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들의 여행 - 마이클 뉴턴
(원제 Journey of souls-Michael newton)
정말 오랜만에 만점을 줄 수 있는 책이 나왔다. 마이클 뉴턴의 <영혼들의 여행> 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 책은 내 인생을 뒤바꿀 만한 힘을 지닌 책 3위 정도에 랭크될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이 책은 대학교 2학년 시절 수강했던 '환경과문학' 수업의 강사 선생님께서 소개해주어서 항상 읽어보려고 벼르던 책이었다.
그러다가 작년에 이 책을 구입해서 서가에 꽂아 두었더랬는데 이제서야 읽게 된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신비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마치 내가 지금 이 책을 읽기에 딱 알맞은 시기에 와 있고, 이 책을 지금 읽기 위해 그 동안 다른 독서체험들을 해왔다는 느낌이다.
나는 그 동안 人間과 世界의 本質, 人生의 意味 같은 것을 개인적으로 열심히 탐구해왔었다. 유교, 도교, 불교,
기독교, 유대교, 힌두교, 자이나교,이슬람교, 거북섬 원주민 종교 등등 세계의 모든 종교현상이나 문화현상 등을 탐구하며 지구의 여러 思想의 정수들과 만났었다.그러면서 사실 이 지구의 모든 종교가 궁극적으로는 어떤 단일한 세계를 바라보고 있으며, 매우 유사한 가르침을 전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들 종교들은 어떤 가느다란 실로 이어져 있는 것이 틀림없는데, 그 실이 무엇인지 모호했다. 그 모호한 실의
실체에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해준 것이 바로 이 <영혼들의 여행>이다. <영혼들의 여행>은 지구상의 모든
宗敎的, 哲學的 문제들을 투명한 실로 엮어주고 있다.
우리 모두가 궁금해하는 죽음 以後의 세계는 어떤모습인가, 그리고 인간은 왜 지구에 태어나는 것인가 하는 의문들을 <영혼들의 여행>은 단호하고 분명하게, 그리고 감동적으로 풀어간다. 마이클 뉴턴은 최면치료사로 전생퇴행 체험을 통해 피험자들이 새로운 존재로 幻生을 하기 以前의 세계 卽,靈魂들의 世界에 대한 수 많은 진술을 듣게 된다. 처음에는 그들이 지어내는 것이 아닐까도 생각했지만, 수 만 명의 서로 다른 사상과 문화를 지닌 사람들이 거의 同一한 表現으로 묘사해내는 '靈魂들의 世界'는 너무나 具體的이고 明白히 實在하는 世界였다.
여기까지 이야기하면 많은 사람들은 허무맹랑한 소리쯤으로 여길지도 모르겠다. 신흥종교의 하나가 아닐까 라고 냉소적인 표정을 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저자인 마이클 뉴턴과 나는 결코 종교적이거나 맹목적인 사람이 아니다. 우리 둘은 모두 종교 보다는 과학을 신뢰하고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판단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성향의 사람이다.
실제로 나는 지구의 종교들에게서 추출한 여러정보들을 科學的으로 解釋해보기 위해 여러 관련 분야를 공부했다. 최신의 腦科學부터 다윈의 進化論까지, 그리고 뉴턴역학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量子論, 최근의 超끈 이론에 이르는 생물학, 물리학, 천문학의 이론들을 살펴본 結果 그 모든 人間의 生覺들이 몇 천 년전 아즈텍인들이나 노자, 플라톤 등의 生覺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世界가 아주 작은 原子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은 이미 紀元前에도 있었다. 다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과 이용하는 방법이 달랐을 뿐이다. 최신의 量子論에서는 아주 微細한 粒子는 두 개 이상의 空間에 共存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빛이 波(wave)의 성질과 粒子性을 함께 지니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腦科學에서는 인간의 腦에 있는 情報와 感情의 트렌지스터 '변연계'를 주목한다. 사람의 눈동자 저 깊은 곳에 존재하는 변연계는 世界와 對相으로부터 傳해지는 電氣的 信號를 感知하여 腦에 명령을 내리고, 감정을 일으키는 역할을 담당한다.
卽, 人間의 마음이란 단순한 化學的 物質의 移動으로 機械的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外部의 어떤 信號에 의해서 즉 關係에 의해서만 發生한다는 것이다.
<영혼들의 여행>의 저자 뉴턴도 그 이름답게(?) 자신이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영혼들의 세계'에 대해 科學的 解釋을 시도한다. 뉴턴의 임상연구에 의하면사람이 죽으면 곧 유체이탈이 일어나 靈魂들은 自己들이
살던 原來의 世界로 돌아간다. 그 世界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저승이라든가, 천국과는 다른 곳이다.
靈魂들은 아주 微細한 빛의 알갱이 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며 몸을 떠난 靈魂은 잠시 방황하다 곧,自身이 靈魂들의 世界로부터 왔음을 記憶하고 故鄕으로 歸鄕을 한다. 이 故鄕은 긴 어둠의 터널을 지난 곳에 있으며 환한 빛으로 둘러싸인 世界이다. 그곳은 일정한 모습이 없고 靈魂이 想像하는대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곳에 가면 原來 함께 그곳에 살고 있던 고향의 친구들이 환한 웃음으로 靈魂을 반겨준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靈魂은 自身이 죽었다는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고, 그 곳에서 前生에 함께 했던 친구나 가족, 배우자의 모습도 모두 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비로소 自己가 地球에 무언가를배우러 自身의 選擇에 의해 잠시 다녀왔다는 것을 다시 企憶하게 된다.
靈魂들의 世界는 일종의 학교 같은 곳이다.'학교'라는 단어를 보자마자 두드러기를 일으킬 분도 많을 것 같다. 그러나 이 靈魂들의 학교는 地球의 학교와는 전혀 다른곳이다. 이곳은 학교 건물도 없고, 교장선생님 같은 관료체계도 없으며, 무엇보다 수학이나 영어 같은 것을 배울 필요가 전혀 없는곳이다. 말하자면 그곳은 넓은 들판에 아름다운 꽃들이 방긋방긋 피어 있고 깔깔거리며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생활하는 곳이다.
그들은 그렇다면 어떤 工夫를 하는가? 그들의 科目은 사랑, 容恕, 勇氣, 賢明함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교과서는 바로 人生이다. 그곳에는 커다란 도서관이 있고, 거기에는 地球는 물론 宇宙 모든 生命의 世界에서 存在했던 人生에 관한 책들이 가득하다. 靈魂들은 친구들과 놀다가 그곳에 가서 人生의 책들을 들여다보며 自己가 前生에 살았던 人生에서 어떤 부분이 不足했는지를 다시 되새겨 보게 된다. 그리고 또 다른 生으로의 幻生을 준비하게 된다.
靈魂들은 20명 정도가 모여 일정한 그룹을 이루고 있으며 그 그룹은 또 5명 정도의 소단위 그룹으로 나뉘어진다. 가장 작은 단위의 5명은 가장 친한 靈魂들로 그들은 서로 긴밀한 유대감을 지니고 있으며, 친구가 地球로부터 돌아오면 제일 먼저 마중나와 반겨준다. 그리고 대개는 함께 같은 세계에 幻生을 해서 서로 도우며 살아간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소울 메이트'는 바로 이 그룹의 멤버인 경우이다.(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한다)
靈魂들은 마음의 레벨을 가지고 있어서 레벨에 따라 저마다 다른 빛깔로 빛난다. 가장 成熟度가 낮은 어린 靈魂은 새하얀 빛을 발하고, 점점 成熟해 질수록 붉은빛, 초록빛, 푸른빛을 거쳐 圓熟한 경지에 다다르면 보랏빛이 된다고 한다. 보랏빛이 된 靈魂은 거의 더 以上은 地球나 다른 世界로 幻生을 하지 않기 때문에 마이클 뉴턴도 實際로 그런 靈魂을 지닌 사람은 거의 만나보지 못했다고 한다.
갓 태어난 어린 靈魂들은 地球나 다른 世界로 幻生해서 人生을 經驗함으로써 成熟해지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人生에서 맞닥뜨리는 問題 狀況과 苦痛을 賢明하게 對處하고 忍耐하는 것을 通해 靈魂의 成熟을 이룬다. 그러나 어린 靈魂들은 그런 問題를 잘 견뎌내지 못해 쉽게 自殺로 人生을 포기하거나 잘못된 人生을 살게 되는경우가 많다. 그런 靈魂들은 地球에서의 生을 끝난 뒤 靈魂들의 世界로 돌아가면 친구들의 놀림을 받는다. 그러나 이 놀림도 우리들이 생각하는 왕따 같은 분위기는 전혀 아니고 서로 끈끈한 유대감을 지닌 채로 진심어린 격려와 위로의 말을 동반한 따뜻한 느낌의 장난이다.
靈魂이 地球로 오는 方法은 우리의 一般的인 常識과는 좀 다르다. 靈魂이라는 몸체가 있어서 그 物質이 地球로 와서 우리 몸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靈魂이 幻生을 할 準備가 되면 幻生을 하는 집으로 보내져 다시 어둠의 터널을 지나 갓 태어나려는 아기에게로 가는데 그 경우에도 靈魂은 여전히 靈魂들의 世界에서 存在한다. 많은
피험자들은 그 모습을 잠을 잔다는 형식으로 표현했다. 靈魂이 잠자는 동안 꾸는 꿈이 곧 우리의 人生인 것이다. 문득 장자가 생각나지 않는가?
靈魂이 잠자는 동안 우리는 人生을 살고, 우리가 잠자는 동안 靈魂은 잠시 깨어나서 靈魂의 世界를 돌아다닌다. 어떻게 이런 일이 可能하단 말인가? 量子論에 의하면 微細한 粒子는 두 개 이상의 空間에 共存할 수 있다. 자
여기에 중간에 칸막이가 설치된 상자가 하나있다. 뚜껑을 열기 前에는 A칸과 B칸에 모두 하나의 똑같은 구름이 共存하고 있다. 그러나 진짜 그런지 보려고 우리가 뚜껑을 열어보는 瞬間 구름은 A칸이나 B칸 둘 중의 한 곳에만 存在하게 된다. 왜 그럴까? 왜 그런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그것이 微細粒子의 屬性인 것을 認定할 수밖에.
靈魂은 빛의 알갱이라고 말한 바 있다. 靈魂의 世界와 地球 두개의 空間이 있다. 存在는 두 世界에 共存하고
있다. 이 瞬間 우리가 靈魂을 보려고 할 때는 地球의 몸이 사라지고, 地球의 몸을 보려고 하면 靈魂이 사라지는 것이다. 卽, 우리는 둘 중의 하나 밖에 볼 수 없다. 인도의 명상가들은 이런 것을 늘 경험하며 산다.
소위 유체이탈이라고 불리는 現狀으로 自身의 本質에 다가가 微細한 靈魂의 빛 알갱이를 觀察하려고 集中을
하면 自身은 地球의 몸의 存在가 아닌 몸을 벗어난 靈魂의 存在로 存在하게 된다. 그때는 自身의 靈魂을 制禦할 수는 있지만, 自身의 몸은 더 이상 움직이게 할 수 없다.
양자론과의 이 관계는 내가 생각해낸 것인데 아직은 모순점이 많이 있는 게 사실이다. 좀더 연구를 해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조금 엉성함에도 불구하고 양자론에 의해 靈魂이 두 세계에 共存할 수 있다는 것은 충분히 입증가능하다.
靈魂은 이런 方式으로 幻生에 幻生을 거듭하며 成長해 간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은 아직 명확하게는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다만 靈魂들은 영혼들의 세계 가장자리(靈魂들의 世界는 圓形이다. 圓 둘레의 가장자리를 지칭)에 태어나서 어떤 그 世界의 中心 方向으로 가려는 屬性이 있다. 그 方向에는 이른 바 우리가 創造主, 造物主라고 부르는 存在가 있다. 그러나 이것도 明確한 表現은 아니다.
靈魂들의 말에 의하면 이 中心에 있는 무엇은 人格的인 次元의 무엇이아니다. 따라서 나는 이 무엇을 거북섬 원주민의 표현을 빌려 '偉大한 神秘'로 指稱하도록 하겠다. '위대한 신비'는 사실 空間的으로 中央에 存在하는 것도 아니다. '위대한 신비'는 靈魂들의 世界 自體이기도 하다. '위대한 신비'는 따스한 빛의 커튼으로 靈魂들의 世界를 감싸고 있다. 그렇다면 '위대한 신비'는 모든 곳에 存在하는 것과도 같다. 이것은 빛이 波動의 性質을 가짐과
同時에 粒子로도 存在한다는 量子論의 이론으로 설명 가능할 것이다.
量子論에 의하면 빛을 波動로서 관찰할 때는 빛이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있지만,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다. 反對로 粒子로서 관찰할 때는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있지만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위대한 신비'가 있는 곳을 中央으로 설정한다면 '위대한 신비'가 어디로 向하고 있는지는 모르게 된다.
그러나 '偉大한 神秘'는 恒常 움직이고 靈魂들을 보듬어 주며 影響을 미치고 있다. 그래서 '위대한 신비' 가 모든 方向으로 움직이는 것을 관찰하면 '위대한 신비'가 과연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게 된다. 한 곳에 존재하기도 하고 모든 곳에 있기도 한것. 그것이 '위대한신비'가 아닐까. 사람들이 神은 하늘나라에 있다고 믿으면서 同時에 우리들 마음 속에 모두 있다고도 믿는것처럼. 이것을 모순이라고 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事實은 매우 科學的인
生覺일 수도 있는 것이다.
靈魂은 成長하여 푸른빛이나 보랏빛을 발하는 높은 레벨에 이르면 創造하는 技術을 배운다고 한다. 에너지를 모아 宇宙에 存在하는 元素들을 서로 結合시킴으로써 바위나 씨앗 같은 것을 만드는 훈련을 한다는 것이다. 아주 높은 레벨의 靈魂은 '위대한 신비'를 도와 지금도 宇宙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을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아주 높은 레벨의 靈魂들의 진술이 필요한데 그들은 더 이상 지구에 幻生하지 않으므로, 創造에 관한 더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西洋은 끊임없이 存在를 몸과 靈魂으로 二元論的으로 나누고 不變하는 靈魂에 대한 探究를 계속해온 反面
東洋은 存在를 一元論的으로 파악하고 몸과 精神(靈魂)은 서로 分離할 수 없는 有機的인 하나의 시스템이라고 보아왔다. 동양학자는 서양을 까고, 서양학자는 동양을 까지만 나는 이 둘이 모두 맞다고 생각한다.
도망가기 쉬운 兩非論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나 나의 생각에는 동서양의 생각을 모두 合칠 때 비로소 完全한
存在에 대한 결론이 나올 수 있다고 본다. 卽, 人間은 地球라는 空間에 限해서는 一元論的으로 存在할 수밖에
없지만,靈魂의 世界까지 包含한다면 二元論的으로도 存在가 可能한 것이다. 서양의 말처럼 靈魂은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도 있지만 靈魂이 지구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몸을 기반으로 해서 살 수밖에 없다.
또한 이 靈魂은 서양의 믿음처럼 不變하는 것이 아니라 人間들처럼 끊임없이 變化하고 成長해 나가는 存在이다. 매우 복잡한 이야기지만 이 靈魂들은 또한 個體이면서 '偉大한 神秘'의 에너지의 一部이기도 하다. 靈魂들 各各 個體이면서 모두가 하나로 連結된 存在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정말 알쏭달쏭한 이야기지만 이런 생각은 동양의 생각과 일맥상통한다. 동양에서는 모든 존재가 連關된 인드라網의 사슬로 이어져 있다고 본다.
서양의 개인주의와 동양의 공동체주의는 서로 정반대인 것 같지만 사실은 아닐지도 모른다. 모든 存在는 個人인 同時에 共同體이고,共同體이면서 個人이다. 存在는 二元論的이면서 一元論的으로 움직이고, 一元論的이면서 二元論的으로 思考한다. 이 모순들은 마치양자론의 모순과도 같다. 어느 하나를 관찰해서 취하면 어느 하나가 사라지고 마는. 사실 인생의 모든 선택들의 모습도 이과 다르지않다.
어느 한 곳에 注目하면 어느 한 곳은 사라진다. 우리는 이 모두를 한꺼번에 볼 수는 없을까. 뚜껑을 열고 굳이 확인을 하고 어느 하나의 정답을 내리지 않고, 있는 진실 그대로 모두 받아들여 이해하기는 어려운 것일까. 孔子는 이미 이러한 方法을 익힌 聖人이었다. 공자는 아마도 보랏빛 靈魂이 아니었을까. 공자는 내가 말한 眞實을 있는 그대로 全切를 두루 보고 이해하는 방식을 이른바 '中庸'이라고 말하였다.
쉽게 생각하듯이 중용은 이것과 저것의 中間을 選擇하는 것이 아니다. '中庸'은 圓의 中心에 서서 그 圓을 構成하는 모든 요소를 360度로 돌아가며 두루 살피는 態度를 이르는 것이다. 곧 '전관(全觀)'을 말하는것이다. 靈魂들은 어쩌면 이 中庸을 배우기 위해 幻生에 幻生을 거듭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말을 바꿔 예수의 '사랑',싯다르타의 '緣起', 노자의 '無爲' 도 그 根本은 孔子의 生覺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람들은 人生에서 많은 苦難의 瞬間을 맞닥뜨린다. 그럴 때 어떤 사람은 그것과 正面으로 마주해 이겨내고, 어떤 이는 便한 길을 찾아 도망친다.<靈魂들의 旅行>에서 靈魂들은 말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選擇에 依해 그 숱한 苦難을 마주하고 이겨내기 위해 地球로 온 것이라고, 그 아픔과 상처, 슬픔으로부터 무언가 배워가기 위해 이 힘든 世界로 自請해 왔다고.
世界의 많은 宗敎는'地獄'이라는 槪念을 발명해내어서(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이 개념은 基督敎나 유대교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페르시아의 土俗 宗敎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惡魔'의 槪念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탄 루시퍼의 이야기도 그 뿌리는 기독교에 있지 않다.)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어 자신들의 종교를 선전하고, 자신들의 敎理에 맞는 삶을 强要한다. 그러나 靈魂들의 말에 의하면 靈魂들의 世界에 地獄은 없다고 한다. 다만 그곳은 모든 것을 받아들여 주는 곳이며 엄마의 품속 같은 따스한 곳이라고 한다. 自殺을 하고 일찍 地球로부터 돌아온 靈魂들도 다독여주고 위로해주며, 地球에서 殺人 같은 나쁜짓을 한 靈魂도 反省의 機會를주고 나쁜 버릇을 淨化시키는 일만하고 다시 靈魂의 故鄕으로 갈 수 있게 해준다고 한다.
나는 생각했다. 아, 그렇다면 地獄은 바로 우리가 사는 이 地球가 아닐까? 그럼, 여기가 地獄이니까 우리는 빨리 여기를 벗어나 靈魂의 故鄕으로 돌아가면 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엉뚱하게도 自殺이 가장 빠른 速行便이 될 것이다. 헌데 한 가지 明心할 것은 自殺로 生을 마감한 靈魂은 人生에서 배워간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다시 처음부터 똑같은 苦痛을 겪으며 人生을 始作해야 한다는 것이다. 地球를 다녀간 靈魂은 모두 다시 地球로 돌아와야 하는데 地球가 언제까지나 地獄으로 남아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不幸한 일일까. 地球는 靈魂들의 修練場所로는 알맞겠지만 靈魂들의 休息場所로는 꽝인 곳이 되겠지.
우리가 보랏빛 靈魂이 되어 싯다르타처럼 輪廻를 끝내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젠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地球人으로서 살아가는 苦痛을 더 이상 겪지 않으려면 結局은 이 地球를 새로운 모습으로 만들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天國에 의지하고 天으로 돌아갈 날만을 그리며 사는 것보다 이 地球를 天國으로 幸福한 靈魂의 휴양지로 만드는 것이 좀 더 根源的으로 地球 生命體들의 苦痛을 줄일 수 있는 길 일것 같다.
나 역시 짧은 生을 살다가 언젠가는 다시 따스한 故鄕, 靈魂들의 世界로 돌아가겠지만 그때까지는 이 地球를 행복한 별로 만드는 일에 힘을 보태고 싶으다. 나의 靈魂은 아마도 地球를 무척 사랑하는 靈魂인가보다. 이 책을 읽고 나는 마음이 한결 푸근하고 여유로워지게 되었다. 地獄과 罪와 罰을 말하는 宗敎는 人間을 끊임없이 不安하게 만들지만, 容恕와 和解,그리고 진정한 배움이 있는 '靈魂들의 世界'는 내가 이 世界에서 마음껏 내 꿈을 實現할 勇氣를 준다.
이 地球에서 아무리 꿈의 날개가 꺾이고, 상처를 받고, 절망을 한다 하더라도 그곳에 가면 모두 理解받고, 그런 試圖들이 稱讚받을 수 있다면 나의 진심을 온전히 이해 받을 수 있다면 내가 이 地球에서 더 이상 무엇을 두려워 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내 意志로 이 地球에 왔고, 이 地球에 도움이 되겠다는 내 靈魂의 初心을 잃지 않을 것이다. 내가 떠나왔던 故鄕을 요즘 종종 想像한다. 그러면 따스한 햇살이 내몸 구석구석의 細胞를 씻겨주는 것처럼 몸과 마음이 파랗게 맑아진다. 가슴 속에 透明하고 따스한 故鄕을 하나 심어두고 싶은 사람은 꼭 <靈魂들의 旅行>을 읽어보기 바란다. 책을 덮고 나면 당신은 분명 人生을 다르게 바라보기 始作할 것이다.
- 글쓴이:볼칸 -
출판사 : 나무생각/1999/472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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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매가격 : 9,800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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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희 외 옮김 상급
[책소개]
최면 심리요법의 전문가인 저자가 최면이나 초의식 상태에 있는 사람의 마음의 눈을 통해
영혼의 세계를 보는 것이 가능하다고 강조한 저서. 영의 세계로 가는 길,격리된 영혼,
오리엔테이션, 우리들의 안내자,앞서가는 영혼,환생의 선택 등 15장으로 나눠 엮었다.
[목 차]
001. 죽음 그리고 떠남 002. 영의 세계로 가는길 003. 귀향 004. 격리된 영혼 005. 오리엔테이션 006. 가는 도중 007. 배치 008. 우리들의 안내자 009. 어린 영혼 010. 중간 영혼 011. 앞서가는 영혼 012. 환생의 선택 013. 새로운 육체의 선택 014. 출발의 준비 015. 새로운 탄생 | |
출처 사이버 문학광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