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깨달음 전하는 것이 선불교 정신
전등사(傳燈寺)라는 사찰도 있고, ‘전등록(傳燈錄)’이란 책도 유명합니다. ‘전등’이란 말처럼 선불교의 정신을 잘 보여주는 개념도 없을 겁니다. ‘전등’은 ‘전달한다’는 의미를 가진 전(傳)이라는 글자와 ‘등불’을 뜻하는 등(燈)이란 글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등불을 전달한다는 것입니다. 언어나 문자가 아니라 깨달은 마음을 전달해주는 것이 선불교의 정신입니다. 결국 이심전심(以心傳心)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전등’이라고 할 수 있지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깨달음이 켜지지 않은 등잔에 불을 붙이는 것처럼 외부의 힘으로 인위적으로 이루지는 것은 아닙니다. 깨달음을 얻은 스승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역할은 제자가 스스로 깨달음의 등불을 발화시키도록 격려하고 자극하는 것뿐입니다.
어느 사이엔가 제자의 마음속에도 자신과 타인을 모두 비추는 환한 등불이 켜지게 될 겁니다. 아마 마음이 마음으로 전해지는 바로 이 순간만큼 아름다운 순간도 없을 것 같습니다. 아무리 스스로 등불을 켠 것이라고 하더라도, 좋은 스승을 만나지 못했다면 깨달음을 얻지 못했거나 얻었다고 하더라도 아주 늦게 얻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만큼 미리 깨달은 사람, 그러니까 선각자(先覺者)의 역할은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선불교에서는 깨달음이 깨달음으로 이어지는 계보는 무척 중요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깨달음을 얻은 어느 선사(禪師)를 이해하기 위해 학자들이 그가 어느 스승 밑에서 공부했는지 확인해보려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입니다. ‘무문관(無門關)’을 편찬했던 무문 스님은 그럼 어떤 계보에 속하는 스님일까요.
무문 스님의 스승, 그 스승의 스승, 또 그 스승의 스승, 이런 식으로 쭉 따라 올라가다보면, 우리는 선불교의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카리스마를 뿜어냈던 스님 한 분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임제(臨濟, ?~867) 스님입니다. 그렇습니다. 무문 스님은 임제의 정신을 잇고 있는 선사였던 것입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무문관’의 48개 관문에는 임제 스님을 눈을 씻고 찾아보려고 해도 흔적도 없다는 점입니다. 무슨 이유에서일까요. 무문 스님은 위대한 스승 임제를 부정했던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무문관’을 읽다보면 사정은 그 반대라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임제가 너무나 위대했기에 무문 스님은 ‘무문관’이 만들어 놓은 48개의 관문 중 어느 하나를 지키는 역할을 부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공자(孔子, BC551~BC479)의 말을 빌리자면 “어떻게 닭을 잡는 데 소를 잡는 칼을 쓸 수 있겠습니까(割鷄焉用牛刀)?”
2. 해탈은 삶의 주인공이 되는 것
사자처럼 단호하고 맹렬했던 임제 스님의 정신은 지금도 ‘임제어록(臨濟語錄)’에 남아 전해지고 있습니다. 임제의 속내를 가장 분명히 보여주는 것은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이란 그의 사자후 아닐까 싶습니다.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된다면, 서 있는 곳마다 모두 참되다”는 뜻입니다. 사실 이 여덟 글자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은 임제의 도전적인 가르침을 요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이건 밖이건 만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바로 죽여 버려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척을 만나면 친척을 죽여라. 그렇게 한다면 비로소 해탈할 수 있을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해탈한다는 것, 그래서 부처가 된다는 것은 일체의 외적인 권위에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당당한 주인공이 된다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임제 스님도 말했던 겁니다. 부처나 조사를 염두에 두고 그들을 존경하고 있다면 혹은 부모나 친척을 염두에 두고 그들을 잊지 못한다면, 수행자는 아직 성불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부모나 친척이 수행자에게 있어서는 과거라면, 부처나 조사는 그에게 있어 미래라는 사실입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수행자는 미래에 부처나 조사가 되려는 사람이자 동시에 출가하기 전 과거에는 누군가의 아들이나 조카였을 테니 말입니다. 결국 미래를 끊고 과거를 끊어야 해탈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임제 스님이 말하고자 했던 겁니다. 미래와 과거를 끊었을 때, 우리는 어디에 있게 될까요. 당연히 그것은 현재라는 시제일 겁니다. 이제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된다면, 서 있는 곳마다 모두 참되다”라고 말한 임제 스님의 속내가 분명해지지 않나요.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된다는 것은 현재의 삶에서 주인이 된다는 것을, 그리고 서 있는 곳마다 참되다는 것은 현재의 삶에서 주인이 되면 자신 앞에 펼쳐져 있는 모든 것과 허위가 아닌 있는 그대로 관계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출발했던 곳과 도달해야 할 곳, 과거와 미래를 모두 끊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현재를 영위하는 주인이 될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무문관’의 15번째 관문에서 운문(雲門, 864~949) 스님이 동산(洞山, 910~990) 스님에게 몽둥이질을 하려고 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이 밥통아! 강서로 그리고 호남으로 그런 식으로 돌아다녔던 것이냐!” 어느 곳에서나 삶의 주인이 된다면, 바로 그것이 해탈이고 성불입니다. 그런데 동산 스님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닌 겁니다. 그러니 불호령을 내릴 수밖에요.
3. 제대로 된 삶은 목적에 집착 안해
여행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가짜 여행이고, 다른 하나는 진짜 여행입니다. 눈치가 빠르신 분은 금방 무슨 말인지 짐작이 가실 겁니다. 가짜 여행은 출발지도 있고 목적지도 있습니다. 그래서 가짜 여행을 하는 사람은 여행 도중에서도 항상 출발지와 목적지에 집착하느라 여행 자체를 즐길 수가 없을 겁니다. 서둘러 목적지에 도착해야 하고, 그리고 서둘러 출발지로 되돌아야만 하니까 말입니다. 당연히 여행 도중에서 만나게 되는 코를 유혹하는 수많은 꽃들, 뺨을 애무하는 바람들, 실개천의 속삭임들, 지나가는 마을에 열리는 로맨틱한 축제조차도 그는 향유할 수도 없을 겁니다. 아니 그는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이런 사건과 사물들을 저주하기까지 할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목적지에 가는 데 장애가 되는 것들이기 때문이지요. 결국 그에게 있어 여행의 주인공은 그 자신이라기보다는 출발지와 도착지라고 해야 할 겁니다.
장자(莊子, BC369~BC289?)의 ‘소요유(逍遙遊)’와 같은 진짜 여행은 출발지와 목적지에 집착하지 않는 여행입니다. 진짜 여행을 하는 사람은 항상 여행 도중에 자유롭게 행동합니다. 멋진 곳이면 며칠이고 머물지만, 그렇지 않은 곳이면 과감하게 떠납니다. 간혹 아름다운 새를 쫓다가 다른 곳으로 가기도 일쑤입니다. 그는 출발지와 목적지의 노예가 아니라, 매번 출발지와 목적지를 만드는 주인이기 때문이지요. 알튀세르(Louis Althusser, 1918~1990)라면 ‘유물론 철학자의 초상(Portrait du philosophe matérialiste)’에서 이런 사람을 ‘유물론 철학자’라고 불렀을 겁니다. “그는 아주 늙었을 수도 있고, 아주 젊었을 수도 있다. 핵심적인 것은 그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것, 그리고 어디론가 가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언제나 그는 미국 서부영화에서 그런 것처럼 달리는 기차를 탄다. 자기가 어디서 와서(기원), 어디로 가는지(목적) 전혀 모르면서.”
인간의 삶은 여행에 비유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해 인간의 삶 자체가 바로 여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번밖에 없는 소중한 삶을 제대로 영위하려면 우리는 기원과 목적, 과거와 미래, 출발지와 목적지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출발지와 목적지를 염두에 두지 않으니, 우리가 내딛는 걸음걸음마다 자연스럽고 여유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임제 스님의 말처럼 모든 것이 참될 수밖에 없지요. 당연히 만나는 것마다 따뜻한 시선으로 모두 품어줄 수 있을 겁니다.
반면 목적지로 가느라, 혹은 출발지로 되돌아오느라 분주한 사람에게 어떻게 자신을 돌보고 타인을 돌보는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의 자비로운 마음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무문관’의 15번째 관문을 통과하면서 우리의 가슴에 임제의 가르침을 한 글자 한 글자 깊게 아로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수(隨)’, ‘곳 처(處)’, ‘될 작(作)’, ‘주인 주(主)’, ‘설 입(立)’, ‘곳 처(處)’, ‘모두 개(皆)’, ‘참될 진(眞)’.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
강신주 contingent@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