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원동태허(圓同太虛) 무흠무여(無欠無餘) 信心銘
2012/11/30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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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원동태허(圓同太虛) 무흠무여(無欠無餘)
(至道는) 태허와 원만하게 같아서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다.
至極한 道는 텅~빈 虛空과 원만하게 같아서(조금도 다를 바가 없어서), 欠-모자랄 흠, 무흠(無欠) -
모자람도 없고, 무여(無餘) - 남음도 없다. 虛空은 형체가 없어 완전히 통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으니
걸림이 없고 수용하는데 限界가 없음에 비유된다.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으므로 걸림이 있을 수
없고, 어떠한 사유에서도 수용 못할 이유가 없다. 이 宇宙 法界에 佛性 充滿함을 표현한 말씀이고,
근심 걱정이 없고, 항상 하는 일에 만족하고 평화로운 극락세계이고 좀 더 나아가 이 宇宙 法界와
하나가 된 涅槃를 표현한 말이다. 이 지구상에 아무리 많은 중생이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함에 모자람이 있을 수 없고, 태허공(太虛空)이 아무리 넓고 깊다고 하여도 내 마음을
덮고 남는 것이 없고, 내 마음이 아무리 넓고 깊어도 太虛空를 싸고 남음이 없는 법이니, 마음과 太虛는
일여(一如)하다는 말씀이다.
우리 인간사(人間事)에서는 우리들의 錯覺으로 가려내고 택하는 간택(揀擇), 미워하고 좋아하는 증애(憎愛),
따르고 거역하는 순역(順逆), 하고자 하거나 하지 않고자 하는 위순(違順)이 있다. 이는 우리들의 업식(業識)
에 依한 錯覺이니, 이 業識이 없으면,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고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고 그로 인해 하고자
하는 일에 부족함이나 남음이 없게 되니 늘 근심 걱정이 없는 세계가 열린다.
이 極樂世界가 우리들이 소망하는 세상인데, 이 세계에 들기 위해 錯覺을 일으키게 하는 우리들의 業識을
消滅하고자 發心하고 精進하는 수행을 하는 것이다.
원동태허(圓同太虛)는 반야심경의 “제법공상(諸法空相)”, 법성게의 “법성원융(法性圓融)”에 해당하고
무흠무여(無欠無餘)는 반야심경의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 부증불감(不增不減)”에,
법성게의 “무이상(無二相)”에 해당되는 말씀이다. 이는 모두 原初的 實相과 그 모양, 말로써 표현될 수
없는 말로 그 모양을 설명하고 있는 것인데, 흔히 ‘참 그대로’라는 뜻을 가진 진여(眞如), 불성(佛性),
법성(法性) 등으로 표현되고 있다.
승찬대사께서 이 法性의 수많은 表現 가운데 원동태허(圓同太虛), 무흠무여(無欠無餘)라고 하신 것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法性의 태허(太虛)함에서 가애(罣礙), 걸림이 없음을, 그리고 걸림이 없으므로
不足함도 없고 남음도 없이 必要에 딱 맞고, 必要에 딱 맞으니 항상 기쁜 마음으로 무슨 일에도 접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너무 많이 먹지도, 적게 먹지도 않아 딱 맞게 먹으니 건강을 유지하게 되고, 건강에 신경 쓸 일이
없으니 먹는 것을 즐기게 된다. 돈도 많지도 적지도 않게 알맞게 있어 돈 때문에 근심 걱정할 일이 없으니,
하루 하루가 즐거운 생활일 수 있으며, 혈압이 높지도 낮지도 않아 딱 맞아서 혈압이라는 것이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조차 모르는 상태가 無欠無餘이다. 이것이 진정한 便安이고 平和이며 極樂의 要件이다. 이러한
까닭에 般若心經에서는 보리살타(菩提薩埵) 依般若波羅蜜多故 心無罣礙 無罣礙故 無有恐怖라고 했다.
여기에서 般若波羅蜜多가 태허(太虛)이고 진여(眞如)이며 原初的 眞實相이니, 보리살타가 이 太虛에 依持
함으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졌다는 뜻이 된다. 이와 같이 태허(太虛)는
반야심경의 공(空)과 般若波羅蜜多와 같은 意味가 된다.
그리고 이 ‘太虛와 모자람도 남음도 없는 理致’를 法性偈에서는 ‘깨닫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분명히
하고 있다. 法性圓融無二相, 諸法不動本來寂, 無名無相絶一切 證智所知非餘境이라고 하여 태허(太虛)의
무흠무여(無欠無餘)의 境地를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반야심경의 ‘제법공상(諸法空相) 불생불멸(不生不滅)’
의 境地도 이와 같다. 모두 다 眞如의 法性을 설명하는 말씀이다.
法性圓融無二相은 위에 간택(揀擇), 증애(憎愛), 순역(順逆), 위순(違順) 등이 모두 상대적이고 대립되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이들의 원초적 성품에서 보면 서로 원만하게 융화할 수 있는 성품이지, 하나를
택하기 위해 다른 쪽을 버리거나 없애야 할 것이 아니므로 사실상 이들은 모두 두 모양이 아니라고 하고,
이들의 原初的 眞理 면에서 보면 본래부터 조금도 움직인 적이 없이 고요한 것이니, 이름도 모양도 없어
現象世界와는 완전히 끊어져 있는 境地이니 오직 깨달은 자만이 알 수 있다고 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限없이 큰 虛空(太虛空)이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다고 하신 태허(太虛), 무흠무여(無欠無餘)이고, 이
마음이 바로 태허(太虛)가 되고 무흠무여(無欠無餘)가 되었다는 것은 또 내 마음이 열반의 세계에
들었다는 뜻이 된다.
[출처] 07 원동태허(圓同太虛) 무흠무여(無欠無餘)|작성자 모르니 어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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