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인드라망으로 얽혀 있어도 각자의 업은 또렷

장백산-1 2025. 4. 22. 08:35

인드라망으로 얽혀 있어도 각자의 업은 또렷

 

삼라만상 얽혀 있는 듯 보이지만 하늘과 땅, 산과 바다 각각 달라
고락에 따른 인과는 누구나 같지만 나타나는 양상 뚜렷이 구별
고락의 인과 공(空)함 알게 되면 즐겁고 괴로운 감정 일어나지 않아  

 

잉불잡난격별성(仍不雜亂隔別成) “어지럽지 아니하여 서로가 뚜렷이 이루어져 있다.”

“너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나의 업(業)이고 나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너의 업이네. 너로 인해 내가 움직이는 것은 나의 업이고 나로 인해 네가 움직이는 것은 너의 업이네.”

시간과 공간(장소, 곳)은 서로서로가 인과(因果)로 연기(緣起)하면서 시간은 삼세(三世-과거‧현재‧미래)로 연결되어 있고, 공간의 장소 역시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으므로 모두가 뒤섞여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각각의 내용 하나하나가 뚜렷하게 분리되어 있다는 뜻이다. 삼라만상(森羅萬象)이 인드라망(網)으로 서로 엉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엄연히 하늘과 땅, 산과 바다, 사람과 동물 등으로 각각이 구별되어 있다.

너무나 당연한 내용이겠지만, 이 게송이 말하고자 하는 낙처(落處)는 일반적인 내용이 아니라, 업(業)에 대한 무궁한 뜻이 내포되어 있으니, 즉, 보고 듣고 생각하는 이에 따라 업식(業識)이 따로 각각 구별되어 있는 것이다. 중생인 사람을 예로 든다면, 각 사람이 지닌 업(業)의 속성은 근본적으로 똑같다. 다 같이 고락(苦樂-좋고 나쁜)이라고 하는 인과(因果)의 업(業)이 같기 때문이다. 누구나 한번 좋으면 한번 나빠지게 되고, 한번 생겨나면 한번 사라지게 되며, 한번 태어나면 한번 죽게 되는 고락(苦樂)의 인과(因果)라는 업의 차원에서는 한 치의 차이가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보면 굳이 이 사람 저 사람 구분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각자의 업이 나타나는 시간과 공간은 업의 인과에 의해 각각이 나타나는 모양이 서로 뚜렷하게 구별된다. 이 사람의 업과 저 사람의 업이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즐거운 업의 시간과 공간을 가지고 있으나, 그 시간과 공간에 같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그의 업에 따라 슬픈 업(業)의 과보를 받고 있으며, 또 어떤 사람은 괴로운 업을 받고 있고, 그 시간에 다른 이는 즐거운 업을 받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엄밀하게 보면, 각자의 고락 업에 따라 인과의 과보를 받고 있으니, 전체적으로 보면 서로서로가 뒤엉켜 영향을 주고받으며 생로병사(生老病死)와 성주괴공(成住壞空)을 거듭하고 있으나, 그 속에서 각자의 고락 업은 뚜렷하게 구분되어 이루어지고 있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특히 가족이 그렇고, 이웃이 그렇고, 사회와 국가가 그리고 온 세계가 그렇다. 나비 한 마리의 날갯짓이 태풍의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나비효과의 법칙이 바로 이를 증명한다. 시간과 공간의 모든 것은 먼지 하나라도 따로 떨어질 수 없는 연결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각자의 업(業)은 남이 대신할 수 없다. 우리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엄청난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부모와 자식은 서로 무한대의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자식의 삶을 보면서 부모의 감정이 달라지고, 자식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부모가 자식을 보고 감정을 일으키는 것은 부모 자신의 업(業)이 작동하는 것이고, 자식 역시 부모에 의해 감정을 일으키는 것 또한 그 자식의 업이 작동하는 것이다. 

경북 영주 비로사에 함께 모셔진 석조아미타여래좌상(왼쪽) 및 석조비로자나불좌상(오른쪽). 통일신라 말기에 조성된 불상으로 보물이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고락의 업에 의해 부모라는 대상이 생기는 것이고, 자식이라는 대상도 인연으로 생겨났을 뿐, 각자가 가지고 있는 업이 부모와 자식이라는 상대 때문에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즐겁고 괴로운 감정의 업이 작동할 때가 되면, 자식으로 인해 생길 수도 있고, 부모로 인해 생길 수도 있다. 만약 몸을 달리하여 다음 세상에 지금의 부모 자식이 아닌 전혀 다른 사람이 가족으로 만난다면, 그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도 똑같이 고락의 업이 작용할 것이다.

일상에 있어 만약, 상대와 시비(是非)가 벌어져서 기분이 몹시 나빠졌다면, 상대 때문에 기분이 나빠졌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의 상식이나, 본래 나의 괴로운 업이 나타날 시간이 되었을 때, 시비의 대상인 상대가 나타나게 되어 기분이 나빠지는 것이 업의 현상이고, 인과에 의한 과보인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과 보살, 아라한, 깨친 조사들은 고락의 인과 업이 공(空)하여 없기에, 기분 좋은 일이나, 기분 나쁜 일, 기분 좋은 사람, 기분 나쁜 사람, 즐거운 일, 괴로운 일 등은 아예 나타나지 않을뿐더러, 설사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고락의 기분과 감정은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신의 업이 크고 욕심 많고 마음이 복잡한 사람은 나타나는 일이나, 만나는 사람이 힘들고 괴로우며 복잡한 인연으로 만나게 될 것이고, 그와 반대로, 바라고 원하는 욕심이 없는 무소유(無所有)적인 업을 가진 사람은, 나타나는 일이나 만나는 사람들마다 선연(善緣)으로 만나게 될 것이다.

설사 남이 보기에 선연(善緣)이 아니게 보일지라도 그것은 그렇게 보는 이들의 업인 것이고, 정작 업(業)이 공(空)한 자신은 주변 상황과 관계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대하게 된다. 따라서 자신의 업은 자신에 의한 자업자득(自業自得)이므로, 어디까지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해결하고 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니, 내가 부처가 되어야 모두가 부처가 되므로, 우선 나의 업부터 멸(滅)해야 할 것이다. 기도, 참선, 보시, 정진은 업(業)을 소멸하는 가장 소중한 도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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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 스님 조계종 총무원장 sansng@hanmail.net

[1774호 / 2025년 4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