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가짜 불이 단지 우리 마음[情]이 만들어낸 허구라는 것도 눈치 챘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야 어떻게 아무런 두려움 없이 지겹도록 계속해서 그 ‘불’이라는 말을 쓰면서 살아가겠는가.

미륵의 후예들은 이상의 장황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은 한마디로 나타낸다. “모든 언어는 자상(自相: 사물의 자체상)에 이르지 못하고 오직 공상(共相: 사물의 보편상)만 얻게 된다.” 여기서 ‘공상’이라 한 것이 바로 저 남미의 작가가 ‘사물의 요약’이라 했던 것으로, 우리가 어떤 일군의 실물들에서 발견한 보편상을 뜻한다. 그것은 본래 무엇이라 말해질 수 없는 실물들의 세계 위에 덧붙여진 언어의 환영으로, 어떤 말소리에 봉인된 이후로는 그 말소리를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에 나타나며, 그래서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바로 그것이다. 이와 같은 언어의 환영들은 하늘과 땅, 산과 강 등 온갖 실물들에서도 똑같이 생겨나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우리가 하는 모든 말에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며 집착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본래 없는 것을 집착함으로써 초래되는 비극을 우리는 너무 쉽게 망각한다. 그래서 옛 선현들은 “반야는 반야가 아니라 그 이름이 반야다.” 혹은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라는 문구를 호신용 주문으로 남긴 것은 아닐까. 다만, 그 주문에 쓰인 두 개의 산과 두 개의 물 중 어느 한쪽은 실물(진짜)이고 다른 한쪽은 언어(가짜)라고 생각한다면 훨씬 유용한 주술적 힘을 발휘할 것 같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가장 호소력 있는 언어는 시각적 이미지를 많이 쓰는 것임을 알고 있다. 어떤 이들은 서로만 알아챌 수 있는 손놀림을 바꾸어댐으로써 은밀히 모든 거래를 처리하거나, 어떤 이는 상대방 앞에서 단지 서성거림으로써 말보다 훌륭하게 뭔가를 표현하기도 한다. 불교의 한 전설에, 석가모니가 한 송이 꽃을 들어 보였고 그의 한 제자만이 미소로 화답했다고 한다. 지금 나는 그것을 이렇게 받아들인다. ‘석가모니는 오랫동안 여러 비유를 들어가며 자신의 가르침을 되풀이해온 것처럼, 그때도 영취산에서 막 법회를 열려던 차였다. 한 천신이 석가모니가 자주 깨달음의 비유로 삼았던 꽃을 그 앞에 갖다 놓았다. 그때 문득 어떤 일이 일어났다. 그는 마치 흐릿한 유리창을 통해 본 것이 아니라 오래전 깨달음 속에서 모든 것을 선명하게 보았던 것처럼 그 꽃을 보았다. 그것은 단지 비유의 언어로서가 아니라 본래 뭐라 말해질 수 없는 그 자체로서 항상 이 세계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는 그 경이로운 꽃을 들어 보였다. 그러자 저 뒤쪽에 있던 한 제자가 미소로 화답하였다.’ 나는 내 방 한쪽 벽을 장식하는 저 백여 권에 달하는 ‘대장경’ 속의 저자들도 모두 결국에는 똑같은 자각에 이르렀을 것으로 생각한다. 자신들이 이 세계 위에 덧붙여 놓은 저 무수한 글자들이 사실은 매 순간 무한하게 달리 현현하며 그 자체로 영원히 존재하고 있는 이 세계를 드러내기 위한 부수적 방편에 불과함을 말이다.

백진순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dharmapala@hanmail.net

[1675호 / 2023년 4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