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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를 지배하는 4가지 힘---중력(重力)

장백산-1 2010. 4. 2. 11:48

 우주를 지배하는 네 가지 힘<3ㆍ끝>중력(重力)  ☞요즘은 
2008/07/19 17:01

 http://blog.naver.com/lucas0213/40053188285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정신’이나 ‘마음’이란 엄연히 존재한다. 내가 기뻐하고 슬퍼하는 것은 모두 정신이나 마음이 하는 것이고 행동하기 전에 어떠한 행동을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도 대부분 정신이나 마음에서 비롯된다. 정신과 같은 영적인 세계는 확실히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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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물질과의 관계다. 닭이 먼저일까 알이 먼저일까라는 물음처럼 애매하다. 때문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가 지금까지 쌓아온 철학역사에서 그 둘의 관계는 언제나 근본적이면서도 중요한 고민거리였다. 중국에서 건너와 조선시대 큰 사상을 이룬 성리학(性理學)의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과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대립이 바로 그 것과 관련된 것이었고 서양의 ‘유물관(唯物論)’과 ‘관념론(觀念論)’의 대립도 바로 그것과 관련된 싸움이었다. 다시 말해 정신이 먼저냐 아니면 물질이 먼저냐의 문제 말이다.

 

사실 이 물음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그 해답을 인간이 쥐고 있지는 않다고 본다. 왜냐면 앞서 말했듯이 인간에겐 엄연히 정신세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인간에 한해서만은 물질과 정신 가운데 어느 게 먼저인지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최초의 인간인 ‘인간1호’는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우리의 모습을 보면 분명 인간의 탄생은 정신이 먼저다. 인간이 탄생하려면 남녀 간의 섹스를 원하는 어떤 정신상태가 존재하고 그것이 행동으로 옮겨져 구체화됐을 때 아기가 탄생하기 때문이다. 종족유지 외에도 인간의 삶을 들여다보면 인간의 모든 행동은 정신이 먼저인 경우가 많다. 정신에 이상이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기 마음대로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에 한해서 만이다.

 

따라서 정신과 물질의 중요도와 우선순위에 관한 물음은 결국 사물(事物)이 쥐고 있다. 그리고 그 핵심은 바로 무생물이라고 불리는 그러한 사물들에게도 정신세계가 있을까라는 문제다. 아니, 좀 더 눈높이를 높인다면 우리가 늘 접하는 나무 같은 식물에게도 정신세계가 있을까라고 고민해볼 수 있다. 

 

 

 


인간이나 동물처럼 자유로운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식물이나 사물들에게도 과연 정신세계가 있을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에게는 뇌가 없기 때문에 ‘정신세계가 없다’고 생각할 것 같다. 하지만 있다 없다를 떠나 식물이나 사물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는 이상은 누구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그것이 왜 그런고 하니 정신세계에도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맨 정신일 때와 수면 중일 때의 정신상태가 틀리듯이 식물이나 사물의 정신세계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그 무엇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보고 생각하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혹은 고통을 느끼는 등의 우리 인간들의 정신세계와는 달리 그러한 식물이나 사물들에게는 비록 인간처럼 변화무쌍하고 예민한 것은 아니지만 아주 더디고 느린, 전혀 다른 형태의 그 어떤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정신세계’라는 말이 껄끄럽다면 그냥 영적인 세계라고 부르자. 모든 사물들에 다 영혼이 들어가 있다는 원시시대 토템신앙처럼 말이다.

 

뭐라고 부르든 내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이미 여러 차례 이야기한 적이 있듯이 미시세계의 전자(電子) 때문이다. 수없이 많은 점이 모여 선이나 면을 이루듯이 이 우주상의 모든 물질들도 결국은 쪼개고 쪼개면 그 물질을 이루는 최소단위가 존재할 것인데 그것이 앞서 인력을 설명할 때 언급한 원자를 구성하는 ‘양성자’와 ‘중성자’, ‘전자’이다. 물론 최근에는 중력이 지배하는 거시세계와 전자기력이 지배하는 미시세계 사이의 이론적인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우주의 최소단위가 이들보다 더 작고 끊임없이 진동하는 아주 가느다란 끈 모양으로 이뤄져 있다는 ‘초끈이론(super-string theory)’이 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불완전해 아직은 하나의 이론에 불과하다.

 

하지만 우주를 구성하는 최소단위가 둥근 모양의 양성자와 중성자 또는 전자든, 아니면 그 보다 더 작은 초끈으로 이뤄져 있든 식물이나 사물에 존재할 지도 모르는 영적인 세계와 관련해 내가 하고자 얘기는 공통적이다. 바로 우주를 구성하는 물질의 최소단위는 끊임없이 움직인다는 것. 다시 말해 거시세계에서는 전혀 움직임이 없는 딱딱한 사물이지만 미시세계에서는 살아서 움직인다는 얘기다.

 

 

 

                                       '초끈이론'에서 초끈의 두 가지 가상모형

 


우주를 구성하는 최소단위가 양자역학에서 주장하는 원자핵(양성자,중성자)과 전자라고 봤을 때는 전자(電子)가 불확정의 원리에 따라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고, 초끈이론에서도 끊임없이 진동하는 초끈들의 유형에 따라 입자마다 고유한 성질이 생겨 현재의 거시세계 모습을 형성하고 있다고 하니 두 이론 모두 결국 미시세계로 들어가면 모든 물질들은 다 ‘살아’ 움직인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전자(電子)의 움직임은 불확정적이어서 예측할 수가 없고, 초끈 역시 시간의 변화에 따라 어떤 특이성을 가지는지 전혀 예측할 수가 없다고 하니 거시세계에서 각종 물리학의 법칙과 명확한 인과관계(因果關係)에 따라 정해지는 사물들의 움직임과는 확연히 달라 이들이 ‘살아있다’고 해도 그다지 어색하지는 않을 듯싶다. 쉽게 말해 미시세계에서 그들은 마치 ‘자유의지(自由意志)’가 있는 것처럼 제멋대로 움직인다.

 

그렇다면 이 우주를 구성하는 최소단위들이 이렇게 자유의지가 있는 것처럼 살아 움직인다고 가정했을 때 거시세계에서 뇌가 있는 인간이나 동물들과 그것이 없는 사물들의 차이점은 무얼까. 그 대답은 간단하다. 말 그대로 뇌가 있고 없고의 차이뿐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내 생각은 그렇다. 인간의 뇌라는 것도 분명 우주를 구성하는 최소단위들로 이뤄진 집합체인데 인간이 가진 뇌는 미시세계에서 자유의지를 가진 전자나 초끈들이 더 많이 뭉치고 또 더 활발하게 움직이는 공간이 아닐까. 다시 말해 태초에 우주의 전진력(前進力과)과 인력(引力)에 의해 진화를 거듭하면서 인간의 신체를 구성하는 각종 기관들이 분화되는 과정에서 뇌는 전자나 초끈의 움직임이 특히 활발한 원자들이 모여 구성된 인체기관일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그로 인해 거시세계에서 인간에게는 ‘자유의지(自由意志)’란 것이 생겼고 그것이 곧 지금 인간의 영혼을 형성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사실 인간의 정신세계와 미시세계 전자나 초끈의 움직임은 닮았지 않았는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어 전혀 측정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하고자 하는 얘기는 거시세계에서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식물이나 생명이 없다고 여기는 사물들도 진화하는 과정에서 결합 형태나 어떤 구조적이 차이 때문에 지금 우리 인간들과는 많이 달라 보일 뿐이지 그들에게도 정신세계, 즉 영혼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얘기할 중력(重力)은 바로 우주 만물이 갖고 있는 그러한 영혼과 관계가 깊다.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의 원리

 


온통 하얀색으로 도배된 아주 넓고 텅 빈 방안에 내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 곳에는 지금 아무 것도 없다. 오로지 흰색으로 도배된 텅 빈 공간과 나 혼자밖에 없다. 그럴 경우 다소 외롭고 지루하겠지만 그 상태에서 난 아주 자유로울 것이다. 정신세계의 지배를 받는 육체의 움직임은 내 생각대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된다.

 

그런데 갑자기 방안 구석에 작은 상자가 하나 생겼다고 상상해보자. 그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 때부터 내 행동은 약간의 제약을 받게 된다. 일단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공간에 갑자기 생긴 상자에 대해 호기심이 생길 것이다. 지루하기만 했던 순간들이 그 상자에 대한 호기심으로 바뀌면서 난 결국 상자에 다가가서 그것을 열어보려 할 것이다. 이러한 행동을 과연 어떻게 볼 것인가 따져보면 내가 가진 영혼의 자유의지에 의한 행동이라 할 수 있겠지만 엄밀히 말하면 난 갑자기 생겨난 그 상자에게 이끌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나는 그 상자에게 유인 당했고 그로 인해 내 자유의지를 빼앗겨버린 것이다. 물론 구석에 놓인 그 상자에게 안 갈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이란 의지를 발휘해 자신의 행동을 제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행동은 그렇게 취할 수가 있더라도 내 정신세계는 그렇지 못할 것이다. 다시 말해 마음속으로 나는 계속 그 상자를 인식하고 생각할 것이다. 안에 위험한 무언가가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면 경계를 하면서 상자를 인식하게 될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나는 혼자뿐이었던 방안에 갑자가 나타난 그 상자의 존재를 인식하면서 내 영혼의 한 쪽 구석에 그것이 자리 잡게 될 것이다.

 

갑자기 나타난 존재가 상자가 아닌 같은 사람이라면 그 증세는 더 심해진다. 만약 남자가 아닌 여자라면 더더욱 심해지는데 그녀의 존재가 내 정신세계, 즉 영혼에 자리 잡는 영역은 앞서 말한 상자보다는 훨씬 더 커질 것이다. 쑥스러워 말을 붙이지 못하더라도 나는 온통 그녀를 생각하며 그녀의 눈치를 살피면서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비슷한 영혼의 모습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이리라. 

 

 

 

중력(重力)의 실체에 대해서는 현대 과학에서도 아직 명확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다. 앞서 ‘인력’을 설명할 때 말했듯이 과거에는 그것을 '만류인력'과 동일하게 봤다. 즉, 이 지구 중심에서 물질을 끌어당기는 힘. 나아가 질량을 가진 모든 물질들에게 존재하는 인력의 일종을 중력으로 봤던 것이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이 등장해 절대시간과 절대공간에 대한 개념이 깨지면서 그것은 기하학적인 우주의 시공간 연속체를 휘게 만드는 어떤 힘으로 인식이 바뀌게 됐다. 그래서 아인슈타인 등장하면서 중력에 대한 실체규명은 더욱 어려워졌다.

 

그냥 중심으로 끌어당기는 힘이라고 생각했을 때는 ‘아! 원래 질량을 가진 물질들에게는 그런 힘이 있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었지만 그것이 시공간을 휘게 만들어 주변물질을 끌어당기게 된다는 아인슈타인의 주장이 대두되면서 그 힘에 대한 입증자체가 힘들어진 것이다. 왜냐면 시공간 연속체를 인간의 눈으로는 도무지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현재 실제로 사용하고 있는 GPS 등을 보면 - 우주에 떠있는 인공위성은 지구 표면보다 시간이 더 빨리 간다. 그래서 인공위성을 통해 운전자의 위치를 알려주는 내비게이션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통해 시간을 보정해주지 않으면 운전자는 잘못된 정보를 받게 된다 - 분명 우주 공간에서 시간은 똑같은 속도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어떻든 간에 현대 과학으로는 중력의 실체를 밝히기가 힘든 이상 비록 미덥지는 못하더라도 중력이 과연 어떤 힘인지 우리는 철학적으로 접근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중력(重力)의 실체를 말 그대로 무게감, 즉 '존재의 힘'이라고 말하고 싶다.

 

 

 


우주만물은 그 존재 자체로 힘을 갖고 있다. 굳이 물리학의 지식을 차용한다면 ‘위치에너지(potential energy)’라는 것과 같다고 보면 된다. 위치에너지를 산출하는 복잡한 공식이 존재하지만 별로 알고 싶지 않고 다만 그것은 ‘potential(잠재적인)’이란 영어단어의 뜻처럼 어떤 위치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언젠가 발휘되는 힘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잠재하고 있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힘이다. 즉,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존재의 힘'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잠재적인 에너지라는 뜻처럼 위치에너지는 혼자 있을 때는 그것이 잘 드러나지가 않는다는 점이다. 위치에너지는 다른 어떤 물체와 충돌을 하거나 충돌은 하지 않더라도 다른 물체와 비교될 때만이 실체를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바닥이 없는 우주공간에 바위덩어리 하나가 떠 있다고 하자. 분명히 바위덩어리는 그 자체로서 존재감을 주지만 그냥 텅 빈 우주 공간에 떠 있을 때는 어떠한 힘도 드러낼 수가 없다. 심지어 위압감조차도 주지 않는다. 그냥 떠 있는 것뿐이다. 하지만 그 바위덩어리가 지구 표면의 거대한 크레인에 매달려 있다고 상상해보면 얘기는 달라진다.

 

바닥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지구 표면에서 그것은 그 존재감 자체가 엄청난 위압감을 주게 되고 크레인 밑에 있는 사람이나 물건들에게 언젠가 큰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존재감이란 이처럼 복수의 물질들 사이에서 쉽게 드러난다. 사람이 혼자 있을 때 괜히 힘이 빠지는 것도 이 같은 논리다.

 

자. 그럼 이제 앞서 예를 들었던 텅 빈 하얀 방으로 다시 들어가 보자. 처음 텅 빈 방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내가 들어감으로써 나란 존재가 생기게 됐다. 하지만 아무도 내 존재를 인식해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나는 당분간 외로움과 지루함 속에서 시간을 보내야만 한다. 당연히 힘도 빠질 것이다. 어떤 수를 써도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상황이라면 아마 난 모든 의욕을 잃은 채 그냥 드러누워 천정만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와 같은 한 사람이 그 방에 들어왔다고 생각해보자. 아마 그런 일이 갑자기 생긴다면 난 우선 방에 새로 들어온 그의 존재부터 인지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눈치를 살피든 아니면 바로 말을 걸든 그와 나는 일정한 교감이 생기게 된다. 그로 인해 그와 나는 어느 정도의 시간을 흘러 보낸 후 곧 친구가 될 것이다. 서로를 경계하다 나중에 적이 되어 싸울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내가 그를 인지하는 순간부터 나는 교감을 느끼게 될 것이고 더 이상 자유롭지도 못할 것이다. 다시 말해 행동의 제약을 받게 된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나와 같은 사람 한 명이 그냥 들어온 것뿐이고 그는 내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왜 나는 행동의 제약을 받게 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둘 사이에 ‘교감(交感)’이 형성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교감이 바로 중력이 발휘되고 있는 상태, 즉 중력장(重力場:중력이 영향을 미치는 공간)이 형성된 상태라고 본다.

 

그렇다면 이제 중력에 대해 정의(定義)내리겠다. 나는 중력을 존재에 당연히 뒤따르는 ‘잠재적인 힘’으로 본다. 그것은 복수의 물질들 사이에서 인식을 통해 생겨나고 이어지는 교감을 통해 서로 끌어당기게 되는 힘이라고 감히 말하겠다. 물론 이러한 나의 주장이 설득력을 조금이라도 얻으려면 해결해야할 문제가 하나 있다. 

 

 

 


위의 하얀 방의 예에서 어떤 이는 만약 내가 정신이 없는, 소위 말하는 정신병자라면 새로 누가 들어오든 신경 쓰지 않고 혼자 있을 때와 똑같이 자유롭게 행동할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내가 중력을 정신세계, 즉 영혼과 관계가 깊다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해 중력은 상호 간에 영혼의 교감이 형성될 수 있을 때만 작용된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거시세계에서 인간들에 의해 무생물이라고 불리는 사물은? 그들 사이에 작용하는 중력은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해결해야할 문제는 바로 이것인데 그것을 위해 앞서 장황하게 사물에도 정신세계, 즉 영혼이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비록 그것이 인간처럼 아주 예민하고 발달된 영혼의 상태는 아니지만 그들 역시 자신을 구성하는 최소단위인 전자나 초끈의 움직임에 의해 인간과는 종류가 전혀 다른 영혼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영혼은 너무 단순해 인간의 영혼이 자유의지로 진화한 반면, 그들은 우주의 탄생과 동시에 생긴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인력(引力)단계에만 머물러 상호 간에 존재를 인식한 후 서로 끌어당기는 수준에만 머물러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인간은 가끔 중력을 거부할 수 있지만 사물들은 그렇지 못하다. 실제로 이 지구상에서 지구의 중력을 거부하고 지구를 벗어날 수 있는 존재는 인간밖에 없다. 인간을 제외한 지구상의 모든 물질들은 영혼은 있되 인간과 같은 자유의지는 없어 늘 지구의 중력장(교감)을 벗어나지 못한 채 지구에 붙어있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고독하다. 혼자 있을 때는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중력(重力)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끊임없이 남들에게 인정받으려고 한다. 자신에게 잠재된 중력(존재․위치)에너지를 행복에너지로 전환하기 위해.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의 경지란 과연 어떤 것일까라고 생각해본 적이 많았답니다. 붓다(석가모니)가 이른 해탈은 과연 어떤 경지일까 왠지 궁금하잖아요. 그런데 나름 우주와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들에 대해 상상력을 동원해 스스로 답을 찾으려고 노력하면서 붓다가 이른 해탈의 경지가 어떤 것인지 왠지 조금 알 것도 같습니다.

물론 법정스님 같은 분들이 들으시면 웃으시겠지만 그래도 내 수준에서 그것을 표현한다면 인간이란 존재도 우주를 구성하는 물질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것. 다시 말해 붓다가 깨달은 해탈의 경지란 바로 인간은 우주상에서 특별한 존재일수가 없다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자유의지 때문에 인간은 지금까지 큰 오만과 착각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자유의지가 들어가 있는 마음이란 우주 끝까지도 닿을 수 있어서 우주를 인식하고 생각하는 인간의 지적능력은 바로 신(神)과 같은 지위를 부여해줬죠. 실제로 인간은 그것을 이용해 오랜 역사에서 창의력을 참 많이 발휘했죠. 종족번식 외에 무언가를 새롭게 탄생시키는 창의력. 그건 사실 신(神)만이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인간들은 그러한 능력을 갖게 됨으로써 스스로가 특별하다는 착각에 빠지게 됐죠. 그리고 자유의지가 배설한 그러한 특별하다는 착각은 인간과 인간, 또 인간과 우주만물을 단절시키게 만들었고 그로 인해 인간은 욕심과 집착이라는 큰 고통의 원인을 안고 살아가게 됐습니다. 나는 남과 다르고 나를 둘러싼 우주만물과도 다르기 때문에 철저히 이기적인 존재로 타락하게 된 것이죠. 그것이 바로 수많은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었고 천국 같은 지구의 환경을 오염시킨 근본적인 원인이었습니다. 또 개개인에게는 항상 불만족과 그로 인한 시기와 질투심을 생산하면서 가까이 있는 행복조차 잊게 만들었던 것이죠.

 

그래서 붓다는 인간의 모든 고통은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했고 세상 모든 희노애락(喜怒哀樂)은 다 마음의 장난일 뿐이므로 욕심이나 집착을 벗어던지고 우주만물과 하나라는 것을 스스로 깨닫는다면 누구나 해탈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설파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 중에 과연 누가 우주의 전진력을 거부할 수가 있죠? 또 우리 중에 누가 우주의 인력과 척력을 거부할 수 있을까요? 중력은 또 어떻고요. 인간은 이들 네 가지 힘을 절대 거부할 수 없습니다. 전진력 때문에 인간은 지금도 진화하고 또 늙어서 언젠가 죽는 것이고, 인력 때문에 사랑하고 척력 때문에 이별을 하죠. 또 중력 때문에 인간은 늘 고독할 수밖에 없답니다. 왜냐면 인간도 우주를 구성하는 물질가운데 하나일 뿐이니까요.

 

삶을 좀 더 편하게 살고 싶으세요? 그러려면 마음이 편해야 진짜 편해지겠죠? 주제넘지만 한 가지 조언을 해드리겠습니다. 저도 잘 되지는 않지만 행복이 왔을 때는 자유의지를 가진 축복받은 인간으로써 그것을 충분히 즐기고, 고통이 다가왔을 때는 자신도 우주만물을 구성하는 하나의 물질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생각해봅니다. 바로 ‘그러려니’ 하는 거죠.(저의 똘끼 다분한 글들도 ‘그려려니’ 해주셈^^)

 

이상으로 여름특집으로 마련해본 <우주를 지배하는 네 가지 힘>시리즈를 모두 마치겠습니다. 아주 황당하고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평소 우주에 관심이 많았던 한 사람으로써 이 글은 언젠가 꼭 쓰고 싶었던 내용들이었답니다. 포스트에 등장하는 각종 과학지식들은 모두 네이버 지식검색을 통해 공부한 것들이고 - 잘못 이해한 부분도 있을 수 있음 - 사진 역시 네이버 이미지 검색란을 뒤지고 뒤져서 퍼온 것들입니다. 모쪼록 복잡하기만 하고 재미없는 글,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