氣 哲學, 동양철학

[스크랩] 2000년의 空사상의 의미(2)

장백산-1 2011. 2. 13. 00:12

Ⅲ. 공을 깨달음, 그 길- 禪

불교를 이론적으로 연구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너무나 방대한 양이 시간과 노력을 한평생 경주해도 거의 끝내지 못할 정도로 많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이러한 방대한 불교의 이론이 깨달음의 진리, 해탈을 확실히 보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불교이론의 공부가 막대한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이론공부로 인한 폐단을 극복하고 空을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실천적 방안이 禪이다.

1. 禪의 의미
선은 산스끄리어 dhyāna에서 유래한다.
dhāyāna는 jhāna(dhāyā의 속어)로 변하고 다시 여기서 어미가 없는 jhāna가 한자로 禪那 또는 禪으로 바꾸어진 경우다.
dhyāna는 산쓰끄리뜨어로 Dhyāna뜻이다. Patanjali의 aṣṭāṇga요가에 의하면 Dhyāna는 총 8 단계 중 제 7단계로서 형상, 사고, 소리에 집중할 때 방해 없이 완전히 마음을 집중하는 것, 집중하는 대상에 완전히 흡수되는 것을 말한다.
흔히 불교에서 禪은 깨달음을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 경전의 법을 넘어선 가르침이란 의미로 다음처럼 요약된다.

경전 밖에 서로 전해지는 가르침
문자에 의존함이 없이
바로 사람의 마음을 닦아서
성품을 깨닫고 붓다를 이루게 한다.
敎外別傳 不立文字 直旨人心 見性成佛

선은 흔히 禪定으로도 쓰이며 정은 ‘바른 정신의 집중, 전념 집주(전념(專念集注)를 통해 번뇌를 쉬고 고요히 명상한다는 의미로 산스끄리뜨의 Samādhi에 해당된다. Samādhi는 aṣṭāṇga요가의 마지막 8단계로서 주객이 합일된 상태이다. 이런 의미에서 선은 善政은 “불교식의 정신통일”을 의미한다.

2. 禪의 방법
선의 방법은 ‘不立文字 敎外別傳’에 근거하고 있다. 이는 불교가 문자에 의한 이해를 거부하고 마음의 깨달음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우리가 보통 영혼, 무한, 진리라는 형이상학적 용어뿐 아니라 일상언어에서 조차 그 언어에 합당한 실체적 영역이 있다고 생각하고 이에 집착한다. 그리고 이러한 언어적 관습에 대한 집착이 우리의 정신적 환상을 빚어내게 된다.
문자와 개념에 집착하여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은 갈등(葛藤), 교분자(膠分子), 화타(話墮)라고 표현하고 있다. 즉 갈등이란 마치 칡넝쿨이 복잡하게 얽히듯 언어와 개념이 복잡하게 서로 뒤엉켜 본말(本末)을 모르게 되는 것이며 교분자란 말(言)이 끈적거리는 아교 그릇처럼 사람을 현혹시켜 어리석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며 화타란 언어 이전의 참뜻을 놓치고 단지 어구에만 사로잡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선어록에서는 언어와 개념에 의한 불교 이해를 부정하고 참된 불교 수행의 방법으로 오직 체험과 직관, 사상과 생명의 장려한 융합을 택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不立文子, 敎外別傳으로서의 禪은 경전 개설 중심의 논쟁인 학문 불교, 절을 세우고 불상을 세우는 공덕주의 불교를 반대하고 오직 마음의 깨달음을 강조하여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수하는 ‘以心傳心’의 방법을 택한 것이다.
그리하여 운문 문헌에서는 선법을 적은 제자에게는 “네 입으로 한 마디도 못하면서 내 말만 베껴 써서 훗날 나를 팔러 다닐 셈인가”라고 말하고 말 많은 사람에게는 칠칠치 못한 사기꾼들이 남이 뱉어낸 침이나 받아먹으면서 기묘한 골동품 같은 말들을 외워 가지고 도처에서 날뛰고 있구나 라고 질타하셨다고 한다.
모든 형이상학적 시비는 경전 해석에 매달려 언어의 그물에 걸려 전체적 지각이 사라진다. 언어는 하나의 상징 체제인데 이를 실체의 것으로 여기는 착각이 일어난 것이다. 이러한 언어를 초월해 마음의 깨달음을 얻은 선승들은 깨달음의 계기가 다양하다.
강을 건너다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 비질하다가 던진 기왓장이 대나무에 부딪칠 때, 벗겨진 신발을 다시 신다가, 돌을 쪼겔 때 돌과 망치가 부딪치는 소리에, 닭 우는소리, 목침이 떨어지는 소리, 기둥에 머리 부딪치는 순간, 성주의 목소리를 듣는 중에 등 다양하다.

3. 禪문답
선문답은 경전 해설의 논쟁적 해설이 아니라 위에서 언급한 침묵 언어, 긍정적, 부정적 방법의 설명이 아닌 불교에서 발달된 ‘제 4의 방법’이라 하겠다. 이는 일상적 논리의 화법을 따르지 않고 깨달음의 경지에서 직각적으로 화살을 쏘듯 깨달음을 향한 話法에 의한 가르침이라고 하겠다.

ⅰ)이러한 선의 효시는 붓다가 가섭 제자에게 이심전심으로 꽃을 통한 이해전달이다.
영축산에서 설법을 하시던 세존께서는 대중들에게 한 송이 연꽃을 들어 보였다. 대중들은 금시 영문을 몰랐으나 오직 가섭 존재만이 홀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이제 진리에 관한 바른 안목과
열반으로 향하는 미묘한 마음
형상을 벗어난 실상
지극히 미묘한 진리의 문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
경전의 법을 넘어선 가르침을
마하가섭에게 전하노라
--남송시대 무문헤개 선사, 문무관 제 6칙 “세존염좌”

붓다께서 언어를 초월하는 가르침을 한 송이 꽃을 들어 표현하자 가섭은 조용히 미소로서 자신의 이해를 답하였다. 이는 이심전심의 방법으로서 언어를 통하지 않고서도 깨달음을 직접 전하는 禪의 기원이 된 일화이다.

ⅱ) 두 번째의 선문답은 달마대사와 양부제의 경우다.
남인도 즉 향지왕의 셋째 아들로서 중국에 불교의 깨달음을 전하는 달마는 선종의 일대 조사이다. 그 대화는 다음과 같다.

1. “짐은 즉위한 이래 수많은 절을 짓고 경전을 출판하였으며 불교 교 단을 후원하여 왔소. 어떤 공덕이 있겠소?
보리달마의 대답은 뜻밖에도 간단했다. 그리고 충격적이었다.
󰡒전혀 공덕이 될 것이 없습니다.󰡓
당황한 양무제가 다시 물었다.
“어찌 공덕이 없다고 하는가”
“ 공덕이란 인간과 신들의 속세에서나 필요한 덧없는 행위이며 그 과보 역시 조금씩 새어나오는 옹달샘에 불과할 뿐이지요. 그림자가 실재하 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이 실체가 아닌 것처럼 그것은 허상일 뿐 입니다.”
2. “그렇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진정한 공덕이란 무엇인가?” “진정한 공 덕이란 청정한 지혜의 완성에 있습니다. 이 지혜의 본질은 형상을 초월 한 것이며 공적인 것입니다. 이 진정한 공덕은 세간적인 방법으로도 추 구되지 않는 것입니다. ”
무시당한 것 같아 화가 난 양무제는 보리 달마의 지식을 시험해 보고 싶어졌다.
3. “그렇다면 어떤 것이 그대의 제일 성스러운 진리인가?󰡓
󰡒아무 것도 성스러울 것이 없소.” 양무제는 자신의 모든 지식을 거부하는 달마 대사에게 더욱 화가 나 큰 소리로 물었다.
4. “짐 앞에 있는 그대는 누구인가?”
“모르겠습니다.”

위의 대화 중 1부분은 공덕주의의 형식적 불교를 부정하는 대화로서 진실한 불교는 마음의 깨달음에 있음을 말하며,
2부분은 空의 본질을 말하는 대목으로 이는 모든 형상에서 벗어난 것이며 세속적인 삶과 무관함을 말하는 대목이다.
3부분은 빛의 진리는 聖과 俗도 초월한 空의 세계인 것을 말해주고 있다.
4부분은 인간의 본질은 언어로서 표현될 수 없고 규정될 수 없는 무한자임을 나타내고 있다.
이와같이 양무제와의 대화에서 달마대사는 모든 형식과 언어를 넘어선 공의 본질로서 마음의 깨달음을 말하면서 후대 중국의 제일 효시로서 선의 큰 법맥을 형성하게 되었다.

ⅲ)제 6조 혜능의 경우다

혜능은 선종의 모든 형식을 벗어나 종교와 삶의 원만한 조화를 크게 이루어낸 대선사이다. 평범과 비범, 불교, 도교, 유교성인과 범인의 모든 사상과의 원만한 조화 속에서 불교와의 집착까지도 넘어서서 대융화를 이룩한 6대 조사이다.

보리 나무가 원래 없고
거울 또한 물이 아니다.
본래 한 물건도 없거늘
어느 곳에 먼지가 일까.

바로 이 유명한 게송의 주인이 혜능이다.
혜능은 「단경」에서 원만 융해한 삶을 강조하면서 모든 종교적 삶, 철학과의 포용적인 태도를 취한다.

마음이 바르다면 계율이 무슨 소용이며
행식이 바르면 참정이 무슨 필요인가.
은혜를 알아 어버이를 섬기고
믿음으로 서로를 사랑하라.
겸손과 존경으로 위 아래 화목하고
참으면 나쁜 일들 조용히 사라지네.
나무 비벼 불을 얻듯 하면,
진흙 속에서 붉은 연꽃 피리라.
입에 쓰면 몸에는 좋은 약이니
거슬리는 말 충언임을 기억하라.
허물을 뉘우치면 지혜가 일고
잘못을 감추면 마음이 어질지 못하다.
나날이 한결같이 좋은 일 하면
도를 이루는데 시줏돈도 필요 없다.
진리는 그대 마음에서 찾아야 하거늘
어찌하여 밖으로만 찾아 헤매나.
그대 가르침 따라 닦으면
천국이 그대 앞에 펼쳐지리라.

예서 仁과 道의 유학과 도교 사상이 녹아 있는 듯 하다.
혜능은 이 세상에는 36가지 대립되는 쌍들이 있다고 한다. ----있음과 없음, 현상과 공, 움직임과 고요, 맑음과 흐림, 평범한 것과 그리고 성스러운 것, 승려와 세속인, 크고 작음, 길고 짧음, 올바름과 그릇됨, 어리석음과 지혜, 번뇌와 평안, 자비와 악의, 영원함과 무상함, 허와 실, 기쁨과 분노, 나아감과 물러감, 삶과 죽음, 화신과 보신.
그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지침을 준다.
만약 그대가 이 36개를 잘 알아서 적절히 쓸 줄만 안다면 모든 경전의 진리를 꿰뚫어 상대적인 양극단을 피할 수 있을 것이고 참 본성이 스스로 일어날 것이다. 그리하여 남과의 대화에서도 밖으로는 현상에 초연하며 안으로는 공 가운데 있어도 공으로부터 초연해 있을 것이고, 공에 집착하면 다툼이 나락으로 더욱 깊이 빠져들 따름이다.
누가 그대에게 있음의 의미를 물으면 없음의 시각에서 대답하나 평범한 것을 물으면 성스러운 것을 말하고 성스러운 것을 물으면 평범한 것을 대답하니 이렇게 두 극단이 서로 도와 중도의 의미가 밝혀지리라.
누가 어둠을 물으면 「밝음은 어둠의 원인이요, 어둠은 밝음의 원인이다」라고 대답하나 밝음이 사라지면 어둠이 오리니 어둠은 밝음으로 말미암아 생기고 밝음은 어둠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이 둘의 상호 관계 속에서 비로소 중도의 의미가 밝혀진다.
혜능은 이 대립되는 이원적인 사고의 한계를 넘어서 이렇게 수직적 상승으로 空의 무한 경지를 향하고 있다.

ⅳ)임제- 차별 없는 사람(無差眞人)

깨달음의 일체의 장애를 파격적이고 역동적인 가르침으로 제거하는 빼어난 개성적 인물, 선사 임제는 그런 그의 개성을 섬뜩하게 표현하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그가 부모일지라도 죽이고,
친척 권속이라 해도 죽여라.

이는 깨달음을 제외한 일체 인간 관계의 부정이다. 임재 선사의 최대 관심사는 無位眞人 (無依道人, 眞正道人)이다. 이는 여러 가지 우연과 거짓이 있고 변화하는 겉사람이 아닌 속사람으로서 죽지도 나지도 않으며 시공간을 초월한 영원의 참자아이다. 이는 하나의 대상이 아닌 본래의 생이며 이 본래 나는 자유인임을 말한다. 그의 말의 표현을 따르면,

자기 신뢰의 이유를 알아야만 모든 근본적 행동들
사이에 존재하는 인력 관계를 설명할 수 있다.
우주적 신뢰의 바탕이 되는 이 <본래의 나>란 무엇인가?

제멋대로 위치를 바꾸지도 않고 그렇다고 딱히 자로 잴 수도 없는 헤아릴 수조차 없이 많은 별들은 최소한의 존재 가치를 갖추고 있는 것이면 그 무엇이든, 그것이 존재 가치를 갖추고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그것이 아무리 쓸모 없고 더러운 존재라 할 지라도 아름다운 빛을 비춰준다. 과학의 힘으로도 아직 불가해한 저 별들은 무엇이며 그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이러한 의문은 자연히 우리가 본능 또는 천성이라 부르는 생명 본질의 문제로 나아가게 된다. 이렇게 우리가 본래부터 갖고 태어난 지혜를 우리는 <직관>이라 부르고, 모든 후천적인 행동들은 <학습>이라 부른다. 머리로는 더 이상 분석이 불가능한 궁극의 그 힘 속에 모든 사물은 공통된 그 기원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고요한 시간에 우리의 뇌리를 스치는, 그러나 어떻게 해서 우리의 영혼 속에 떠오르는지 그 방법을 결코 알 수 없는 존재의식은 사물과 공간, 빛 그리고 사람에 따라서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모두 하나이며 같은 근원에서 흘러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함께 도를 닦은 여러 벗들이여, 마음의 근원적인 법칙은 형상이 없으나 순수하고 유연하게 온 누리를 관통한다. 눈으로 보며, 귀로는 듣고 코로도 냄새를 맡으며, 입으로는 대화를 하며, 손으로는 잡고, 발들도 걷고 있지 않는가? 이는 본래 한 개의 신령스러운 구슬인데 쪼개어 여섯 조각으로 나누어진다. 근본적인 한 마음이 육도(六根, 眼耳鼻舌身意)의 작용으로 나누어진 것이다. 그 한마음이 본래 공한 것이므로 가는 곳마다 해탈의 법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소승은 왜 이렇게 설하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구도자 여러분이 밖을 향해 찾아 구하며 헐떡이는 마음을 쉬지 못하고 옛사람의 쓸데없는 언어와 행위에 매달려 흉내내려 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살아 있는 진리는 결코 과거의 언어와 형상 속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위대한 선승들은 진리의 본질- 마음의 깨달음을 위한 대화를 즐겼고 일반인들에게는 이들의 대화가 언어적 묘기를 연출하는 승려들의 말솜씨로 보였다. 득도(得道)후에도 깨달음을 얻기 위한 언어적 놀이는 선승들의 주요 관심사이다. 그러면 이러한 선승들이 즐긴 禪의 가치는 무엇인지 알아본다.

4. 禪의 가치
禪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토마스 머튼의 말로 이해해 보자.

선은 생의 체계적인 설명도, 이데올로기도, 세계관도 아니며, 계시와
구원의 신학도 아니고, 어떤 비법도 고생과 금욕을 통한 완성도 아니며, 대부분은 알고 있는 것처럼 신비주의도 아니다. 사실 선은 우리가 갖고있는
그 어떤 정통적이고 간단한 카테고리에도 걸려들지 않는다. 따라서 선을 소위 〈범신론〉이라거나〈내적 정적주의〉, 각종 신비주의 등으로 몰아 세워 딱지
붙이려는 우리의 모든 시도는 전혀 터무니없는 짓거릴 일 뿐이다. 그것들은
모두 선이 신을 인간의 위치로 부정하게 끌어내리려 한다면 잘못된 추측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이다. 선은 기독교와 같은 방법으로 신과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비록 선에 있어서의 空체험과 기독교의 부정적 신비주의가 말하는〈미지〉의
신을 체험하는 것 사이엔 그럴듯한 닮음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선은 하나의 단순한 교리도 붙잡아 둘 수 있는 게 아니다. 선에도 비록
교리적인 요소들이 녹아 들어가 있긴 하지만 그것들은 이해하기가 표현이
불가능한 선 체험의 곁다리들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禪은 어떠한 가치를 지니는가.

첫째, 모든 압력과 왜곡에서 벗어나 본질을 ‘봄’이다. 이는 자신의 전 존재로서 본질을 직접 체험함이다. 순수한 의식의 깨어남이며 확실성이며 궁극적 도달이다. 종교적 의식, 문헌들에 집착한 보잘 것 없는 형식적인 모든 신앙 의식을 거부함이다. 의식의 우상, 사회적인 우상의 심리적 질곡을 거부함이라. 특히 경전의 해석에 집착한 경전 경건주의를 배격함이다.
그리고 나서 종교적 본질 - 마음의 깨달음을 자신의 존재, 삶에서의 체험이다. 이상한 일화, 비밀스런 언어, 비논리적인 문답, 빼어난 유우머, 이해 못할 행동, 모순 등의 선문답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은 이러한 종교의 본질을 도달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의 하나일 뿐이다. 자신에게 깊은 신뢰와 실천으로 직접 자신의 존재로서 체험하는 것이 선이다.
禪은 자신의 본래 본질을 통찰하는 방법이며 구속에서 자유로 나가는 길을 지시한다. 우리를 삶의 원천에서 그 자리에서 생명의 물을 마시게 하며 유한한 무리들이 이 세상에서 고통받게 하는 모든 질곡으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한다. 禪이란 일상적인 환경에서 압력 받고 뒤틀어져 있는 우리에게 활동하기에 적합한 에너지 수로를 만들어 준다.

둘째는 부분적인 앎이 아니므로 전체로서의 앎으로서 새로운 인식이다. 현상과 본체, 부처와 중생, 무지와 깨달음이 서로 분리되지 않고 전체로서 하나로 인식하여 한쪽으로 치우친 인식에서 벗어나 균형 잡힌 인식의 새로운 관점을 획득하게 된다.
모든 대립되는 생각, 사건들은 禪을 통하여 하나의 질서로서 모든 갈등을 해소하고 조화를 가져오게 한다. 서로 다른 사고, 사건 등은 禪을 통해서 존재의 연속적인 계기의 질서로서 존재를 구심점으로 하는 하나의 원으로서 통일로 이해된다.

이렇게 모든 형식, 권위, 왜곡을 거부하고 각자의 내부의 알맹이를 보고 그대로 지켜내며 이에 방해되는 일체의 외적, 내적 방해로부터 벗어남이다. 이는 대립세계가 아닌 통일 세계로의 경험인 새 세계의 경험이다.

Ⅳ. 空, 禪 그리고 언어

1. 말의 유용성
인간 문화의 대부분은 언어로서 이루어진다. 언어로서 사고하고 언어로서 말하고 언어로서 관리하고 다스린다. 언어는 인간 본연의 상징일지라도 그 쓰임은 너무 광대하고 강력해서 인간의 특징은 언어적 동물이라고 규정할 정도이다. 언어는 인간 문화 형성에 필수적인 도구이다. 그러나 이러한 언어에도 부정적인 면이 있다. 문제는 Allen Watts가 말하듯이 “언어의 상징성을 잊어버리고 언어 자체를 사실 자체로 오인할 때이다.” 특히 종교나 철학에서 실재(Reality)에 관한 많은 이론들이 그 자체가 하나의 절대적인 사실로서 군림할 때 또는 그 피해는󰡐금족쇄󰡑가 된다.
‘空’이란 실재가 언어의 범주를 넘어 있다는 것을 말함이요. 禪이란 이런 空을 깨달은 방법의 일환으로 문답에서는 이에 관련된 상징적인 제스처나 동문서답 식의 답이 수수되곤 했다. 언어로서 실재를 이해함이 불가능하다면 수많은 언어로서 이루어진 철학, 종교는 어떠한 의미가 있겠는가.
언어로써 표현된 철학이나 종교는 사실 그 자체는 아닐지라도 실재에 관한 논리적인 표현 그 자체가 실재 이해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첫째는 실재에 관한 좀 더 분명한 이해를 도모한다면 의미가 있다. 둘째는 그런 이론이 꼭 실재는 아니더라도 이해하려는 사람에게 자기 만족을 준다면 그 나름대로 값어치가 있을 것이라 하겠다.
결국은 언어의 유용성의 면에서 실재에 관한 징검다리 역할로서 또는 실재를 가르치는 포인터로서 이해되면 그 소용을 다함이다. 그러나 징검다리와 포인터로서 역할을 잊고 상징을 실재로서 여기면 이는 광신적 맹목적인 믿음을 일으킬 위험이 있을 것이다. 실재에 대한 지식이란 아무리 위대해도 피상적 묘사일 뿐이다. 즉 그 자체는 결코 실재가 될 수 없기에 실재에 대한 피상적 지식이다. 오직 그 자체(실재)가 됨으로서 본질의 지식이 얻어진다.

땅에서 솟아오른 수증기
구름이 되고 마침내 하늘로 사라지듯
구름이 어디로 가고 언제 사라지는지 알 수 없네.
사념의 물결도
마음이 마음을 깨달을 때
해체되리다.

2, 언어적 갈등은 이분법적 대립이다.

여기 책상에 한 송이 꽃이 있다면, 우리는 이 꽃은 그냥 바라보지 않는다. ‘누가 갖다 놓았는가’ ‘이 꽃은 얼마나 할까’ ‘왜 여기에 놓았지’ 등 수많은 생각이 동시에 수반된다. 이러한 생각들은 그냥 보는 사물이 아닌 사물에 대한 저마다의 해석이므로 선입견, 편견에서 솟아날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런 생각은 ‘이것은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아름답다’ ‘추하다’등의 판단 작용을 한다.
이러한 관념들은 곧 이내 대립적 이분법적 사고로서 언어 세계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이러한 언어적 대립세계를 세상과 사물의 속성으로 인식하면서 살게된다. 이러한 사고는 마침내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가 일으켜 본래의 꽃의 모습이 아닌 해석으로 된 언어로 향기 없는 조화와 같다. 하나의 현상이며 착각을 일으키게 마련이다. ‘너와나’ ‘국내와 국제’의 「영어공용교육 찬성론」 「영어공용교육 반대론」 「고전주의와 실용주의」 과거와 미래, 정신과 물질, 동양과 서양, 남과여, 신세대와 구세대 등은 우리 대부분이 저마다 싸우게 되는 이분법적 싸움이다. 이런 언어 관습화는 묵은 시체이다. 마치 시바신이 어깨에 부인의 시체를 메고 다니듯 우리는 이미 죽은 언어의 시체를 어깨에 메고 다니고 있는 것이다.

3)언어적 갈등과 에고

이러한 언어적 갈등을 일으키는 주된 이유는 그 갈등 뒤에 있는 에고의 작용이다. 이 에고는 본래 개별화 원리로서 의식이었지만 ‘나의 것’으로 생각하는 소유의식이 결합되고 그것이 나라는 의식(자아 의식의 실체로 착각하는 사고 작용)이 생겨나게 된다. 이러한 에고의 가장 큰 신하는 사고 기능이다. 이 사고 기능은 자신에 대해 불리한 경우 자신을 가장하고 그리고 자신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해 과소․과대의 선전작용을 하게 된다. 이러한 작용이 자신의 허상으로 만든 관념의 집을 형성하고 이 집이 습격 받으면 마치 자신이 습격을 받은 것처럼 괴로워하게 된다. 이 에고에서 생겨난 저마다의 관념의 집은 인성을 지배하고 이에 위배되는 모든 이론과 사고를 철저히 배격하며 타인에게 공격성을 띄어 언어적 긴장 속에 살게 한다. 그러므로 언어적 갈등의 가장 큰 주범은 이 에고이다.

Ⅳ. 2000년의 空의 효용성

1. 자아의 관점에서
불교의 空은 우리의 모든 껍질이 없어진 마지막 카드, 속 얼굴이다. 육체의 껍질, 사고의 껍질, 꿈의 껍질, 욕망의 껍질, 의식과 무의식의 모든 껍질을 벗겨져 더 이상 어떤 언어와 형상으로 규정하지 못하게 될 때 우리의 속 얼굴에 空이 존재한다. 그리하여 틸레빠는 나로빠에게 다음처럼 노래한다.

허공을 깨달으면
중심과 바깥이란 굳은 관념마저 풀어진다.
이와 같이 마음이 마음을 깨달으면
모든 마음의 움직임은 끝나고
무념의 상태에 머물게 되며
위없는 보리심을 깨닫게 되리라.

우린 안에 있는 空은 또한 안과 밖이 없이 세상에 그대로 연결되는 둥그런 공이다. 우리 안에 있던 껍질 때문에 안과 밖으로 구분을 했지만 더 이상 껍질이 없으므로 안과 밖의 경계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나의 안도 空, 나의 바깥도 空, 나의 전체가 空, 세상 전체가 空이다. 모든 구별과 차별이 空으로 돌아간다.

안에도 있는 것은 밖에도 있고
큰 것이 곧 작은 것이네.
위에 있는 것이 아래에도 있으니
오직 존재하는 것은 한 생명과 한 이치라네.
이것을 움직이는 자 또한 그 하나라네.
이것을 움직이는 자 또한 그 하나라네
신성한 경계에는
안도 없고 밖도 없다.
큰 것도 없고 작은 것도 없다.

레르메데스의 노래가 말하듯이 모든 것들이 空안에 포섭되어 있다. 空은 우리가 갖는 최소이며 최대의 소유이다. 이 空의 이야기는 엄격히는 어떤 종교적 교리가 아니며 모든 인간이 고정된 관념과 형식의 틀에서 벗어나 원초 대지로 귀환시키는 완성의 길이다.

2. 종교의 관점에서

空은 구체적인 이론으로 종교적 규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너무나 종교마다의 의식과 교리에 교착되어 있는데서 오는 고질적인 병폐에서 벗어나 종교의 핵심이 되는 이상적인 삶을 가능케 하는데 있다. 도덕적, 종교적 근원의 힘으로 의식을 고양시키자 함이다. 종교가 갖고 있는 모든 도덕적 규정은 禪을 추구할지라도 하나의 관념의 틀로서 금족쇄가 될 수 있다. 아무리 좋은 금족쇄라도 족쇄로서 자유가 아닌 구속이다. 이런 여러 가지 종교적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더욱 자유롭고 폭넓은 관점에서 보고자 함이다.
空은 불교의 공이 아닌 모든 인간 종교에서 연습되어야 하는 사고와 규범 위로 상승케 되는 도구다. 인도의 요가는 원래 정통 육파철학의 하나였지만 모든 종교, 철학에서 요가를 실천한 것처럼, 空은 모든 종교가 포섭해야 할 덕목이다. 이는 니힐리즘의 포기가 아닌 자유의 길로의 적극적인 지침, 포용하는 덕목이다.

3)학문의 관점에서
학문은 이론적 세계이며 모든 이론은 언어로서 규정된다. 모든 언어는 하나의 상징적 도구임에도 우리는 자칫 저마다의 그 이론으로 지배하려 한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투쟁의 과정을 밟게 된다.
단지 상징은 상징으로서 이해하는 한 우리의 적용 범위나 접근은 올바르다. 그러나 상징인 이론들을 실제 사실로서 적용하면 여기서 오차는 증대된다. 모든 이론은 절대성에서 개연성으로 그 수요 체계를 바꾸어 많은 새로운 이론, 대립되는 이론들이 수용되고 활성화되는 학문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

4)삶에서
하루의 경험은 소요와 무질서의 혼합이고 다시 혼돈의 경험 그대로 질서 회복으로 순환임을 말해준다. 이 혼돈을 질서로 회복하는 변환점이 空이다. 空은 혼돈과 무질서는 비우고 다시 조화 질서의 삶을 시작하게 한다. 空은 끝없이 비우면서 새로운 삶을 순환시키는 영원히 새로운 부활고리이다.
우리는 지나치게 많은 정보, 지식, 사람. 사건, 일의 홍수 속에서 부담스럽고 숨가뿐 삶을 산다. 이러한 홍수에서 벗어나 휴식과 건강으로 인도하는 것이 空이다. 空은 끝없이 비우면서 모든 이물질을 제거하며 자체내의 생명을 다시 솟게 한다. 마치 샘물에서 물을 길으면 길을수록 더욱 더 맑은 물이 샘에 고이듯이 우리의 空의 샘물은 심리적, 신체적 피곤을 제거하며 새 삶의 에너지를 가져다준다.

나의 교리는 생각하되 생각함이 없이 생각하고
행하되 행함이 없이 행하며,
말하되 말함이 없이 말하고,
또 수행하되 수행을 넘어선 수행을 하는 것이다.

이는 대상에 대한 집착과 나에 대한 집착을 넘어서 있네.
이것이 지고의 空.
이는 대상에 대한 집착과 나에 대한 집착을 넘어서 있네.
이것이 최고의 명상.
여기에 헤매는 마음은 없어라.
이것이 황제의 행위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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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생활 · 운동 자연치유 연구소
글쓴이 : 이현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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