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고요한 존재의 참모습
본래 고요한 존재의 참 모습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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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보통 옳다 그르다고 할 때 잘 살펴보면 다 自己 基準에서 말하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自己 基準이
客觀的으로 봐도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 客觀性의 根據로 국민의 이름이나 마을 사람의 이름을 또는 윤리와
도덕, 법률을 들먹입니다. 그러나 自己 基準의 客觀性의 根據로 들이대는 법률이나 윤리, 도덕이 客觀性을 保證할 만큼
충분히 타당한 것이 될 수 없다는 事實을 조금만 깊게 살펴보면 곧 알 수 있지요. 한쪽에서는 법률이 이런 까닭에 정당하다 하지만 다른 쪽에서는 고지식한 따분한 소리라고 하지요.
옳고 그르다는 是非의 基準은 自己觀念을 中心으로 해서 생겨난 것임을 알아야합니다.
그리고 또 그 觀念은 固定되고 變하지 않는 것이냐 하면 그렇지도 않지요.
狀況에 따라 주위의 因緣 따라서 수시로 變하고 바뀝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基準으로 삼아서 옳고 그르다는 是非를 말 할 수 있겠어요?
부부싸움을 예로 들어봅시다.
조그만 집안 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남편이 먼저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면 부인이 덩달아 짜증이 나고 화가 나지요. “그만한 일로 왜 화를 내느냐.”하면서 화를 냅니다. 또 어떤 때는 ‘아이고 참지. 또 시끄러워지니까.’하고 마음먹으며 참기도 하지요. 그런데 生覺은 이렇게 돌아가요. ‘아니, 이 사람이 며칠 전에도 그랬고 , 어제도 그러더니 오늘 또 그래?’ 하면서 生覺이 過去로 돌아갑니다.
그러면 性質이 더 나지요. ‘한번 같으면 참겠는데 몇 번째야?’ 이렇게 生覺이 돌아가고 날뛰면서 확 쏘아붙이려다가
‘아이고, 마 참아야지’하고 참습니다. 이러는데 또 生覺이 어디로 가요? 이번엔 未來로 가요. ‘저거 그대로 내버려
두면 내일 또 저럴 것 아니냐. 앞으로 계속 저럴 테니 이번에 딱 고쳐야지 안 그러면 안 되겠다.’ 이렇게 生覺이 드는
겁니다. 그러면서 氣分 나쁘다는 生覺이 점점 자라납니다. 기분 나쁘다는 生覺이 過去의 生覺을 먹고 未來의 生覺을
먹고 쑥쑥 자라나고 커집니다.
‘이번이 몇 번째냐. 저 사람 그대로 내버려 두면 앞으로 계속 저럴 것 아니냐’는 生覺이라는 말은 뭘 뜻합니까?
내 生覺이 客觀的으로 옳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겁니다. 그래서 한바탕 싸우죠. 목소리가 커집니다. 아내 목소리가
커지면 남자가 집니까? 안지지요. 그러다가 ‘이 여편네가 어디다 대고 ...’ 이렇게 나와요. 그러면 이제는 生覺이 어디로
돌아가냐? ‘여자라고 무시하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봐주려 했는데 이거 도저히 안 되겠네.’ 자기 혼자의 문제에서
모든 여자에 대한 문제로 生覺이 돌아가면 모든 여성을 대변해서 이번 기회에 저 남자의 思考方式을 뜯어 고치는 게
좋겠다 이렇게 生覺이 됩니다. 여성을 대변하니까 이제 더 큰소리가 납니다. 이러면 남편이 뭘 집어 던지든지 하게
되지요. 그러면 애들이 나와서 울거나 합니다.
狀況이 이 정도 되서 애들 앞에서 모욕 받았다는 生覺이 들면 이번에는 또 다른 生覺이 일어납니다. 처음에는 애들 교육상 참으려고 했다가 싸움이 일단 커지면 어떻게 生覺이 돌아가느냐? 이거 그대로 놔두면 애들 교육상에도 나쁘겠다. 뜯어 고쳐야지. 아빠가 하는 저 꼴을 애들이 혹시 잘못 배우지 않을까 하는 生覺이 들어요. 그러니까 애들 교육을 위해서도 남편의 行動을 뜯어고쳐야 된다 이렇게 生覺이 듭니다.
이런 식으로 자꾸 生覺이 자라납니다. 이 過程은 뭘 의미하지요? 내 生覺이 옳다는 겁니다. 客觀性이 확보되면 될 수록
내 生覺이 옳다는 確信이 더욱 强해지고 동시에 내면의 목소리라는 生覺도 점점 더 커집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역사와
민족 , 인류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그냥 놔둘 수가 없다. 이렇게 生覺이 들면 그 때 부터는 죽기 살기로 싸우는 겁니다.
반드시 승리를 해야 합니다. 아니면 순교라도 해야 하지요.
목소리가 커지고 그릇 깨지는 소리가 나고, 여자가 욕을 하고 그러면 남자는 주먹을 날리고 . 여자가 악이 받치니까
‘날 죽여라.’하고 나옵니다. 이렇게 狀況이 발전하면 조마조마하게 숨어서 숨죽이고 지켜보던 애들까지 나와서
‘엄마 아빠’하고 어쩔 줄 몰라 하며 웁니다. 이쯤 되면 이웃집에 알려질까 봐 창피할까 봐 하던 生覺은 이미 사라지고
안중에는 이미 이웃 사람도 없습니다.
싸움이 커지면 이웃집에서 창문을 열고 보는 구경꾼이 생깁니다. 그런데 구경꾼들은 이 싸움을 보고 무슨 生覺을
할까요? ‘어이구 어리석은 사람들 . 제 精神이 아니네. 자기 마누라 때리고. 자기 살림 깨고. 자기 남편 욕하고.
자기 아이들 교육에도 나쁘고 . 집안 망신시키고...’ 백가지 해만 있지 한가지의 이익도 없다는 사실이 담 밖에서
쳐다보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다 잘 보여요.
부처님 法은 文字나 어떤 모양 모습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自己中心으로 生覺 하는 것을 ‘我相’이라 하고 그 我相을 固執하는 것을 ‘我執’이라 하지요. (부부싸움을) 담 넘어 구경하는 것과 같은 것을 我執을 버렸다, 我相을 깼다고 합니다. 이렇게 단지 自己가 生覺을 일으켜서 만든 꿈 같고 幻想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번개 같은 부부싸움인데도, 이 부부싸움을 客觀化 시켜 마치 이 世上에 實際로 그런 것이 固定 不變하게 存在한다고 믿는 것을 상(相)이라고 합니요.
육조 혜능대사께서는 내 가르침은
無念으로 宗을 삼고 (마음이 生覺을 일으키지 않는다.),
無相으로 體를 삼고(마음이 모양 짓지 않는다),
無住로 根本을 삼는다(마음이 머물러 執着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어요.
이 가르침의 核心은 뭐냐?
모양이 있거나 모양이 없거나
모든 모양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내 마음/의식이 마음/의식 속에 生覺으로 만들어낸다는 事實,
그 事實을 알라는 겁니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 亦如電 應作如是觀)
어떤 것이 아름답다고 느껴질 때, ‘내 마음/의식이 눈을 통해서 그것을 보고 내 마음/의식 속에
아름답다라는 生覺/相/모습/모양을 일으켰다.’는 진실을 보라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우리의 마음/의식은
그것이 本來부터 아름다운 存在였기 때문에 그것을 보고 아름답다고 生覺하게 된 것이라고
잘못 알고 있다는 말 입니다. 이와 같은 生覺을 顚倒夢想이라고 합니다
법륜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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