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정부의 잘한 정책

나두산 목사의 마음을 밝히는 글, 특히 '이명박장로'에게...

장백산-1 2009. 1. 21. 13:07

번호   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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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특별기고' 장로 대통령 1년
 



섬김과 포용은 가장 강력한 리더십
대통령의 고독한 기도에서 희망 읽을 수 있도록 더욱 낮아지는 삶 보여야

기독신문 ekd@kidok.com



'특별기고' 장로 대통령 1년




김일수 교수
(고려대·기윤실 공동대표)


지난해 대선 막바지에 우리들은 미국발 금융위기와 실물경제붕괴 조짐을 감지하지 못했다. 대신 높아진 집값·전세값, 사교육비, 세금폭탄 때문에 언제 살림살이의 주름살이 펴질 수 있을지를 고대하고만 있었다.

그 때 이명박 후보의 경제대통령 이미지는 ‘잃어버린 10년’을 토로하는 보수계층 뿐만 아니라 진보계층에게도 희망의 불꽃으로 다가왔다. 게다가 국토개조를 포괄하는 대운하공약 및 경제성장률 7%,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 10년내 세계 7대 강국진입이라는 이른바 747공약은 10여 년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실종되었던 경제강국의 꿈을 국민들의 가슴에 현실적인 기대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그래서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 대통령후보는 48.7%라는 득표율로 당선될 수 있었다. 짧은 당선인 시기를 지나 올해 2월 25일 역사적인 제17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난 그 다음날 여론조사기관들은 약 84%의 국민지지율을 내놓기까지 했다. 이에 더하여 지난 4월 9일에 실시된 제18대 총선에서 여당은 153석이라는 압도적인 다수를 얻어 국정의 안정기반을 더욱 다지는 계기가 됐다. 거기에 친박연대와 친여무소속까지 합하면 10여년만에 국회는 보수화로 그 정치지형이 확실히 바뀌었다.

이들 역사적인 사건전개의 과정 속에서 대부분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은 지역과 연령을 뛰어넘어서 무엇보다도 장로대통령의 등장에 관심의 초점을 맞추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사실 건국 이래 권좌를 거쳐간 기독교인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김영삼 전대통령도 장로대통령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시대는 독재로, 약체와 무능, 부패로 얼룩져 빛을 제대로 발하지 못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한국교회와 신자들이 복음에 빚진 자로서 느껴온 일종의 죄스러움이며, 역사 앞에 지고 있는 부채감이기도 하다.

이명박 장로는 이미 널리 알려진 자신의 간증처럼 어머니의 잊을 수 없는 기도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덧입어 살아온 사람이다. 서울시장을 거쳐 대통령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기적같은 일들을 체험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의 극적인 인생역전은 미국 대통령당선자 오바마 스토리 만큼이나 흥미롭기까지 하다. 어쨌거나 그는 역경의 고비를 헤치고 나와 드디어 권력의 정상에 섰다. 그는 서울시장 재직시 서울을 하나님께 바친다고 말했다가 타종교인들의 공분을 불러 일으킬 만큼 어느 공인에게서도 찾아보기 힘든 신앙적 자기정체성을 분명히 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과신이었을까? 당선 직후 출범한 정권인수위부터 문제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새 정권의 도덕성, 전문성, 신뢰성에 대한 국민의 기대에 부응할 만한 진정성과 강렬한 인상을 국민들에게 남기지 못했다.
인수위에서 잉태된 문제들이 임기초반으로 이어지면서 강부자내각에 고소영, S라인 등 코드인사 논란까지 불러왔다. 취임사에서 그는 조국선진화, 실용주의 외교노선, 대한민국 정통성수호 의지를 분명히 했지만, 온 백성과 만방을 향해 먼저 하나님을 높이고, 그분 앞에 무릎꿇는 진지한 경외심을 표현하지는 않았다.

정권출범의 긴 행렬을 이끌고 온 것은 속화된 부(富)와 권력에 대한 의지로 가득찬 인간군상들이었지, 결코 우리 주님의 십자가는 아니었다. 정작 섬김의 본이 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행렬의 맨 뒷켠으로 밀려나 있었다. 정권을 인도하는 신은 마치 위장된 복인 물질주의와 절대권력을 지향하는 바알이나 몰록이었지, 진정한 복의 근원인 하나님은 아닌 듯해 보였다.

혹여 그 사이 한국교회와 교회지도자들도 장로대통령을 만들었다는 자만에 취해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한미쇠고기협상타결과 함께 밀어닥친 광우병쇠고기 파동 그리고 이어진 촛불시위가 최절정을 이루었던 지난 6월 경에는 이명박 대통령의 국정지지율이 15.2%까지 하락했다.

8·15를 맞아 이 대통령은 제2의 대한민국 신화창조를 내세우며 분위기 반전을 시도했지만, 이마저도 글로벌 금융위기와 유가급등, 환율급등, 국내 실물경제 악화, 고용불안, 실업증가 등으로 빛이 바랬다. 우리 경제는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한 채 10.24. 코스피 1,000선이 붕괴되면서 증시가 반토막이 났다. 결국 24% 전후로 고착된 국정지지율이 현재 20% 중반에서 30% 안팎을 오르내리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세계경제의 전반적인 침체국면 말고도 문제는 산적해 있다. 꼬이는 북한핵문제, 남북간 대화단절, 친이·친박간 내부갈등과 여야 극한대립으로 인한 정치불안정, 휴화산과도 같은 종교간 갈등 문제는 우리 앞에 닥친 시련들의 몇가지 예시에 불과하다.

장로 대통령 취임 원년, 기독교계의 기대는 높았다. 하지만 불교계가 제기한 종교편향논란으로 민족복음화의 문이 활짝 열리리라는 우리의 기대가 역풍에 시달린 한해였다. 심지어 정부 안에 공직자의 종교적 중립성을 표방한 윤리지침들이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현저하게 제한하고, 기독교에 대한 역차별우려까지 낳게 했다. 공교육의 현장에서 여가시간을 이용한 기독교동아리모임조차 예전처럼 수월하지 않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사실은 한국교회의 신뢰도가 주요 종단 가운데 최하위 수준이라는 점이다. 기윤실이 여론조사기관에 의뢰한 ‘2008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조사’에 따르면 개신교회를 신뢰한다는 응답자는 18.4%에 그쳐, 가톨릭 35.5%, 불교 31.1%에 비해 너무 저급한 수준이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초라한 자화상이다. 70년대까지 우리 민족의 소망이었던 기독교신앙이 오늘날 이처럼 세상사람들의 염증의 대상으로까지 전락한 것은 전적으로 한국교회와 우리들의 책임이다. 그리스도의 종의 도(道) 대신에 물신주의와 성공주의에 함몰되어, 권력층과 지배계층에 경도된 종교로서의 인상을 심어 왔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위에 선포되고 확장되어 갈 수 있도록 신자들의 삶을 각성시키고 훈련시키는데 게을렀던 것도 그 원인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신자들을 닫힌 교회 속에 가두어놓고, 세상에서는 무례한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도록 부추긴 적은 없었던가? 이 세상이 십자가를 통해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도록 촉진하고 변혁시켜야 할 소명의식을 성도들에게 충분히 고취시켰는가?

이제 우리는 이 역사적 현실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응전해 나가야 할 것인가? 과연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가 우리의 소중한 전부였을까?

한국교회가 지금 고백할 수 있는 대목은, 경제대통령을 낳게 한 경제타령이 실로 우리 자신들의 지나친 탐욕의 노래였다는 사실이다. 이 탐욕의 자기속임수를 우리는 반성적으로 돌아보기는 커녕, 계속 남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이것이 아고라에서 넘쳐 흐르는 비방과 헐뜯기의 변주곡이다.

자족하는 살림살이 경제를 넘어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각자 대박을 꿈꾸어 왔던 것은 아닐까? 경제적 풍요의 시기에 우리는 세상의 가난한 이웃에게 다가가 천국에 보화를 쌓기보다 쾌락을 좇으며 타락으로 치닫지 않았는가? 분명한 점은 그 사이 우리 삶에 진정 소중한 것들을 빼앗기면서도 민감하게 깨어 있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결혼, 가정, 생명, 환경, 더불어 사는 평화, 나눔과 기쁨 등과 같은 공동체적 가치들이다. 그 상실과 망각의 늪에서 우리가 추구하던 성장과 자유는 절대적인 우상이 되어 버렸다.

탐욕은 위장된 성공주의 그늘 아래 부와 권력의 크기만큼 자리를 넓혀갔다. 개인주의와 권리욕구들도 소수자들의 돌격나팔로 이데올로기화했다.

이제 집권 2년째를 맞는다. 장로 대통령 먼저 진정한 섬김의 리더십을 삶으로 보여 주었으면 한다. 국정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리더의 정직과 낮아짐 속에서 자라기에 말이다. 고독한 기도 속에서 언제나 하나님의 음성 먼저 듣기를 바란다. 그리고 민심을 읽는 지혜, 민심을 따를 용기, 민심을 바로 섬길 겸손을 간구했으면 한다.

더 나아가 그 위에 통합의 리더십을 발휘했으면 좋겠다. 편가르기와 단절, 배제를 버리고, 다른 생각, 다른 입장, 다른 체제의 사람들과도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포용의 정치를 펴 주었으면 참 좋겠다.

세계적인 불안의 징조들은 이 땅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일 수도 있고, 회복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옷자락일 수도 있다.

이 간고의 시기일수록 우리의 믿는 도리를 좇아 더욱 신앙의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애굽으로도, 바벨론으로도 말고,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두신 정로를 따라 걸어갔으면 좋겠다. 그때는 우리의 답답한 현실이 곧 우리들 희망의 텃밭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