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과 현대물리학

[스크랩] 삼신일불(三身一佛) 아미타불(阿彌陀佛)

장백산-1 2011. 7. 21. 01:42

 

삼신일불(三身一佛) 아미타불(阿彌陀佛)

-청화스님- 

 
부처님 법문 가운데서 가장 고도한 법문은 대체로 심즉시불이라,

즉 마음이 바로 부처라는 말씀을 다 하고 있습니다.

우리 중생들은 ‘이렇게 못나고 좁은 마음이 어떻게 부처일 것인가?’

이렇게 회의를 품습니다만 이것은 우리 마음의 표면에 불과하고

우리가 쓰는 나요, 너요, 좋다, 궂다 하는 그 마음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보리방편문을 보면, 여기 지금 내 마음 심(心)이 바로 부처님임을 설파한 것입니다. 불교를 심종(心宗)이라고 하는 까닭과 불교의 대요(大要)인 심즉시불(心卽是佛)이 이렇게 간명하게 말씀이 됩니다. 부처님 법문 가운데서 가장 고도한 법문은 대체로 심즉시불이라, 즉 마음이 바로 부처라는 말씀을 다 하고 있습니다.

 

우리 중생들은 ‘이렇게 못나고 좁은 마음이 어떻게 부처일 것인가?’ 이렇게 회의를 품습니다만 이것은 우리 마음의 표면에 불과하고 우리가 쓰는 나요, 너요, 좋다, 궂다 하는 그 마음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우리 마음의 저변은 무한대로 우주를 감싸있습니다. 김가 마음도 천지우주를 감

 

싸 안고, 박가 마음도 역시 천지우주를 다 감싸 있습니다. 이것은 시공을 초월한 무장무애(無障無礙)한 마음, 즉 영체(靈體)라서 그때는 중복이 돼도 하등의 장애가 없습니다. 무장무애라, 박가 마음이나 김가 마음이나 모두가 똑같이 천지우주를 다 감싸 있습니다.

 

그런데 범부들은 마음을 겉에 든 표면의식만 사용합니다. 우리가 쓰고 있는 마음이라는 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몸뚱이에 꽉 가려서 이 몸뚱이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법문이라는 것은 그 ‘나’라는 것에 갇혀 있는 마음을 해방시켜서 본래의 마음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입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몸에 가려서 제 심성을 다 발휘하지 못하는 마음이라 할지라도 알고 보면 다 부처입니다. 지금 이 마음이 비록 부처가 다 된 마음이 아니지만 그래도 다 부처입니다. 마하지관도 있고 천태학(天台學)도 보다 보면 논쟁이 많이 있습니다.

 

심즉시불이라고 하면 ‘보통 심(心)이 아니라 도인(道人)의 심을 말하는 것이다’라는 분이 있고, ‘도인의 마음이 아니라 우리 중생심(衆生心)을 가리키는 것이다’라고도 합니다. 이와 같은 입장이 마음이 바로 부처라는 심즉시불의 논쟁입니다.

 

한쪽에서는 도인의 마음이 바로 부처인 것이지 별 볼일 없는 중생의 마음이 부처는 아니라고 주장한 분도 있고, 중생 마음의 본바탕이 결국 부처이기 때문에 중생 마음이 그대로 부처라고 해도 틀린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분도 있습니다. 이렇게 두 파가 생겨서 논란이 많았는데 결국은 중생 마음도 부처하는 논법이 이겼습니다.


삼신불을 비유로 말하면 태양(太陽)의 체(體)는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에 해당하고, 태양광명(太陽光明)은 원만보신(圓滿報身) 노사나불(盧舍那佛)에 해당하고, 태양광선의 그림자는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에 해당합니다.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은 물질이 아니고 우주 가운데 텅 비어 있으니 공()이라 하고, 그 공 가운데는 일체 존재를 일으킬 수 있는 본 성품(性品) 원만보신 노사나불이 충만해 있으니 성()이라 하고, 또 이 자리에서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인 일체현상이 나오므로 상()이라 합니다.
 
앞서 천태지의 스님의 공(), 가(), 중()을 배대하면 정확히는 좀 문제가 있으나, 이것은 중도(中道)의 중()에 해당하고, 이것은 가()에 해당하고, 이것은 공()에 해당하지요. 이것은 깊이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선 배대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해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자리는 아미타불의 타()에 배대하고, 원만보신 노사나불은 아미타불의 미()에 배대하고, 일체존재 일체만유를 아미타불의 아()에 배대를 시켰습니다.
따라서 천백억화신 아만 따로 있는 것이 아닌 것이고, 청정법신 공만 따로 있지 않고, 가사 우리가

 

하나
의 불빛을 이렇게 볼 때 겉으로 보이는 것은 아()인 불빛이지만 그 안에는 결국 성()과 공()이 다 들어 있습니다. 또 그 반대로 공 가운데도 공만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성과 상이 다 있습니다. 소위 삼위일체(三位一體)란 말입니다.
 
또 삼신(三身), 법신, 보신, 화신이 있다 하더라도 결국 하나의 부처님입니다. 셋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삼신일불(三身一佛)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 아미타불은 소박하니 방편적으로 저 서방정토(西方淨土)의 극락세계(極樂世界)에 계신다. 이렇게 생각합니다만 방

 

편을 떠나서 제일
의적으로 해석할 때는 아미타불은 천지 우주가 바로 아미타불입니다.
그러면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은 무엇인가? 관세음보살은 천지우주인 아미타불의 자비(慈悲)의 상징입니다. 또 문수보살(文殊菩薩)은 무엇인가? 천지우주 아미타불의 지혜(智慧)가 바로 문수보살입니다.
 
그렇게 부처님 이름이 많지만 모두가 다 뿔뿔히 있지가 않습니다. 부처님 공덕이 하도 많으니까 하나의 개념으로는 표현을 잘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덕 따라서 그때그때 이름이 붙습니다.
중생의 병고(病苦)를 다스릴 때는 약사여래(藥師如來)라. 또 하늘에 있는 각 성수들, 별들을 다스

 

릴 때는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 칠성여래(七星如來)입니다. 칠원성군(七元星君)이라. 그와 같이 돌멩이나 티끌이나 모두가 다 부처님의 화신입니다.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한번에 말하면 바로 마음이 부처인데, 마음 그것이 무엇인가?
 
그래서 달마대사(達磨大師)의 관심론(觀心論)을 보면 마음을 맨 처음부터서 풀이 했습니다. 인간성이 무엇인가? 마음 그것이 기묘한 것이어서, 우리 마음은 우리가 생각할 때는 참 별것도 아닌데 결국 마음 파고 들어가면 의식(意識), 말나식(末那識), 아뢰야식(阿賴耶識), 암마라식(菴摩羅識)이고 결국은 부처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어떠한 것이나 결국은 들어가면 다 부처가 되어버립니다. 산이요, 냇이요, 티끌이요, 또 원소요, 소립자요, 내내야 들어가면 결국은 마음이 되어버립니다. 마음은 우주의 순수 생명 에너지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것에도 모두 이것이 똑같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화엄경(華嚴經)을 보면 우주라는 것은 종횡(縱橫)으로 얽히고 설키고 딱 묶여 있습니다. 우주는 하나의 생명 덩어리입니다. 하나의 생명 덩어리인데 나만 잘 살고 남이 못살면 균형이 깨집니다. 균형이 깨지면 틀림없이 그때는 무슨 소리가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가 천지 우주의 도리에 맞게 살면 되는 것입니다. 맞게 살려고 하면 될 것인데 우리 중생은 앞서 말씀과 같이 겉만 본단 말입니다.
본래 하나인줄을 본다고 생각하면 균형있게 살수가 있을 것인데, 속은 못 보고 겉만 보
 
니까 이놈의 모양만 보고, 자기 몸뚱이도 사실은 자기 것도 아닌데 권력이고 무엇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처님을 불경에서는 그때그때 중생의 근기 따라서 여러 가지로 말씀을 합니다.
 
보리(菩提), 도(), 열반(涅槃), 법성(法性), 실상(實相), 여래(如來), 이것이 원래 우리 주인공(主人公)이기 때문에 주인공, 본래면목(本來面目), 진여(眞如), 극락(極樂) 모두가 다 결국 부처라는 하나의 별명에 불과합니다.
 
이명동의(異名同意)라. 이름은 다르고 뜻은 같습니다. 그러니까 불경을 볼 때 이렇게 나오고 저렇게 나오고 하면 무엇이 무엇인지 잘 몰라버립니다만 결국은 다 불성을 말해 있습니다. 간단 명료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불교는 어떤 때는 현상만 가지고 상만 말해 있는 법문도 있고, 어떤 법문은 체만 말한 법문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생이 상만 말한 법문을 보면 성과 체는 잘 몰라버립니다. 그래서 옛날 소박할 때는 그렇게 상만 말하는 법문이 다 통할 수가 있었으나, 지
 
금 현대는 일반 철학은 물론 헤겔 철학이나 스피노자의 철학을 다 배웠기 때문에 그야말로-스피노자는 불교도 많이 공부했으므로 책을 보면 이거 부처님 말씀같구나, 이렇게 생각이 날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때라 그런 치우친 불교해설을 하면 잘 통할 수가

 

습니다. 부처님 뜻도 그것이 아닌 것이고, 부처님 법문은 그때그때 지금 현대는 이것저것 다 종합적으로 하지 않으면 안되는 때입니다.
따라서 같은 수행법도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정관(不淨觀)이라. 몸이라는 것은 더럽다.

 

이렇
게 생각하는 공부라던가, 또 모두는 다 비었다. 다 비었다 하더라도 사실 중생들은 비었다는 것을 못 보니까 실감이 갈 수가 없습니다. 또 그것은 너무나 허망하고 말입니다.
도인들이 보면 빈 가운데 다만 비어있지 않고서 불성광명(佛性光明)이 충만한 자리, 모두를 찬란

 

스러운
불성으로 봅니다. 그 자리가 바로 실상입니다. 그런데 실상이 아니라 텅 비었다. 이렇게만 생각하면 허무를 느낍니다. 우리 마음은 지금은 별 것이 아니지만 내내야 마음 저변은 부처이기 때문에 우리가 부처님 가르침같이 그런 고도한 법문이 아니면 우리 마음이 항시 안정을 못취합니다. 항시 불안스럽습니다.
 
 있다고 해도 불안스럽고 텅비었다고 해도 불안스럽고 합니다. 전부가 다 부처다 이렇게 되어버려야 본래성품이기 때문에 마음이 활발하니 풍요합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이 가장 풍요해지는 행법 이와 같이 현상이나 실상이나 모두를 종합적으로 수렴한 법문이 앞서 천태지의 선사의 법문이요,
 
또 금타대화상(金陀大和尙)의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입니다. 따라서 이 법문은 우주만유를 하나의 도리로 딱 통달해 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체험은 미처 못한다 하더라도 사실은 우리 마음이 개운한 것입니다.
 
죽어도 죽지 않고 어디가 아파도 우리 불성은 아프지 않고, 아파도 말뚱말뚱 불성을 생각하면 그렇게 아프지도 않습니다. 이러한데서 우리가 불성 자리에 마음두고 사는 것이 불교인의 생활이지요.
 
염불(念佛)도 결국 부처하고 하나가 되기 위해서 부처를 안 떠나기 위해서 항시 부처를 염합니다. 본래 부처이니까 말입니다. 앞을 보나 뒤를 보나 위를 보나 아래를 보나 결국은 부처뿐인 것이니까 부처를 안 떠나기 위해서 우리가 염불을 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부처이니까 말입니다.
 
옛날의 방편염불은 부처님 그러면 저만큼 밖에서 우리가 부처님을 부르면 우리한테 와서 가피를 준다 이런 식이지만, 사실 원래 염불은 그런 것이 아니라, 바로 앞을 보나 뒤를 보나 이것 보나 저것 보나 모두가 부처다. 이렇게 부처님을 염불하는 것입니다.

 

옛날 방편염불은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저만큼 밖에서 우리가 부처님을 부르면 부처님이 우리한테 와서 우리를 돕고 우리를 지켜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원래의 염불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앞을 보나 뒤를 보나 이것을 보나 저것을 보나 모두가 부처라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 염불입니다.

 
 
출처 : 공덕총림 덕림회 법당
글쓴이 : 관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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