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오, Let it be! |
오오, Let it be!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天地不仁이라, 천지는 인자하지 않아서, 사랑이 없어서……. 아아, 노자의 이 아름다운 逆說! 삶과 世上과 人間을 훤히 꿰뚫고 있는 노자의 이 서늘한 눈길! 天地는 사랑이 없어서……아니다! 세상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天地는 사랑 덩어리이며, 宇宙는 곧 사랑이다! 하나님은 사랑이다(요한1서 4:8). 그리하여 하나님에게는 오직 사랑밖에 없다! 그런데도 老子는 天地不仁이라고 말한다. 왜? 스스로 그러한[自然] 모양의 그 사랑이 너무나 크고 넓고 깊으며 섬세해 차라리 '不仁'이라고밖에 말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不仁의 仁……노자는 안다, 차라리 '사랑'이라는 말조차 설 수 없는 天地의 그 크나큰 無限의 사랑을―!①
恩惠를 베푸느니라……"
그러나 聖經은 그러한 책이 아니다. 聖經은 기독교 혹은 가톨릭의 專有物이 아니며, 오히려 嚴密히 말하면, 聖經은 기독교 혹은 가톨릭으로부터도 自由롭다. 그것은 宗敎 이전(以前)의, 敎理 以前의 무엇이다. 聖經은 그러한 宗敎나 敎理로 限定지어질 수 있는 책이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佛經과 佛敎에 대해서도 꼭 마찬가지로 말해질 수 있다.
나는 앞으로 이 道德經 풀이를 통해 가능한 한 자주 聖經을 引用하여 기독교나 가톨릭의 <그림>으로 채색되지 않은 聖經 本來의 진의(眞義)를 많이 캐내어 보고 싶다. '질투하는 하나님'이라……사실 나는 聖經에서 이 말씀만큼 하나님의 그 크시고 限量없는 사랑을 이렇게 極的으로 表現한 말이 또 있을까 싶다. 하나님은 알고 있는 것이다, 人間이 眞正으로 幸福하고 自由할 수 있는 唯一한 길은 오직 하나님 自身을 가질 때 뿐이며, 그 外의 어떠한 것도 <眞正으로> 人間를 幸福하게 해줄 수 없다는 眞實을.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토록 애틋하게 사람들이 오직 당신 自身만을 바라기를 願하며, 또한 그토록 간절하게 당신 自身을 사람들에게 내어주기를 願하는 것이다. 아아, 人間은 오직 하나님을 얻을 때에만 비로소 幸福하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란 곧 眞理이고, 사랑이고, 道이며, 佛法이고, 眞我 ― 眞正한 나 곧 '참나' ― 의 다른 이름(名)인 것을!
그러니까 노자는, 때가 되면 봄이 오고 꽃이 피고 나비가 날고 새가 알을 깨고 나오고 그렇게 모든 것이 생겨났다가, 또 때가 되면 그 모든 것들이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天地의 스스로 그러한[自然] 秩序와 調和의 모양을 이와 같은 당시의 제사풍습에 비추어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라는 말로 表現한 것이다.
當時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냈던 제사, 그래서 누구도 注意 깊게 바라보지 않았던 그 너무도 平凡한 日常事 속에서 이토록 깊은 道의 香氣를 바라보는 노자의 눈길이 서늘하다.
얼핏 보기에는 그냥 그렇게 無心하게 내어버려 둘 뿐 '아무것도 하지 않는[無爲]' 이 天地와 聖人의 모습이 정말이지 노자의 表現처럼 사랑이 없는 듯 ― 不仁한 듯 ― 보이나, 그 그냥 <내어버려 둠,自然> 속에서 얼마나 그 各各의 存在가 各各의 자리에서, 各者의 모습으로, 가장 自己답게, 自身만의 生命의 빛을 한껏 살아가도록 해주는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存在와 모든 生命의 가장 完璧한 하모니를 엮어내는 天地의 이 놀랍고도 놀라운 智慧여, 사랑이여―!
感情과 느낌이라는 '百姓'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우리는 그 '백성'들을 어떻게 對하고 있는가? 노자가 말한 天地와 聖人처럼 그렇게 그 모든 百姓들을 있는 그대로 卽, 스스로 그러한[自然] 대로 내어버려 두는가? 아니면 끝없이 끊임없이 그 백성들을 <區別>하고 <分別>하여 어떤 백성은 좋다고 해서 할 수만 있다면 더욱 더 많이 取하려고 하고, 또 어떤 백성은 不足하다 하여 끊임없이 버리려고 하거나 그것을 애써 더 나은 무엇으로 바꾸려고 하지 않는가?
우리는, 우리 '마음'은 그렇듯이 단 한 瞬間도 가만히 있질 못하고 '상현(尙賢)'을 위하여 끊임없이 무얼 하려 하거나, 또한 그런 모양으로 '내 안의 百姓'들을 들볶고 있지는 않는가? 오오, Let it be! 그냥 내어버려 두라! 미움이 오면 그냥 그 미움 속에 있으라! 짜증이 오면 그냥 그 짜증을 살며, 불안이 오면 그냥 불안하라! 그리고 기쁨이 오면 그냥 기뻐할 뿐 그것을 부여잡으려 하지 말라. 온 것은 가게 마련이니, 어느 瞬間 홀연히 기쁨이 내게서 떠나가거든 그것이 그냥 떠나가게 내어버려 두라. 그 어떤 백성도 <干涉>하지 말며 그 백성을 變化시키려 하지 말라! 그리하여 오직 '지금 여기 現在'를 살 뿐 '현(賢)'하려 하지 말라! 그냥 그렇게 瞬間 瞬間을 살라! 아아, 그 하나 하나의 煩惱가 곧 菩提이니!
여기 용아화상(龍牙和尙)의 한 노래가 있어 문득 그것을 읊고 싶구나! 深念門前樹 심념문전수 能令鳥泊棲 능령조박서 來者無心喚 래자무심환 去者不慕歸 거자불모귀 若人心似樹 약인심사수 與道不相違 여도불상위 깊은 생각 문 앞에 있는 한 그루 나무 선선히 새들에게 그 둥지를 내어주고 오는 자 무심(無心)히 맞아주며 가는 자 돌아오기를 바라지 않는구나. 만약 사람의 마음이 이 나무와 같다면 道와 더불어 어긋나지 않으리. 聖經에도 이와 비슷한 얘기가 있어 또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만나와 메추라기>에 관한 이야기인데, 모세가 이스라엘 百姓들을 애굽 땅 從되었던 곳에서 건져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으로 그들을 引導하여 가던 道中 廣野에서의 일이다. 그렇듯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종의 몸에서 놓여나게 해주었건만, 그들은 그들의 行路에 어떤 자그마한 어려움이라도 닥치면 곧 모세를 怨望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들을 늘어놓는다. "이스라엘 온 회중(會衆)이 그 廣野에서 모세와 아론을 怨望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廣野로 우리를 引導하여 내어 이 온 會衆을 주려죽게 하는도다……"(출애굽기 16:2∼3)
이러한 거듭되는 怨望의 소리를 들은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메추라기와 만나를 하늘에서 내려주어 그들로 하여금 배불리 먹게 하는데, 그런데 이 대목에서 나오는 다음의 말씀들이 참 재미있다.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糧食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命하시기를 너희 各 사람의 食糧대로 이것을 거둘지니……이스라엘 子孫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不足함이 없이 各己 食糧대로 거두었더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누구든지 아침까지 그食糧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모세의 말을 聽從치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怒하니라……"(출애굽기 16:15∼20) 聖經은 全的으로 '지금 이 瞬間 여기'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나'와 '마음'에 關한 얘기이다. 이렇게 理解했을 때, 앞의 출애굽기 말씀들은 어떻게 우리에게 다가올까?
우리가 그 '生覺[思考]' 혹은 分別하는 '마음'에 사로잡혀 있으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것의 從노릇을 할 수밖에 없다. 反面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그 分別心 혹은 한 '生覺'이 내려놔지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는 마음의 狀態 ― 空 ― 를 말한다. 그리고 特히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가 내려지는 場面에서 보면,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糧食이라……"라고 되어 있는데, 말하자면, 이 만나와 메추라기는 앞에서 老子를 얘기할 때 말한 '내 안의 百姓'들을 가리킨다. 우리는 그렇게 늘 때로 미워하고 때로 짜증내며, 때로 기뻐하기도 하고 때로 눈물짓기도 하면서 살아가게끔 되어 있는 存在요 '生命'인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에 나오는 聖經 句節을 보면, "이스라엘 子孫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많이 거둔 者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者도 不足함이 없이 各己 食糧대로 거두었더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누구든지 아침까지 그 糧食을 남겨두지 말라 말하였으나 그들이 모세의 말을 聽從치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怒하니라……"라고 되어 있다. 참으로 읽을수록 기가 막히고, 전율할 만큼 오묘하다. 조금 前에 말한 것처럼, '여호와께서 주어 먹게 하신 糧食인 만나와 메추라기'는 곧 '내 안의 百姓'이며, 그것은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아 그런데, 있는 그대로의 내 안의 온갖 百姓들을 스스로 그러한[自然] 대로 내어버려 두지 못하고 끝없이 끊임없이 우리 마음이 <分別>하고 <간택(揀擇)>했듯이, 어떤 것은 가려 "아침까지 두는" 이 어리석음이여―! 그것은 必然的으로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게" 되어 있다!
오오, 그러니, 그것들을 그냥 내버려 두라! 그냥 그대로를 살라! 그와 같은 끊임없는 分別 간택(揀擇)을 통하여 내가 나를 <秩序잡으려> 하지만 않는다면, 眞實로 그렇게 '내 안의 百姓'들을 그냥 그러한 대로 내어버려 두고(Let it be) 무위(無爲)할 수만 있다면, 그때, 天地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萬物을 온전한 秩序 속에서 調和롭게 살아가게 했듯이, 宇宙的인 生命의 氣運이 '나'를 살리고 '나'를 秩序잡아 調和롭게 하리라. 그리하여 '나'는 비로소 平和롭고 幸福하리라. 아아, 그 無爲自然의 어마어마한 힘이여―! 天地之間 其猶탁약乎(하늘과 땅 사이는 마치 풀무나 피리와도 같구나!)……그렇게 '나'라고 하는 이 天地宇宙가 무위(無爲)로써 텅~빌 때, '내 안의 百姓'들은 여전히 諸 各各의 存在와 生命의 빛깔대로 다함 없이 움직이고 變化하나[虛而不屈 動而愈出], 오! '나'는 아름다운 피리소리 되어 世上과 삶과 일상(日常)을 演奏하는구나!
敎訓的으로 解釋하여, '중(中)' 혹은 '중도(中道)'를 찾으려 하거나 지키려 한다면 그것은 이미 본질에 어긋난다. 왜냐하면 '중(中)'은 찾을 수도, 잡을 수도, 지킬 수도 없기 때문이다. 中은 모든 것을 둘로 나누어 보는 '思考)'의 領域이 아니다. 다만 그 한 '生覺[思考]' 혹은 '마음' ― 이름하여 分別心만 ― 내려놔지면 모든 것을 分明하게 알게 되리라, 이 世上에는 온통 '중(中)'밖에 없음을, 그리하여 따로이 '중(中)'이라고 할 것도 없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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