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적 시민민주주의

미네르바와 황우석: 그들을 둘러싼 종교적 대중은 다른가?

장백산-1 2008. 11. 23. 18:46

미네르바와 황우석: 그들을 둘러싼 종교적 대중은 다른가?

2008/11/23 10:33
다른 이의 글을 읽지 않고 비판하지 않는다. 적어도 나는 한 필자의 인식이 가진 지평을 얻을 수 있을 만큼 글을 읽지 않고는 그에 대해 함부로 글을 쓰지 않는다. 그것이 내가 한 편의 글을 쓸 때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연유다. 미네르바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기나긴 그의 글의 절반 이상을 읽었고, 그에 대해 언급한 많은 신문기사들과 블로그의 글들도 읽었다. 나의 스탠스는 미네르바를 치졸한 사기꾼이라 욕하는 이들에게 차갑고, 그를 순교자로 미화하는 언론에 매정하며, 그를 사랑해 마지 않는 대중들에게 살갑고, 그에게 어찌할 줄 몰라 당황하는 명박에게 욕한다.


미네르바의 예측은 그만의 것이 아니다. 이미 많은 재야의 고수들도 비슷한 예측을 내놓고 있었다. 우석훈이 그에 관한 글을 썼다. 바쁜 와중에도 우석훈의 글을 읽는 내게 미네르바의 이야기들이 새롭게 느껴지지 않은 것이 잘못인가? 아니다. 미네르바가 이처럼 굉장해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이야기가 새롭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사용한 낯익고 쉬운 용어들과, 그를 제지하려 했던 정부, 그리고 그가 이용한 다음의 아고라라는 매체의 조합에 있었던 것이다. 그 조합에서 나는 종교성을 읽는 것이다. 우석훈이 명박에게 해댄 말들과 그가 예측한 경제위기에 대해 정부가 칼을 들이댄 적 있는가. 없다. 우석훈을 둘러싼 콘텍스트로부터는 종교적 색채를 읽을 수 없다. 그 차이를 알아야 한다.

나의 이전 글은 미네르바에 대한 비판이 아니었다. 그것은 미네르바를 둘러싼 작금의 현실, 그 현실이 우리에게 던지는 상황인식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미네르바의 등장을 자본이 종교가 된 땅의 예언자의 등장이라고 본 것이고, 미네르바와 같은 종교적 예언자의 등장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은 한 국가의 몰락, 적어도 위기상황임을 말하고 싶었던 것 뿐이다. 그리고 나의 예측이 틀리지 않았음은 나의 블로그에 남기는 댓글들로부터 더더욱 확실해졌다. 그는 이미 예언자다.

최치원은 난랑비서에서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라 하고  근본적으로 유/불/도의 사상을 이미 자체 내에 지니어 모든 생명을 가까이 하면 저절로 감화한다고 했다. 그는 공자를 사구라 칭했고, 부처를 축건태자라 했으며 노자를 주사라 낮추었다. 유불선 삼교의 교주들을 모조리 종교적 용어로 칭하지 않음으로서 이 땅에 흐르던 어떤 종교적 주체성을 명확히 하고자 한 것이다. 아마도 그가 예수를 보았다면 '가난한자'라 불렀을런지 모른다. 그것이 풍류다.

그 풍류가 어느 곳에서 시작되었는지 모르나, 불국사에서 발견된 십자가와 성모 마리아상은 풍류 혹은 신선도의 원류와 원시 기독교가 가진 유사성을 간접적으로 드러내준다. 아마도 그 시작은 신라 지역의 어느 곳이었을 테고, 그 전통은 이후 수입된 불교와 유교 기독교의 정착에 영향을 주고 받으며 여전히 흘러내렸을 테다. 그것이 종교전쟁 없이 각 세계의 종교가 한 땅에서 공존하는 이 땅의 의미다. 이미 이 땅엔 광신화된 기독교보다도 더했을 어떤 종교적 흐름이 있었다. 그것은 합리성의 유교를 제사로 내몰았고, 불교와 기독교를 무속화했다. 삼교의 전래와 그 변천만으로도 풍류가 가진 특성과 강렬함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여전히 살아 있다.

신선도와 풍류를 언제나 긍정적으로 바라보아야할 이유는 없다. 그것이 이 땅에 흐르는 전통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것이 긍정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언제나 득실을 따져 물어 지울 것은 지우고 살릴 것은 되살리면 그 뿐이다. 그리고 내게 풍류의 전통은 이제 언제나 이 땅에서 지우고만 싶은 그런 것이 되어버렸다. 그것도 지난 수년간의 역사 속에서 풍류는 언제나 부정적인 무엇으로만 내게 각인되었다.

사이비 종교들이 판치고 종교가 민중을 현혹하던 시대는 차라리 나았다. 황우석이 등장하고 나서 내겐 그 지독한 풍류의 냄새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 땅의 구세주로 등장한 황우석은 대중들에게 종교적 교주로 자리잡았다. 그를 둘러싼 대중은 여전히 종교적이다. 그것이 내가 그를 교주라 칭하는 이유다. 이명박의 등장도 다르지 않다. 자본을 종교로 삼은 일부 사람들은 그를 자본으로 우리를 구원할 구세주로 모셨다. 그리고 풍류의 힘은 그를 대통령으로 임했다. 촛불도 예외는 아니다. 고등학생들로부터 시작된 이명박에 대한 적개심의 종교가 광우병이라는 소재로 종교적 집회를 연것이며, 결국 그 집회는 갖가지 종교의 향연으로 마무리되었다. 내가 촛불집회에 갔건 아니건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집회엔 종교적 색채가 농후했었다는 것이다. 황우석이나 이명박을 교주로 만든 이들과는 분명 차별되는 민중일테지만 좌던 우던 우리에겐 풍류로부터 흐른 지독한 종교의 냄새가 배어 있다.

미네르바는 다른가. 자본이 종교가 되어, 연봉 몇천의 회사원들까지도 모두가 펀드에 투자해야만 한다는 강박이 자리잡은 땅이다. 심지어는 연봉 천도 되지 않는 대학원생들까지 펀드에 투자하고 돈을 날리는 나라다. 돈이 종교다. 경제에 위기가 찾아오고 있다는 말은 굳이 미네르바의 입을 빌지 않더라도 알만한 이들이라면 다 아는 사실 아니었던가. 펀드에 꿈을 실었다 본전마져 날릴 위기에 처한 개미군단의 좌절감은 미네르바를 통해 표출되었다. 돈이 종교가 된 마당에 미네르바가 구세주 됨은 또한 당연하다. 불치병 환자들의 가족들을 중심으로 뭉쳤던 황우석교의 상황과 많이 다른가? 내 눈에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념이 다르다고 종교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이념은 종교화를 준비하는 괴물이다. 나는 이제 확실히 느낄 수 있다. 미네르바를 둘러싼 대중은 종교를 준비하고 있다. 내가 굳이 미네르바를 싸잡아 비판할 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둘러싼 상황으로부터 국가의 위기를 지적하는 글에 보이는 대중의 반응은 영락없는 광신도의 떼거리다. 아닌가?

나는 이 땅에 흐르는 풍류에 진절난다. 모든 것은 종교적 집단의 힘으로 해결되어야 하고, 그렇게 해결된 사태는 언제나 불완전한 것임을 우리가 분명 역사로 보았음에도 언제나 이 땅에서 무종교인의 시선은 중간자의 것이기에 나는 구토난다.

 

명박의 시대를 미네르바의 뜻으로 종결짓는다 해도 또 다시 그것은 합당한 해결책이 아닐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차분한 건설의 마음이지 노란 토끼 따위의 음모론적 종말론이 아님을 믿기 때문이다. 여전히 내가 미네르바를 까대는 것으로 보이는가? 아니다. 나는 미네르바를 믿고 따르는 당신들에게 역겨워하고 있는 것이다. 대박의 꿈을 안고 가진 돈을 펀드에 투자했다가 쫄닥 망하고 나서 미네르바의 말을 종교적 신조로 삼는 그대들을 꾸짖고 있는 것이다.

 

미네르바는 할 일을 했다. 그대들이 그다지도 소중히 여기는 미네르바의 뜻을 세우기 위해서 그대들이 해야할 것은 미네르바에 대한 추종이 아니요, 다만 끊임없이 스스로를 일깨우고 행동하는 것 뿐이다. 미네르바에 대한 종교를 만드는 것이 아니요, 미네르바로부터 배운 바를 실천하는 것뿐이다.

 

미네르바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이제는 컴퓨터 전원을 내리고 책을 보라고 그대들에게 외치지 않았는가? 예수를 망친 것은 이 땅의 목사들이요, 공자를 왜곡한 것은 조선의 성리학자들이었다. 미네르바에겐 잘못이 없다. 잘못은 미네르바가 가리킨 달은 보지 않고 그의 손가락만 쳐다보는 그대들에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