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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 끊는다 ... 이 개 친일파 색끼들아 ~~ 출처 : http://www.movierg.com/bbs/board.php?bo_table=topics&wr_id=33315 ▲국사교과서에 실리지 않았던 윤봉길의사 거사직후 모습
한독수교 125주년 기념 100년 전 한국과 독일의 문화 전시 中 '한국사진100년'전시회(주최 : 주한독일대사관)
100년전 오리지날 유리원판 한국과 독일 관련 전시회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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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pyright © koreanphoto.co.kr all right reserved. ▲1907년 돈의문(서대문).1914일본이 강제철거
▲1910년 조선총독부(중앙청)로 가리기 前 근정전의 일장기
▲1941년4월19일 형장으로 끌려가는 조선의용대 포로
▲1941년 3월 전투사항을 교육훈련 받는 독립단원들
▲1943년 일본육군22부대소속 지도단의 백두산 지질조사
▲간도국민회 항일투사를 심문하는 일본군
▲국사 교과서에는 얌전한 사진들만 등재 수록
▲근심어린 조선인위안부
▲끔찍한장난.항일투쟁을하다 처형된 시신에 담배까지 물린 일본군(일 육군 보병 37여단)
▲독립군 습격 받은 후 독립군을 도왔다는 이유로 한 마을을 아예 없애기까지
▲독립군에 정보제공한 조선인 총검처형
▲독립운동 가담에 경각심을 주기위한 독립군가담가 효수(평북선천)
▲독립운동 연루조선인을 강제 노역후 벌목사업이 끝나자 모조리 학살
▲동도독립군서 대원에 대한 보복 작두처형
▲명성황후가 시해된 옥호루(뉴욕해럴드기자)
▲백두산에서 일본육군 조사단의 대동아기원제1943
▲서기 1900년 경회루 전경
▲소속불명의 독립군을 양민앞에서 공개처형
▲안중근의사의사 저격과 일왕으로부터 1등공신인정품위받은 이등박문(1909년)
▲압록강 상류에서 일본육군 트럭이동
▲완공후의 중앙청(조선총독부)
한국에서는 8·15광복 후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의 옛 조선총독부 건물이 주한미군사령부에 의해 군정청으로 사용되면서 처음으로 중앙청(capitol hall)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 건물은 1916년 일제가 식민통치의 위엄을 과시하고자 경복궁 근정전 앞에 세워 총독부 청사로 사용하여 왔다. 정부수립 이후 대통령 집무실을 비롯한 주요 행정부처가 자리를 잡아 중앙행정관청으로서 기능하여, 계속 중앙청으로 불리면서 권부(權府)의 상징처럼 되었다.
제3공화국에 들어서 대통령 집무실을 없애고 중앙행정부서가 종합청사·과천청사 등으로 분산되어 행정부의 중심부라는 뜻에서의 중앙청의 기능은 소멸되어 갔다. 일제 침략의 상징적 건물이기 때문에 주요 정부기관의 집무실로 사용할 수 없다는 여론에 따라 1986년 6월 23개 전시실을 갖춘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개조하여 사용하였다. 1995년 8·15광복 50주년을 맞이하여 철거되었다. 출처 :encyber
▲윤봉길의사.폭탄3개 중 불발탄된 도시락과 업혀가는 일본 총영사
▲일본도로 항일연루 조선양민 학살
▲알림포스터
▲조선양민 학살후 죽음확인하기 위해 다시한번찌르는 장면
▲조선인 위안부의 자해(자살시도)
▲패망 후 조선을 떠나는 일본인들이 미군이 제공한 배에오르는 장면
▲항일독립군 습격후 조선인마을에서 증거인멸 화장
▲항일독립군에게 습격받은 일본분서.이후 조선인마을 인간사냥으로 이어져
▲항일병 가담에 경각심을 주기위한 머리전시(일본 보병37여단)
▲항일의병군 처형 후 동포들에게 머리부분 공개
▲항일투쟁 벌이다 무수히 죽어간 조선인마을 양민학살 후 화장처리
▲광복 후 반세기가 지난 2002년5월17일 국민의정부 들어서야 비로소 대한독립군 무명용사위령탑 제막
▲독립군의 모태가 된 그 이전까지 활약한 의병
▲생포한 독립군을 경각심을 주기위해 동포들 앞에서 처형.독립군은 포로로 인정되지 않고 생포 후 처형하던지 강제노역 후 처형하였다.특히 기념일을 기리는 행사의 일환으로 생포한 독립군이나 체포한 연루자를 집단학살 하였다.
활발한 독립군의 항일투쟁이 잦아진 것은 전투만 벌어지면 곧바로 평북과 함북도와 연해주,만주,서간도,북간도의 조선인에 대한 인간사냥식 마구잡이 학살과 방화 부녀자강간의 보복으로 이어져 조선독립군의 활약은 크게 제약받을 수 밖에 없어 팔로군과 중국국민군,조선광복군으로 흡수되는 양상으로 이어졌다.조선인 양민학살은 독립군의 활동이 왕성했던 1915년~1920 년대에 조만(조선.만주)국경지대에서 만행이 극에 달했을 뿐 아니라 연해주 만주 간도에서도 잔학상이 끊이질 않았다.훈춘사건 때만 보더라도 3 개월에 걸쳐 일본군이 간도에서 학살한 조선인 수만 3만여 명에 이르렀다. 일본군은 3.1운동 다음 해인 1920년 5월 싱징[興京]일대에서 민족의 항일투쟁을 구실로 3개 사단을 출동시켜 조선인 양민을 심문없이 무조건 잡아 일렬로 세워 총살한 후 재차 총검으로 찌르고 이를 다시 불태우는 등 대학살을 저질렀다. 게다가 메이지천황절[明治天皇節]을 앞두고는 항일투쟁과 독립운동을 도왔다는 명목하에 천황절 축하를 명분으로 조선인들을 모으고는 황신내교회 에서 조선인들을 학살하였다.특히 일본군은 일본의 명절을 앞두고 그들 천황에게 충성하는 의미나 기념하는 뜻으로 그 즈음에 미리 잡아들인 애국지사를 기념일날 처형하는 극악무도한 짓을 자행했다. ▶출처: 계간지 '순국'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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