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근본 마음은 어디에도 걸림이 없네 ~~~

장백산-1 2013. 7. 28. 09:44

 

 

 

어디에도 걸림없네

 

 

 

중생이라 모자라지 않고, 부처라 더하지도 않고,
불교에서 말하는 마음이란 世俗 社會에서 쓰는 마음이라든가

또 世上의 유심론이니 유물론이니 하는

相對的이고 二元的인 마음과는 次元이 전혀 다릅니다.

불교에서는 이 마음을 5種心으로 나누어 보거나

더 세밀하게 第6識, 第7識, 第8識, 第9識까지 나누기도 합니다.

그런데 本始 이 根本 마음은 언어도단(言語道斷)입니다.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本바탕 마음은 宇宙 萬有 以前에도 있었고,

우주 만유가 다 가루가 되어 날아간다고 하더라도 相關이 없는 不生不滅의 자리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기쁜 生覺, 슬픈 生覺, 생겨났다가
또 죽는 生覺으로

조각난 마음을 마음이라 生覺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一切唯心造라 할 때

마음은 그러한 마음이 아닌 根本的인 마음,

곧 부처를 말합니다.

世上에서 말하는 조물주니, 알라神이니, 브라만神이니, 시바神이니,

여호와 하나님 神이니 하는 여러 가지 神도

모두 根本 마음에서 짜낸 것입니다.

엄격히 말하면 불교에서 말하는 심즉시불(心卽是佛),

그 자리는 想念이나 生覺이 끊어진 자리이므로

깨달은 자가 아니거나 精進해서 體驗하지 않은 사람은 충분히 이해되지 않습니다.

불교는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마음과 마음이 번개같이 서로 應하는 겁니다.
눈만 닿으면 道를 아는 것,

電光石火와 같이 번쩍거리는 그것이 우리의 根本 마음입니다.

이 마음에는 때가 묻을 수 없으며, 이 마음은 누가 훔쳐 갈 수도 없습니다.

이 마음을 本來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事實을 모르고

無明에 덮여서 보배를 사용할 줄 모르는 것이 바로 중생의 허물입니다.

그래서 앞 生覺이 미혹하면 부처가 중생이 되고[前念迷 佛是衆生],

뒷 生覺이 깨달으면 중생이 바로 부처가 되는 것[後念悟 衆生是佛]입니다.

깨닫고 미혹함에 중생과 부처가 있는 것이지,

중생이라 해서 모자라고 부처라고 해서

더 있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不增不減입니다.

煩惱의 구름에 가리어 버리고 이 마음이 迷惑해서 三界 六途에 輪廻합니다.

몸을 받아 가지고 올 때도 昏朦天地(혼몽천지)가 되어서 어디서 온 줄 모르고

五里霧中(오리무중)으로 허둥지둥 온 것입니다.

그리하여 박씨네 집이나 이씨네 집의 아들 딸로 태어난 것이지요.

물론 그렇지 않은 분도 계시겠지만,

우리가 어느 정도 닦지 않고는 사는 것도 혼몽천지요,
가는 것도 역시 올 때처럼 가는 方向도 몰라 헤매며 갑니다.

그래서 그 이름을 중생이라 합니다.

그러나 중생이라고 해서 근본 마음이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부처보다 조금도 모자라지 않게 갖고 있지만,
무명업식(無明業識)에 가려서 근본 마음을 모를 뿐입니다.

구름이 팔방으로 에워싸도 어찌 太陽이 없어질 것이며,

 어찌 빛을 잃어버리겠습니까?
다만 구름에 가려서 안 보일 뿐이듯,

사람의 마음도 또한 妄念이나 煩惱의 구름에 덮여 있을 뿐입니다.

그 구름을 벗어 버리고 참다운 自己를 發見하라는 것이 불교입니다.

우리의 이 마음만 알아 버리면 팔만대장경의 眞理가 그대로 환하게 나타나고,

이 한마음을 깨닫지 못하면 닥치는 곳마다 답답하고 통하지 못해

헤매고 불행하고 괴롭고 초조합니다.

이 마음 밝히는 수행이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우리가 깨닫는 것은 삽시간입니다.

마음대로 가고 마음대로 오고

自己가 바로 모든 것을 이룩하는 根本이라는 것을 自覺해야 합니다.

이것이 禪의 眞髓입니다.

선의 진수란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깨친다는 것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행상 소리에도 깨치고,

 ‘탁’하고 부딪치는 소리에 깨치기도 하고,

길 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서도 깨치고,

그야말로 꿈깨듯이 깨치게 됩니다.

그러니까 단계적으로 배워서 깨치는 것이 아니라,

유식한 이나 무식한 이나 꼬집으면 아픈 줄 알고,

부르면 對答할 줄 아는 主人公이 있는 者는

누구나 기연(機緣)을 만나면 즉각 깨치게 되는 것입니다.

깨치고 보면 우리의 根本 마음은 本來 장단(長短)이 없고 生死가 없는데,

중생들은 그 根本 마음을 제쳐 놓고 枝葉에 흐르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누가 기쁘게 하면 웃고, 화나게 하면 성을 내고, 미워하고,

 사랑하고, 경계에 끄달리며 삽니다.

그야말로 팔만 사천 온갖 生覺이 죽 끓듯 일어 나는 것이

마치 강물이 흐르듯이 흐르고 있습니다.

꿈을 깨면 한 刹那를 살아도 永遠히 사는 것이고,

꿈을 깨지 못하면 百年을 살아도

고깃덩어리가 금수처럼 꿈틀거리다가 가는 것이지 사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全部 간단한 마음의 造化인 것을

우리가 오고 가고 하는 토막토막에 걸려서
그 根本 마음을 모를 뿐입니다.

이 마음을 모르면 自己 마음대로 오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工夫를 하여 修行이 된 사람은 自己 마음대로

이 몸을 벗어 버리고 生死를 넘나들 수 있습니다.
生死가 없는 境地에서 보면 生死는 마치 옷 갈아입는 것과 같습니다.

양복도 입고 한복도 입고 붉은 옷도 입고 흰 옷도 입고

마음대로 옷을 갈아입듯이
이 껍데기 몸을 마음대로 갈아입으면 生死에 무슨 拘碍를 받겠습니까?

그런 것을 우리가 가고 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죽음에 대해 공포심이 있을 뿐이지,
헌 옷을 새 옷으로 갈아입는데 오히려 더 좋습니다.


서암 큰스님 법어집 「자기 부처를 찾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