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설(輪廻說)이 가르쳐 주는 참 뜻
이 우주 속 삼라만상(森羅萬象)은 윤회(輪廻: 成 住 壞 空)를 합니다. 생성(生成)과 소멸(消滅)이라는 자연의 법칙에 따라서
봄이 되면 새싹이 돋아나고, 여름에는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가을이면 꽃이 지고 익은 열매나 씨앗이 떨어지고, 겨울이면
시들고 말라 죽은 것 같이 보이는 풀들도, 잎, 줄기, 뿌리 등은 말라서 죽어도, 실상 씨앗 속에는 영원(永遠)히 죽지 않는
생명(生命)이 때를기다려, 다른 장소에서 지난해와 같은 종류(種類)로 새싹이 돋습니다.
수십억(數拾億) 인류의 모든 사람들이 제각기 다른 모습이듯, 존재(存在)하고 있는 모든 것의 외면(外面)적인 형태(形態)는, 때와 장소와 여건과 환경 등에 따라서 전부가 다른 모습입니다. 이 세상에 외형상(外形上) 똑같은 사람과, 똑같은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도 없습니다. 단지 그들을 지탱하고 있는 생명(生命), 그 자체만이 지난 해나 다음 해나, 억겁(億劫)을 통해 또
삼계(三界)를 통해 같은 것입니다.
인간의 돌고 도는 생명(生命), 그 본연(本然)만은 역시 조금도 다를 바 없습니다. 인간 또한 육체의 모든 기능(機能)이
정지(停止)해도, 즉 죽음에 이르러서도 "마음" 이라는 영적생명(靈的生命)은 다시 때를 기다려, 다른 환경, 다른 장소에서,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태어나서 생활한다고 성인(聖人)들께서 말씀 하셨습니다.
백천만겁(劫) 영원히 사는 우리의 생명(生命)은 수없이 많은 횟수(回數)에 거쳐 태어났다가, 때가 되면 죽고, 다시 다른 육체(肉體)로 돌고 돌아 살아오고 있는지 모릅니다. 현생(現生)의 인류(人類)가 생겨나기 억만겁(劫)전부터, 지금의 현재와, 미래의 앞으로도, 끝없이 모습을 바꾸면서 살아가는 생명(生命), 그 생명이 윤회(輪廻)를 거듭 하면서 겪는 생활은 또한 얼마나
다양(多樣)하고 흥미롭겠습니까?
어머니의 품속에서 천진난만(天眞爛漫)한 모습으로 시작하여, 청(靑), 장(長), 노년(老年)을 거치고 그러다 육체(肉體)라는 옷을 벗습니다. 다시 다른 사람으로 태어나고, 다른 가족(家族)을 만나고, 다른 사랑을 하고, 새로운 학습(學習)과 경험(經驗)을 하면서, 끝없이 살아가는 생명(生命)입니다. 단지 진리(眞理)를 알지 못함으로 인하여, "이 몸 하나가 전부(全部)"이고
"지금의 한 평생(平生)이 전부(全部)"라는, 절박(切迫)한 집착(執着)과 욕심(慾心)에 허둥대는 우리의 삶이 실로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억지를 부린다고 오래 살고, 않고가 되는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혹 신선(神仙)이 된다고 할 지라도 어린 시절의 천진난만(天眞爛漫)으로 돌아가거나, 젊은 시절의 사랑 등을 다시 해 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윤회(輪廻)를 하면서 인간은 어린 시절도 다시 맞이하고, 온갖 나라에 두루 태어나 보기도 합니다.
남자로 혹은 여자로, 흑인(黑人)으로 혹은 백인(白人)으로, 동양인(東洋人) 혹은 서양인(西洋人), 미국(美國), 일본(日本) 등,
인연(因緣)따라 태어나지 않을 곳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결국은 하나뿐인 우주생명(生命)이 언젠가 한번은 한 가족(家族)이
되는 것입니다. 모두가 과거(過去)의 내 부모(父母), 내 형제(兄弟), 내 부부(夫婦)요, 이웃이요, 미래(未來)의 또 그러한 상대들인 것입니다. 이러한 상대들과 다툼이나 전쟁(戰爭) 따위를 해서야 되겠습니까!
지금의 부모(父母), 형제(兄弟), 부부(夫婦)도 시간이 지나면 과거의 부모, 형제, 부부가 됩니다. 자신보다 못하고, 자신과는
다른 모습, 다른 여건(與件), 다른 환경(環境)이라고, 차별(差別)하고, 멸시하고, 짓밟을 수 있겠습니까? 언제 또 자신의 생명(生命)이, 자신이 억눌렀던 생명(生命)의 위치에 태어나서 고통(苦痛)을 당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모든 생명(生命)이 남이 아님을 명심하십시오.
모두가 자신의 혈육(血肉)입니다. 자신의 가족(家族)이 병(病)들고, 헐벗고, 굶주리며, 어려운 고통(苦痛) 속에 있는데, 자신만이 행복하고 마음 편할 수 있겠습니까? 손에 아주 작은 가시가 하나 박혀 있어도, 눈 안에 미세한 티끌 한점들어가도 아주 불편해 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한쪽 눈이 아픈데 "아프든지 말든지" 하는 식으로, 손이나 발, 의식(意識)등이 아픈 눈에 전혀 영향받지 않고, 어떤 일인가를 즐겁게 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몸이나 생각 등을 총동원(總動員)하여 아픈 눈을 치료(治療)하고 나서야, 몸의 다른 장기(臟器)나 의식(意識), 세포(細胞) 등에도 화평(和平)이 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이웃의 생명(生命) 또한 이와 같은 이치(理致)라 하겠습니다. 우리의 이웃에
단 한 사람이라도 가난하고, 병(病)들고, 소외(疎外)된 이가 있다면, 자기 몸의 아픈 눈을 치료(治療)하듯이, 우리의 총력(總力)을 다하여 보살펴야 합니다.
그들이 남이 아니라 바로 자신과 한 생명인 것입니다. 이 우주(宇宙)에 단 한 사람이라도 고통(苦痛)받는 이가 있으면, 아무도 진실로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든 경쟁(競爭)과 투쟁(鬪爭)에서, 상대를 억압(抑壓)하고 짓눌러 이겼을 때의 가치(價値)와 의미(意味)를 존중해 왔습니다만, 기실 상대를 이긴다 함은 자신이 지는 지름길이요, 상대를 억누른다 함은 자신이 억눌림을 당하는 원인(原因)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이러한 사고방식(思考方式)과 가치관(價値觀)이 참으로 옳은 것이었다면, 인류(人類)는 지금 모두가 행복(幸福)과 안녕(安寧)속에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기(利己)와 집착(執着)으로 점철(點綴)된, 인위적(人爲的)이고도 의도적(意圖的)인 경쟁(競爭)이나 투쟁(鬪爭)은 실로 모두가 다 죽는 지름길일 뿐입니다.
"상대를 살려야 자신이 산다"는 지극(至極)히 단순한 진리(眞理)를 한번 더 음미(吟味)해 봄직 합니다. 왜냐하면
이 우주(宇宙) 속의 모든 생명체(生命體)는 서로 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들 표현하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이니
"먹이사슬"이니 하는 말들도, 기실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현상(現象)으로서 생기는 것입니다.
현상(現象)의 작용(作用)만으로 의미(意味) 짓고, 판단(判斷)하는 연고로,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잡아 먹고, 또 잡혀 먹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 속의 죽이고, 살리고 하는 현상(現象)을 떠난 본질(本質)을 살펴야 됩니다. 인간도 그 현상(現象)의 작용(作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에, 이론(異論)이나 이설(異說)이 있겠습니까? 때로는 선의(善意)의 경쟁(競爭)이라는 것이 의욕(意慾)을 고취(鼓吹)시키는 역할(役割)을 하는 것 등이 바로 그러한 작용(作用)의 예(例)입니다.
또 한 예(例)로 관상용(觀賞用)으로 기르는 열대어(熱帶魚)를 수입(輸入)할 때, 운반하는 도중에 적응하지 못한 상당한 양(量)의 열대어가 죽었습니다. 고심(苦心)끝에 그 열대어(熱帶魚)의 천적(天敵)을 적당량 같은 통에 넣어 운반했더니, 놀라울 정도로 많이 살아 있었습니다. 죽은 양(量)의 대부분은 천적의 먹이였고, 나머지는 전에 비해 훨씬 더 건강하게 살아 있었습니다.
사소한 생명(生命)이지만 자연(自然)의 법칙(法則) 속에서는, 당연히 대처(對處)하는 적응력(適應力)이 강해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천적(天敵)이 그의 먹이감들을 살리고, 그 먹이감들은 천적(天敵)을 살리는 것입니다. 돌도 도는 하나뿐인
일체(一切)의 생명(生命)이기에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날지, 혹은 이미 어디에선가 만났었는지도 모르는 생명(生命)들입니다. 생명(生命)있는 모든 것을 결코 소홀히 생각하지 마십시오.
신선(神仙)이 되고, 도통군자(道通君子)가 되어, 몇 만년을 살고, 또 누구를 구(求)해주고, 남들 위에 군림(君臨)하겠다는 등의 생각은 너무나 허황(虛荒)된 발상(發想)입니다. 자칫하면 욕심(慾心)의 노예(奴隸)가 될 수도 있습니다. 육체(肉體)의 의식(意識)을 벗어나면 지금 자신의 현상(現象)적인 사실(事實)과는 하등 관계없이, "오늘은 좋은 일을 해서 기쁘고 즐겁다" "오늘은
좋지 않은 행동으로 불쾌하고 우울하다"는 등의, 육체(肉體)의 느낌이나 생각과는 무관하게, 자유(自由)와 평화(平和)와 행복(幸福)은 이미 무한(無限)으로 공급(供給)되고 있음을 느끼실 것입니다.
위 없는 보리도(菩提道)를 얻고자 하면 언제나 마음을 평등(平等)히 가져야 되느니라. 주인공아! 그대가 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눈먼 거북이 구멍 난 나무토막을 만난 것처럼 기적같이 어려운 일이니라. 한 평생(平生)이 얼마나 된다고 닦지 않고 게으름만 피우겠느뇨. 사람으로 태어나기도 어렵지만 깨달음의 도을 만나기는 더욱 어려운 일, 금생(今生)에 놓쳐버리면 만겁(萬劫)을
지나도 다시 만나기 힘들도다.
이 열가지 계법(戒法)을 지키고, 부지런히 닦아 물러나지 말고 속히 정각(正覺)을 이루어 중생(衆生)을 제도(濟度)하라, 내가 바라는 것은 그대 혼자만이 생사(生死)의 바다에서 벗어날 것이 아니라, 모든 중생(衆生)을 건지는 것이니라.
왜냐하면 그대가 끝없는 옛적부터 금생(今生)에 이르도록 생사(生死)에 오락가락할 때, 번번히 그대의 부모(父母)를 의지했을 것이니, 끝없는 세월(歲月)에 부모(父母)되었던 이가 얼마나 많을 것이뇨, 이와 같이 생각하면 육도중생(六道衆生)이 그대의
부모(父母) 아닌 것이 없도다.
이러한 중생(衆生)들이 모두 악도(惡道)에 떨어져 견디기 어려운 고통(苦痛)을 밤낮으로 받고 있으니, 그들을 제도(濟度)하지 않는다면 어느 때 벗어날 것이뇨, 가슴을 도려내는 듯 애닯고 슬픈 일이 아니더냐.
천만번 바라노니 그대는 어서 큰 지혜(智慧)를 밝히고 무량광명(無量光明)을 갖추어, 자유자재(自由自在)한 방편(方便)으로,
거친 파도(波濤)위에 지혜(智慧)의 배가 되어, 탐욕(貪慾)의 기슭에서 헤매이는 미혹(迷惑)의 중생(衆生)을 제도(濟度)하여라.
그대는 아는가, 삼세(三世)의 부처님과 역대(歷代)의 조사(祖師)들이 우리와 같이 범부(凡夫)였다는 사실을 곧 그도 장부(丈夫)요, 나두 장부(丈夫)니, 하지 않아서 그렇지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니라. 옛 사람의 말에 "도(道)가 사람을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도(道)를 멀리 한다"하였으며, 또 "내가 착하려고 하면 착한 것이 스스로 따라온다" 하였으니 진실로 옳은 말씀이니라.
만일 믿는 마음만 물러서지 않는다면, 누구나 자성(自性)을 깨쳐 부처를 이루지 못하겠느뇨!
옥토끼 뜨고 짐은 늙은 모습 재촉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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