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 집 부
自然의 가르침은 있는 일에 대한 實狀을 밝히는 일을 하고 있다.
사람들이 세상의 實狀을 아는 일은 왜 일생을 바쳐도 이루어 내지 못하는가 하는 의문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역사 속에서 석가모니는 일반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법(法)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다. 오늘날에 와서 이 말은 석가모니를 내세우고 있는 종교인 불교를 통해서 불법(佛法)이라는 말로 표현되기도 한다.
과연 이 불법이란 어떤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가에 대해 확인을 하면서 이러한 일을 있게 하는 세상의 일들을 설명하겠다.
불법이란 하나의 현상을 만들어 내는 공식을 말한다. 이 공식은 어떻게 해서 만들어지는가. 우리가 수학을 알기 전에 가장 먼저 숫자를 알아야 한다.
숫자를 알아야만 수학의 문제를 이해할 수 있고 풀 수가 있다. 숫자를 모르는 상태라면 수학의 문제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수학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문제에서 앞에 있는 문제와 뒤에 있는 문제가 공식에 의해서 존재하게 될 때 이 공식을 법(法)이라고 말한다.
오늘날까지 인간 사회에 수많은 문명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항상 수학의 공식이 적용되었고 큰 기여를 했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數學에서의 公式과 마찬가지로 現狀界에서 나타나고 있는 일(事)들을 法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의 法則에 의해서 이런 일(社)이 存在하게 된다는 意味로써 現狀界 自體를 法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이 法則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이 法則을 理解하기 위해서는 먼저 根源的인 問題를 理解해야 될 것이다.
그러면 根源的인 問題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世上의 일(事)을 있게 만드는 原因을 우리는 根源的인 問題라고 말한다.
世上에는 萬物이 所生하고 온갖 現狀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現狀의 根源은 무엇인가? 萬물의 根源은 무엇인가? 를 理解할 수 있어야만
'아! 이런 것이 法이구나!', '이것이 바로 佛法이구나!' 하고 理解가 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창조주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의 生覺만으로는,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 모든 生命體가 存在하게 되었으니 창조주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보편적으로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絶對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人間을 小宇宙라고 말들을 한다. 小宇宙라는 것은 人間 自體가 하나의 構造役學에 依해서
하나의 生命活動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몸 속에는 여러 器管을 갖고 있는데 이를 構造라고 한다. 이 器管들을 이용해서 사고(思考)를 일으키고 感情을 갖게 되고 움직이게 되는 일(事)들이 人間 自體 內에 있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육체를 소우주라고 말한다.
世上 自體도 알고 보면 하나의 構造役學에 依해서 짜여져 있다.
모든 것들은 똑같은 하나의 原則에 의해서 存在하고 있다. 이러한 原則에 의해서 宇宙도 존재하고
地球도 存在하고 人間도 存在하고 또 모든 現狀界도 存在하고 있는 것이다.
構造役學. 즉 構造의 活動에 依해서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한다. 이것은 世上에 힘을 存在하게 하고,
世上은 그 힘에 의해서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自動車가 하나의 動力에 의해서 굴러가는 것처럼
世上도 그 構造가 가지고 있는 活動에 의해서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
이 世上이 움직이는 동안에 거기에 있는 온갖 物質과 氣運이 混合되게 되면 거기에서는 또 다른 온갖
現狀들이 나타나게 된다. 이렇게 나타나는 現狀들을 자세히 觀察해보면 그 속에는 수학의 公式처럼 하나의 公式· 法則이 있는 것을 發見할 수 있다.
어떤 生命體가 活動하는 過程에서 다른 힘에 의해서 돌연변이를 일으키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도 그 속에 있는 法則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산모가 기형아를 낳았다면, 이것은 산모가 아이를 잉태하는 과정에서 생긴 현상일 수도 있고, 또는 사람으로 태어나서는 안될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남으로써 意識活動의 不足 卽 事物을 보는 理解의 能力이 뒤떨어지는 기형적인 정신박약자로 삶을 살게 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이 중에서 정신박약자를 보면 두 가지의 형태가 있다. 하나는 신체 기관에 이상이 있는 경우인데 이를 후천적인 정신박약자라 하고, 다른 하나는 신체 기관에 이상이 없는 경우인데 이를 선천적인 정신박약자라고 한다.
이 두 가지의 경우를 다시 설명하자면, 선천적이라고 하는 것은 自己 속에 있는 일(事)에 의해서 自己에게 나타나게 되는 것을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이고,
후천적이라고 하는 것은 自己가 태어나는 과정이나 태어나고 나서 自己의 身體 構造에 의해서 나타나게 된 것을 후천적인 과정에 의해서 있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바로 이 모든 것들이 法則이다.
불법(佛法)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가?
어떤 物質과 어떤 物質이 結合했을 때 거기에는 하나의 現狀이 存在하게 된다. 이 現狀을 보고 佛法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이 현상은 어떤 물질과 어떤 물질의 수치(數値)나 성질(性質)에 의해서 나타나게 되어 있으니 이를 佛法이라고 말한다.
佛法이란, 있는 것들이 가지고 있는 眞實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佛法에 대해 인간의 문명인 과학적 지식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들이 갖고 있는 과학적
지식으로는 인간 자체나 세상의 일을 있게 하는 일들에 대해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다.
사실 과학은 인간이 만들어 왔던 물질 문명 속에 있는 것 외에는 이해할 수 없다. 왜 이해하지 못하는가? 그것은 인간 자체가 가지고 있는 意識의 限界 때문이다.
우리들이 어떤 因緣을 통해서 좋은 것을 얻게 되었다고 했을 때, 그것도 하나의 法이다.
하나의 過程 속에 있던 일(事)로 因해서 어떤 일(事)이 나타나게 되었다면 그것을 法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법에 대해서는 세상에서 역사상 석가모니가 가장 많이 밝혔기 때문에 불법(부처의 법)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佛法이라고 한다 해서 그것이 석가모니 부처의 전용어이거나 특정의 종교계에서 사용하는 전문용어가 아니라는 점이다.
佛法이란 世上의 일(事)을 있게 하는 現狀自體를 두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法을 설명할 때, '自然的인 하나의 法則에 의해서 存在한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부처가 하나의 現狀에 대해 가르친 것은 佛法이라고 한 것이고,
그 불교를 믿지 않는 사람이 자연계를 설명할 때는,
世上은 하나의 法則에 의해서 存在한다. 어떤 물질이 어떤 물질과 어떤 因緣에 의해서 結合되어서 새로운 現狀이 있게 된 것은 하나의 法則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설명할 수가 있다.
우리 自身을 어떻게 하면 더 좋은 自己로 만들어 낼 수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 알아보자.
먼저 의식(意識)에 대하여 잘 알아야 하겠다.
한국 정부에서 내세우기를 意識改革運動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말처럼 잘 안 되는 것이 바로 이
意識의 問題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이 意識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意識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變化하는가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다.
人間은 이 世上의 副産物이다.
인간들은 세상에 살면서 항상 自己의 영향을 나타내려고 한다.
예를 들자면 바닷가에 가서 고등어를 잡는 것도 인간의 영향을 나타내는 것이고,
산을 허물어 버리는 일도 거기에 인간의 영향을 나타내는 것이다.
한번 존재하게 된 일은 쉽사리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인 활동을 통해서
自己에게 영향을 미치려고 한다.
우리 自身 속에 存在하게 된 것들은 우리 自身과 마찬가지로 各各 하나의 自己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
自己라는 生命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人間의 意識은 어떤 일(事)을 만나서 그 영향을 받게 되면 거기에서 새로운 意識이 만들어진다.
인간은 수천만 개의 있는 일(事)에 의해서 하나의 意識體를 가지고 있는데 이 意識 속에는
또 수천만 개의 生命體들이 存在하고 있다.
이러한 生命體들은 어떤 일(事)과 어떤 因緣이 있을 때마다 태어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意識 속에는 수천만 개의 生命體들의 活動에 依해서 새로운 意識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生命體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自己와 自己의 因緣 속에 있던 일(事)로 因해서 自己의 意識 속에 들어와 있는 일(事)을 말한다.
이것들은 人間의 生命 活動에서 계속적으로 自己의 영향을 행사하는 것이다.
알고 보면 모든 法則은 수학의 公式처럼 되어 있다.
우리들이 알아야 하는 것은, 世上 일(事)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世上에 어떤 問題들이 존재하고 있는가를 아는 일이다. 그리고 그런 問題들이 어떠한 過程에 의해서 풀어지고 만들어지는가 하는 것을 아는 일이다.
우리는 自己에 依해서 自己를 統制할 수 있다. 自己가 가지고 있는 意識 속에 있는 일(事)에 의해서
모든 것을 判斷하고 모든 것을 스스로 信賴하게 된다는 것이다.
세상의 어느 곳에서도 이러한 법칙의 세계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지 않다.
단지 과학자들의 세계에서만 하나의 문제에 공식을 활용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자연계의 법칙을 적용하고 있다. 그래서 색깔을 만들어내고 물질을 만들어내고 또 물질이 갖는
성질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人間은 自然界를 通해서 自己의 意識을 더 좋아지게 하는 법을 얼마든지 배울 수 있지만
누구든지 自己 속에 있는 것(事)들이 끊임없이 活動을 하기 때문에 眞實을 받아들이기가 매우 어렵다.
그래서 깨닫기 전에는 眞實을 받아들이기가 어렵고, 깨닫게 되면 거짓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의 역사 속에 있었던 성인들의 말을 되새기지 않을 수 없다.
노자는 말하기를,
"하인(下人)은 진리를 들으면 비웃거나 성을 내고,
중인(中人)은 반신반의하고, 상인(上人)은 기뻐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上人이 과연 어디에 있는지 만나기가 어렵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이 그를 이상하게 보고 야유를 하자 말하기를,
"너 자신을 알라."고 했다.
사람들 自身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 알라고 충고한 것이다.
예수는 사람들이 眞理에 눈멀어 있는 것을 보고 가르치려고 하니,
"아버지가 죽었는데 장례를 치르고 따라가겠다."해서
"죽은 자는 죽은 자한테 맡겨라."고 말했다.
그래서 살 자는 산 자를 따라가야 된다는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그리고 부처는 이런 말을 남겼다.
"일반 사람들은 눈뜬장님과 같다."
사람들은 있는 일(事)을 보아도, 있는 일(事)이 왜 그렇게 있게 되는지를 아무도 모르니까
눈 뜬 장님이라고 말한 것이다.
사람들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공부는 잘 외운다. 국어, 영어, 수학, 역사...... 이렇게 많은 내용들을 밤낮으로 읽고 머리 속에 집어 넣는다.
그런데 왜 이 簡單한 法則 속에 있는 일(事)들은 아무도 들으려 하지도 않거니와
듣고도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는가?
사람은 自己 속에 있는 것(事)에 依해서 調從을 받고 그 衝動에 依해서 움직이게 되는데
自己 속에 없는 것이 나타나면 누구든지 그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인간의 세계에 진리적인 가르침이 전해지지 않는 것은 사람들이 業을 지고 있기 때문이며,
진리를 버리고 진리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흔히 말하기를, 많은 종교학자나 철학자들이 연구하고 있지 않겠느냐고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독사에게 물을 주면 독이 되고, 사슴이 물을 먹으면 녹용이 된다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큰 業을 가진 사람이 깨닫지 못한 채 좋은 공부를 하게 되면 그것은 독으로 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自己 속에서 變質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물이 왜 독으로 변하는가? 독사가 먹었기 때문에 독사 몸 속의 器管을 통해서 물이 독으로 변한 것이다.
왜 물이 녹용이 되는가? 사슴이 먹으니까 사슴 몸 속의 器管에서 變해 녹용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똑 같은 것을 누가 가졌느냐에 따라서 그것은 보물이 될 수도 있고, 흉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왜 사람들이 좋은 것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운가? 좋은 일(事)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좋은 일(事)을 받아들이는 게 힘들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강조하고 가장 많이 언급하는 내용은 사랑과 진리이다.
'사랑' 그리고 '진리'
眞理란 現狀界를 있게 하는 法則을 말하는 것이고, 사랑이라는 것은 어떤 對相에 대한 祝福을 말하는 것이다.
유럽의 헝가리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철학자인 보이드를 만났을 때,
"너는 사랑을 어떻게 배웠으며 어떻게 가르쳐 왔느냐?"라고 묻자
보이드는 "사랑은 말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이 철학자는 사랑에 대해서 모른다는 말이다.
自然의 가르침은 世上 사람들을 위해서 항상 사랑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 사랑은 항상 사람들에게 양심(良心)과 정의(正義)를 알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良心은 마음을 밝히는 길이고, 正義는 세상을 밝히는 길이기 때문에 이런 일(事)을 하는 것이다.
밝은 마음을 가지고 밝은 세상에 산다면 인간의 삶에 이보다 더 큰 祝福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래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일하지 않는 사람에게 빵을 주고 돈을 주고 먹여 살리는 것은 큰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과신 행위일 뿐이다. 자기가 동정심이 많고 인간애가 많다는 것을 과신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필요에 따라 그렇게 하다가 경우가 달라지면 하지 않는다.
世上에서 살아가는 동안 우리를 가장 많이 속이고, 많은 피해를 입히는 대상을 분류해 보면
그것은 위선자들이다. 그들은 항상 착한 사람처럼 미소를 짓고, 항상 정직한 것처럼 말하지만
이들의 裏面을 살펴보면 너무나 사악하고 무서운 내막이 숨겨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랑이라는 것은 상대나 대상에게 축복이 되었을 때 사랑이라고 한다.
그리고 축복은 어디에서 보아야 하는가? 結果에서 보아야 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좋은 結果를 얻지 못했을 때는 '실패한 사랑'이며,
아무리 노력했지만 잘못된 현실을 있게 했을 때는 '잘못된 사랑'이다.
세상에서는 실패한 사랑이나 잘못된 사랑은 많아도 眞情한 사랑은 보기가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어둡고, 그 세상에서는 항상 시비가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좋은 사랑에 대한 가르침이 없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自然의 가르침이 필요한 것이다.
아무리 세계적인 대학교수나 석학일지라도 自然의 가르침 속에 있는 眞實과는 比較조차 할 수 없다.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읽거나 듣거나 보아야 할 어떠한 필요성도 없는 것이다.
自然의 가르침에서 밝히고 있는 것은 世上에서 最高의 智慧이다.
世上의 있는 일(事)을 설명하는 내용을 읽다 보면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부분이 없지 않겠지만,
恒常 하나의 原則에 따라서 말하고 있으며, 이 原則이란 수학의 公式과 같은 것으로서 하나의 公式에
依해서 世上의 있는 일(事)을 그대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公式을 빼거나 무시해버리면 그것은 이상(理想)이 된다. 理想이란 現實에서 이룰 수 없는 것을 말한다.
人間의 꿈 속에 있는 것은 理想이고, 現實에서 볼 수 있는 것은 眞實이다.
現實에서 眞實을 밝히는 것은 現實 哲學이다.
그런데 오늘날 세상에서 하고 있는 것은 모두 理想的인 哲學을 하고 있다.
이상철학에서 이상적인 걸 가르칠 때는 하나의 공식이라는 것이 필요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진실이라는 것은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상철학에서는 진실성 확인이라는 것이 필요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自己도 그것이 이루어질지 않을지 모르는 상태에서 하나의 生覺과 理論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어차피 公式은 필요없는 것이고, 만약 공식을 알게 된다면 이상적인 말을 하거나 사람들 앞에 나서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眞理는 精神的인 바탕이 좋고, 精神的으로 뛰어난 사람이어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있는 일(事)을 보고, 있는 일(事)에 대한 結果를 말하는 것을 眞理的인 가르침이라 하고
眞理的인 解答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있는 일(事)을 보지 못한다면 이러한 공식·법칙을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숫자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숫자를 알고 그 공식만 알면 누구든지 그 숫자가
갖고 있는 問題를 알아볼 수 있다. 그리고 公式을 이해하면 누구든지 이 問題는 풀어낼 수 있게 된다.
힘의 論理에 의해서는 하나의 原則을 벗어나도 얼마든지 存在할 수 있다. 힘의 論理라는 것은
어떤 社會的 環境 또는 그 環境을 支配하는 쪽에서 거짓도 진짜처럼 만들어 낼 수가 있다.
原則을 벗어나서 존재하는 일(事)들은 항상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 문제는 경우에 따라서
사람들과 사회에 엄청난 피해를 안겨다 줄 수도 있다.
世上이라는 것은 현실을 알게 되면 하나의 公式만으로 미래와 과거와 현재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가장 중요시해야 하는 것은 無知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現實 속에서는 現實을 알아야 하고 現實을 배워야 한다.
이 現實 속에 있는 일(事)들을 배우고 깨닫게 되면 自己 속의 모든 問題를 푸는 길을 알게 되는 것이다.
神은 神의 世界에 살게 하고, 人間은 人間의 世界에 살아야 한다.
예로부터 이런 말이 있다.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있으면 되는 일이 없다."
죽은 자가 산 자를 자꾸 괴롭히니까 산 자는 괴로움에 빠지게 되는데
왜 사람들은 祭祀를 지내거나 죽은 자들을 請하는지 알 수 없다.
無知하고 愛着이 너무 커서 輪廻하지 못한 靈魂들이 人間에게 붙어서 온갖 苦痛을 안겨주고
그 鬼神도 고통받는데, 이 無知한 鬼神이 自己 祖上이라는 보장은 어디에 있는가?
죽은 靈魂이 祖上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한들 人間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그것을
自己의 祖上神이라고 믿을 것인가? 오히려 그것은 自器 祖上에 대한 모욕이 될 뿐이다.
한 번 神(죽은 靈魂)과 接觸하게 되면 그 사람은 恒常 그 神의 調從을 받게 된다.
그렇게 되면 健康할 수 없고, 家庭이 和睦할 수 없고, 家庭이 平和스러울 수 없으니
結局 自己가 幸福해 질 수 없는 것이다.
意識은 내 속에 있는 수천만 개의 일(事)들이 쌓이고 쌓여서 하나의 靈體를 形成하고 있다.
이 靈體는 속에서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일(事)들을 계속하게 된다.
卽 같은 性質은 받아들이고 다른 性質은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氣運이 어두우면 밝은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氣運이 밝으면 어두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한다.
나쁜 힘이 강하면 좋은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좋은 힘이 강하면 나쁜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어둠은 빛이 있는 곳으로 오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빛에게 부딪쳐서 깨지면 죽기 때문이다.
빛은 어둠이 있는 곳으로 가려고 하지 않는다. 어둠에 갇히면 빛이 죽게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人間의 意識 속에도 같은 性質이 存在하는 것이다.
모든 길은 現實에 있다. 世上에는 어떠한 것(事)도 다 存在한다.
다만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은 것은 우리가 찾아내지 못했다는 것뿐이다.
숫자를 알면 이 숫자를 가지고 수억만 개의 문제를 만들어도 다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다. 眞理도 이와 같다.
있는 일(事)을 가져다가 다른 것(事)과 結合을 하면 새로운 現狀이 나타나고, 또 어떤 物質을 만들어 보면
또 다른 現狀이 나타나고, 이러다 보면 사람들은 늙어서 죽게 되는 것이다.
世上의 작은 一部分만 알고 죽게 되더라도, 世上의 일(事)을 있게 하는 일(事)의 그 一部分만이라도 알고
죽는다면, 죽어서 불쌍한 鬼神이 되어서 人間 世上을 떠돌아다니는 고생은 하지 않는다.
輪廻가 되거나 永生이나 最高 次元의 世界로 가게 되는 것이다.
왜 이 世上에는 온갖 現狀들이 存在하는가?
이것은 이 世上에는 法이 存在하기 때문이다. 이 法 속에는 온갖 現狀을 만들어내는 原因이 있다.
바로 이것이 因緣이다. 因緣에 依해서 모든 것은 存在해 갈 수 있다.
누구나 스스로 배우고 깨달아서 좋은 因緣을 지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未來를 끝없이 밝은 날로 約束하고,
우리 自身에 의해서 끝없는 未來를 存在하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世上의 일(事)을 理解하는 것이 必要한 것이며,
世上의 일(事)을 理解함으로써 좋은 因緣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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