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철학을 통해 바라보는 현대물리학
음(陰)과 양(陽) (Yin and Yang)
Ⅰ. 과학, 종교, 철학에 대한 선입견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종교나 철학은 과학의 반대편에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먼저 종교를 생각해 보자. 그도 그럴 것이,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와 갈릴레이(Galileo Galilei)의 시대를 지나면서 과학적 사실이라고 내세우는 것은 밝혀질수록 당시의 절대종교인 기독교의 교리나 우주관과 모순되는 내용이 많았고, 이로 인한 교황청과 과학자들의 대립은 첨예하기 이를 데 없었다. 수많은 과학자들은 교황청의 종교재판을 거쳐야했고, 뜻을 굽히지 않는 경우엔 화형까지도 당한 일이 있다. 갈릴레이가 교황청의 파문으로부터 풀려난 것이 지난 1992년의 일이라는 것은 그간 이들의 극단적인 반목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런 배경 속에서 어찌 과학과 종교를 같은 선상에 놓을 수 있겠는가? 이번엔 철학과의 관계를 보자. ‘철학’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떠오르는 것은 철학자들의 난해한 말이다. 알 듯하면서도 명쾌하지 않은, 애매모호한 말들의 연속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이에 비하면 과학은 어떠한가? 과학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개인의 문제이므로 접어두고,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더없이 간결하고 명쾌한 수식으로 이론을 설명하고 또 받아들인다. 이렇게 명확함을 최우선으로 하는 과학이 철학과 구분된다는 생각은 꽤 타당해 보인다. 각 분야가 다루는 대상도 차이가 있어 보인다. 과학은 주변의 물질세계를 다루는 반면, 종교와 철학은 자아나 존재와 같은 정신세계의 가치를 화두로 한다는 것이 보편적인 생각이다. 요컨대, 과학은 물질세계에 대한 객관적인 관찰 사실을 명확한 언어로 다루는 학문인데 반해, 종교와 철학은 정신세계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서 개념적으로 ‘모호하게’ 다루는 분야라고 생각한다.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
그러나 최근, 이러한 전통적인 선입견이 동양의 종교와 철학으로부터 깨지고 있다. 현대과학, 특히 현대물리학이 발전하면 할수록, 그 연구 결과가 동양의 종교와 철학에서 오래 전부터 말해오던 우주관, 물질관과 놀랍도록 일치하는 것이다. 고전 서양과학의 상징인 뉴턴(Isaac Newton)의 고전역학이 20세기 초반에 무너지고, 과학의 패러다임이 양자역학으로 전환되면서 새 시대를 맞이하였다. 그러자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자연의 모습을 ‘과학적’으로 기술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러한 새로운 서양과학의 업적들이 갈수록 동양철학의 흐름과 상통한다. 이러한 현대물리학의 동향에 대하여, 그 선두에 서있는 영국의 저명한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양자역학이 지금까지 해놓은 것은 동양철학의 기본개념(음양, 태극)을 과학적으로 증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The findings of quantum physics has done nothing more than validate the fundamental concepts of Eastern philosophy.
전혀 다른 것으로 생각하던 과학과 종교, 그리고 철학. 특히나 완전히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서양과학과 동양철학에서 이러한 놀라운 일치가 나타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선입견을 깨고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과학, 종교, 철학의 세 분야는 모두 진리, 자연의 본질에 대해 탐구하고 그것을 알아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눈에 보이는 현상세계를 뛰어 넘어 보다 깊은 본질을 들여다보며 공통적인 패턴을 찾으려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분야들이 독립적인 것으로 느껴지는 것은, 그 진리가 어떤 종류이냐에 기인하는 것 같다. 과학에서는 우주와 물질세계의 진리를 탐구하고, 종교에서는 자아와 인간세계의 진리에 대해 탐구하고, 철학은 우주와 인간의 진리에 대해 탐구한다.2) 따라서 철학은 과학과 종교를 연결하는 가교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현상적인 면만을 보았을 때 느끼게 되는 것으로, 본질적인 면에 있어서는 세 분야 모두 우주의 근원적인 원리를 발견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지구 반대편에서 오랜 세월의 틈을 두고 활동했던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의 이론과 부처(Buddha, 석가모니)의 수행은 비슷한 의미로 다가온다.
그럼 오늘날 종교와 철학, 특히 동양철학의 어떤 모습이 현대 물리학자들의 눈을 끌고 있으며, 스티븐 호킹이 위와 같은 고백을 하도록 만들었을까?
Ⅱ. 도덕경 속의 우주관(宇宙觀)
도가철학의 창시자,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 42장 〈도화(道化)〉3)는 다음 구절로 시작된다.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도생일 일생이 이생삼 삼생만물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 만물부음이포양 충기이위화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 만물은 음기를 등에 지고 양기를 가슴에 품고 있다. 음양의 두 기가 서로 작용하여 조화로운 기를 형성한다.
여기서 도(道)는 도교에서 말하는 자연의 근원적 질서이고, 하나는 기(氣)이며, 둘은 음양(陰陽)을 뜻하고, 셋은 이 음양이 모여서 만드는 화합체들을 의미한다. 이 구절을 과학자들에게 어울리는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바꾸어 보면 어떨까?
우주는 쿼크(quark)와 렙톤(lepton)을 낳고, 쿼크와 렙톤은 양성자와 전자를 낳고, 양성자와 전자는 원자를 낳고, 원자는 만물을 낳는다. 만물은 전자를 오비탈(orbital)에 지고 양성자를 원자핵에 품고 있다. 양성자와 전자의 두 전하가 서로 작용하여 안정화된 에너지 준위를 형성한다.
노자(老子)
노자가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이 오늘날 알고 있는 과학적 사실과 얼마나 닮았는가! 이처럼 고전적인 동양철학에서의 음양4)은 전자기학의 양전하, 음전하와 상당히 어울리는 개념인 듯하다. 또, 이러한 전하가 그보다 근원적인 존재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도 현대물리학이 알아낸 성과 중의 하나로, 도덕경에서는 이를 기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두 전하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 영어는 "plus"와 "minus"라는, 전기적 현상과는 별 관계가 없는 반의어를 선택한 데 반해, 동양에서는 이들을 “더하기전하”와 “빼기전하”가 아닌 “양전하”와 “음전하”로 명명할 수 있었다. 어쩌면 이것이 동양철학과 과학의 연계성을 시사하는 첫 번째 힌트였을 것이다. 비슷한 만큼 차이도 있다. 자연은 쿼크로 이미 양전하(Up quark, +2/3)와 음전하(Down quark, -1/3)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섞어서 음과 양을 만드는 대신 중성자와 양성자를 만들었다. 이는 무거운 원소를 만드는 데 있어서 중성자가 꼭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무거운 원소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양성자 두 개가 모여야 하는데, 이들 사이에는 전기적 반발력이 작용하기 때문에 쉽지가 않다. 이를 중간에서 중성자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쿼크를 통해 매개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수소를 제외한 모든 무거운 원소는 원자핵에 중성자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쿼크를 이렇게 이용한 뒤, 자연은 양전하와 맞먹는 음전하를 가진 렙톤 전자를 새로이 준비했다. 그렇다면 쿼크와 렙톤을 음과 양으로 보면 어떨까? 지금까지 현대물리학자들이 알아낸 바에 의하면, 물질세계는 모두 쿼크와 렙톤 두 부류의 소립자로 이루어져 있다. 온 세상이 음과 양 둘의 조화로 이루어졌다는 음양론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자연에 존재하는 음양의 한 예로 생각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물질세계는 전체적으로 보면 음과 양이 섞여 새로운 화합체 원자를 만들고, 이 원자가 만물을 구성하고 있다. 노자가 이런 생각을 할 당시에는 물론 전하라는 것조차 알려지지 않았고, 양성자나 전자의 존재에 대해서는 더욱이 알 수가 없었다.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그가 물질계의 구성 원리를 저 간단한 구절로 설명한 것은 얼마나 대단한 통찰력인가! 이 사실을 최근에 와서야 제대로 알게 된 서양문명 속의 과학자들은 이런 노자의 통찰력에 대해 한번쯤 깊게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