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과 현대물리학

일승삼보(一乘三寶)

장백산-1 2015. 5. 8. 01:30

 

 

 

 

일승삼보(一乘三寶)|마음의 고향


 
본연스님 |2011.11.30. 06:51 http://cafe.daum.net/sungryunsa/S5In/133                               
 
일승삼보(一乘三寶)

 

삼보(三寶)를 佛子님들은 모르시는 분 없이 다 아십니다. 불보(佛寶), 법보(法寶), 승보(僧寶) 그 정도는

아십니다. 三世諸佛이 바로 佛寶이고, 석가모니부처님께서 說하신 成佛의 法이 法寶이고, 그에 따라서

實踐하는 佛子님들이 僧寶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렇게 아는 것은, 이른바 限界가 있는 三寶입니다.

 

三寶에도 三乘三寶가 있는데, 四聖諦의 가르침을 들어 成佛해 가는 佛子님들이 聲聞乘이고, 十二因緣法

이나 宇宙의 道理를 探究해서 成佛해 가는 佛子님들이 緣覺乘입니다. 菩薩乘은 우리가 한사코 成佛하고자

해서 無量衆生한테 베풀고 大慈悲心으로 實踐行을 따라서 成佛하는 그런 佛子님들이 菩薩乘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區分하는 三寶를 三乘三寶라 합니다. 三乘三寶란 聲聞乘, 緣覺乘, 菩薩乘과 같은 부류의 佛子님들이

생각하는 정도의 三寶 解釋입니다.

 

불교와 다른 종교와의 球分이라 하는 것은, 三寶가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서 구분되지 않겠습니까?

三寶가 있으면 불법(佛法)이고 三寶가 없으면 외도(外道)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常識的으로 보통

알고 있는 것은 三乘三寶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작 조금도 가림이 없이 無障無礙하게 거리낌 없이 成佛하고자 할 때에는 一乘三寶에

歸依해야 합니다. 參禪이라든가, 方便을 떠나버린 法들은 모두가 다 一乘三寶에 해당하는 셈입니다.

 

 

그러면 一乘三寶란 어떠한 것인가?  이것은 佛寶와 法寶와 僧寶가 셋이 아니라 하나라는 뜻입니다.

佛子님들은 一乘三寶의 그런 뜻을 分明히 깊게 새겨야 합니다.

 
 

우리는 ‘부처(佛)’라 하면 우리 衆生과 다르게 生覺하고 또한 ‘부처님 法’이라 하면‘ 아직 迷惑한 우리들은

法과는 별로 相關이 없지 않은가? 우리가 애쓰고 공부하면 法을 좀 알 듯 말 듯하지 않은가?’ 이렇게만

生覺합니다만, 그 존중하는 부처님 八萬法藏을 위시해서 無量의 佛法, 또는 三乘聖者를 위시해서 自己에

이르기까지, 또는 人間도 미처 未達된 阿修羅世界라든가, 畜生界나 아귀(餓鬼)나 지옥(地獄)世界나 이런

것도 모두가 다 일승삼보(一乘三寶)일 때에는 승보(僧寶)에 해당합니다. 다 중(僧)에 해당한단 말입니다.

 

 
어째서 꼭 그런 一乘三寶, 이른바 佛寶나 法寶나 僧寶나 制限 없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인가? 또는 모르면

어떨 것인가? 현대사회는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다 物質文明 속에 살고 있습니다. 과학과 기술 속에 가지

가지 惠澤을 보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체로 現代人들은 과학의 노예로 지금 전략되어 있습니다.

풍요한 物質이라는 것은 大部分 다 과학과 기술에서 나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그런 科學이 佛寶나 法寶나 僧寶나 나나 너나 이것이나 저것이나 갈라서 보지 않습니까.

따라서 우리가 佛寶 따로 法寶 따로 僧寶 따로 생각하고, 나와 남을 따로 생각하고, ‘나와 남은 절대로

다른 것이다. 物質과 精神은 절대로 한 가지가아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런 見解는 事實은 現代의

物理學 만큼도 깊이가 있지 못한 見解입니다.

 

왜냐하면 現代物理學     은 적어도 ‘物質은 모두가 하나로 돌아간다. 만법귀일(萬法歸一)이라, 萬가지 모든 法이

하나로 돌아간다.’ 이런 道理를 證明하고 있습니다. 萬法이 하나로 돌아가서 物質은 모두가 다 에너지로 歸一

된다. 따라서 이것이나 저것이나 어떠한 것이나 에너지가 形相化된 것이 아님이 없습니다. 달이나 해나 저

銀河界나 우리 人間이나 모두가 다 에너지의 形相化가 아님이 없습니다.

 
우리가 소중히 아끼는 귀금속이나 무쇠나 흙덩어리나 모두가 다 겉만 差異가 있는 것이지 本質的으로 볼 때는

에너지의 化身입니다.

 

現代物理學은 이렇게 萬法歸一이라, 이 世上 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가는 事實을 分明히 證明하고 있는데

우리가 부처님 法을 옛날 式으로, 佛寶는 佛寶 따로 있고 法寶는 法寶 따로 있고 僧寶는 僧寶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면, 부처님 法을 믿는 태도가 너무나 시대에 뒤떨어진 신앙밖에는 안 됩니다.

 
過去 未開한 때는 方便이 必要했지만 現代에는 方便이나 常識으로 通하지 않습니다. 가령 우리가 祈禱를

모신다고 하더라도, ‘내가 잘 되고 事業도 잘되고 내 子女들이 榮達하기를’ 바라는 式으로 祈禱를 모신다고

하면, 이것도 역시 전근대적(前近代的)인, 過去의 方便的인 祈禱밖에는 안 됩니다.

 

그럼 現代的인 祈禱는 어떻게 모실 것인가? 本質的인 本 性稟을 여의지 않아야 합니다. 本質的인 本性稟을

여의지 않아야 佛敎의 根本目的인 解脫로 가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解脫로 가기위해 가장 重要한 問題가

상(相)을 여의는 문제 아니겠습니까? 우선 ‘나’와 ‘남’을 딱 設定하고 ‘다른 사람은 失敗하든 말든 나만 잘

되면 된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부처님 道理인 本性稟과 배치가 되는 것입니다. 本性稟으로 볼 때는 절대로

너와 내가 둘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가 祈禱를 모신다는 그런 문제를 위해서도 그렇고, 어떠한 문제를 위해서나 哲學的인 基本基調,

철학적인 근거가 없으면 바른 것이 되지 못합니다. 철학적인 바른 기조란 무엇인가?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

같이 모든 것을 本質的으로 본다는 말입니다.

 

 
本質的으로 볼 때, ‘내 性稟은 무엇인가?’ ‘나와 相對的인 저 사람의 性稟은 무엇인가?’ 또 ‘다른 나라, 다른

국민의 性稟은 무엇인가? 다른 一切 動物의 性稟은 무엇인가? 植物이나 기타 宇宙萬有에 깃들어 있는 모든

本來的인 性稟은 무엇인가?’ 이런 性稟까지 알아야 이른바 現代的인 思考인 同時에 哲學的인 思考體係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現代는 꼭 哲學的인 思考가 必要한 時代입니다.

 
이러다 보면 자칫 부처님 가르침이 너무나 바싹 말라 무미건조하게 됩니다만, 부처님 가르침은 그런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부처님은 바로 生命 그 自體란 말입니다. 따라서 아까 말씀드린 一乘三寶란, 佛寶 法寶

僧寶가 셋이 아니란 말입니다. 왜냐하면 天地宇宙는 오직 하나의 眞理이기 때문입니다. 둘이나 셋으로

區分한 것은 衆生이 잘 알아먹지 못 하니까 그때그때 方便을 써서 區分을 했습니다만 天地宇宙는 오직

法身如來, 一佛乘 하나 뿐이란 말입니다.

 

또는 法性이나 佛性이나 같은 뜻 아닙니까. 따라서 宇宙萬物 모두가 다 조금도 限界가 없는 法身如來,

法身은 부처의 몸, 眞理의 몸이라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바로 生命이 안 되겠습니까.

 
이런 生命을 우리가 哲學的으로 탐구한다 해서, 이것저것 다 否定해서 空이 되고, 空을 通해서 眞空妙有가

되고, 이렇게 理論的으로만 따지다 보면 結局은 무미건조해 버립니다. 그러기에 참선을 하거나 기도를 모실

때는 複雜한 敎理를 떠나서 오직 마음과 마음으로, 우리 마음의 깊이를 탐구해 들어가 공부하는 방식을 취

하는 것입니다.

 

부처(佛)는 眞理는 바로 生命입니다. 生命이기 때문에 이것이 宗敎입니다. 다만 無秩序한 生命이 아니라,

宇宙의 本質的인 生命이기 때문에 바로 哲學이란 말입니다.

 
오늘은 정기법회를 모처럼 하는 날이기 때문에 제가 무슨 말씀을 좀 많이 하려고 생각을 했었습니다만,

저 밖에서 의자에 미처 앉지도 못하고 서 계신 분들이 있기 때문에 송구스러워서 많은 말씀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宇宙의 根源的인 生命을 하나의 生命 自體的인 面에서 볼 때에는 부처 佛자, 보배 寶자, 바로

佛寶입니다. 모든 功德과 一切 智慧와 慈悲 功德을 다 갖추고 있는 그런 道理가 가득 차 있는 面에서

볼 때에는 법보(法寶)입니다.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바로 宇宙의 本質的인 生命 自體, 宇宙 全切, 처음도 없고 끝도 없고,

 낳음도 없고 죽음도 없고, 그런 무량무변(無量無邊)한 宇宙의 根本的인 生命體, 그런 面에서 볼 때는

바로 佛寶인 것이고, 그 佛寶가 아무렇게나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一切 慈悲. 智慧, 能力, 幸福을

다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無量의 보배를 다 갖추고 있는 그런 면에서 볼 때는 이른바 多寶如來

입니다. 많을 다(多)자, 보배 보(寶)자, 限도 끝도 없는 보배가 佛寶 가운데 다 갖추어 있단 말입니다.

 
또는 佛寶 그 자리가 甚深微妙하기 때문에 妙色身如來입니다. 그 자리는 바로 淸淨微妙한 光明으로

充滿되어 있기 때문에 妙色身如來라, 우리가 보는 그런 物質이 아니라 光明의 世界란 말입니다.

 

또는 法寶 그 자리는 一切 恐怖를 다 떠나 安樂하고 그야말로 自由와 平等과 모두를 다 圓滿하게 갖추고

있기 때문에 ‘리포외(離怖畏)l라, 두려움을 떠나버렸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죽음 같은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本來性稟을 몰라서 그럽니다. 本 性稟 그 자리에서는 本來 죽음이 없어서 그 자리만 志向한다고 생각

할 때, 그 자리와 하나가 된다고 생각할 때는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가장 극단적인 恐怖가 죽음 아닙니까?

우리가 ‘두렵다, 무섭다’하지만 結局은 죽음을 전제로 하니까 두려운 것이지 죽음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공포가 생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本來性稟 자리, 淸淨法身 자리, 부처님은 그와 같이 공포를 다 여의고

大自由, 大解脫, 그런 面으로 볼 때에 離怖畏 - 두려움을 떠나버린 부처님입니다.

 

 
또는 淸淨法身 자리, 本來性稟 자리, 부처님 자리에서는 一切 幸福을 다 갖추고 있기 때문에 안락무우

(安樂無憂) - 근심 걱정 없이 안락하고 행복할 뿐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는 감로왕여래(甘露王如來)

입니다. 이렇게 그때그때 부처님 자리의 功德을 따라서 그렇게 많은 찬탄을 하는 명호(名號)가 붙습니다.

그러나 結局 하나의 부처님입니다. 이런 모든 性功德을 갖춘 그 자리가 淸淨法身 부처님의 法寶입니다.

宇宙의 原理인 同時에 모든 性功德을 갖춘 그 자리가 法寶입니다.

 

 
그러면 僧寶는 무엇인가?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佛寶와 法寶를 따라서 成佛하는 길을 가셔서

위대한 깨달음을 얻으신 過去 조사 스님들, 그런 道人들은 다시 말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직 道人이

못 된 우리 佛子님들도 모두가 다 僧寶입니다. 그러면佛子님들만 僧寶일 것인가? 광범위하게 生命 自體로,

本質的으로 볼 때는, 기독교 믿으나 이슬람교 믿으나, 道敎나 儒敎를 믿으나 모두가 다 僧寶 입니다.

그러면 사람만 僧寶일 것인가? 一乘三寶란 次元에서 볼 때는 사람만이 僧寶가 아닙니다. 다른 動物, 다른

植物, 宇宙에 있는 有情, 無情, 識이 있는 것이나 없는 것이나 有相, 無相, 衆生의 눈으로 보이는 것이나,

안 보이는 것이나 모두가 다 僧寶입니다. 중 승(僧)자, 보배 보(寶)자입니다.

 

 
다시 되풀이해서 말씀드리면 天地宇宙의 生命 自體가 바로 佛寶이고, 佛寶에 간직해 있는 無量의 性功德이

法寶이고, 一切 存在가 僧寶입니다. 따라서 다시 바꾸어 말씀드리면 三寶는 바로 法寶化 三身 -法身, 報身,

化身 三身이나 같이 배대해서 얘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法寶化 三身으로 해서 모두가

하나의 원융무애(圓融無碍)한 宇宙의 生命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아까 제가 말씀드린 一乘三寶입니다.

 
三乘三寶는 方便三寶이므로, 一乘三寶가 되어야 方便을 떠나버린 眞實三寶입니다. 眞實三寶가 되어야

우리 마음에 葛藤을 느끼지 않습니다. 부처님 工夫라는 것은 마음에 葛藤을 느끼지 않고 恒時 安樂하게

工夫를 해야 합니다. 그리 하려면 적어도 哲學的으로 공부해야 합니다. ‘哲學的’이라는 말은 本質的이라는

뜻이 되겠지요. 哲學的이라고 하면 굉장히 어렵게 생각되겠지만, 哲學은 本質이라는 뜻입니다. 人生과

宇宙의 本來的인 것을 우리가 哲學的이라고 말합니다. 事實은 哲學的으로, 本質的으로 宗敎를 갖지 않으면,

佛敎를 믿는다 하더라도 佛敎 믿는 혜택을 별로 못 입습니다. 과학은 과학대로 철학은 철학대로 또는 다른

것은 다른 것대로 빙빙 돈단 말입니다. 그러나 本質的으로 불교를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불교라는 것 속에

모든 것이 다 들어가 버립니다.

 

 
그러면 三寶, 一乘三寶와 우리 마음은 어떠한 關係가 있는 것인가? 우리 마음이 바로 三寶입니다.

우리 마음이 바로 一乘三寶입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 佛寶나 法寶나 僧寶가 다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믿는다 해도 마음 깨달으면 成佛하지 않는가.’ 이런 말을 누구나 다 합니다만

自己 마음의 실상(實相),마음의 참모습 이런 문제에 관해서 깊이 생각하지 못하는 분이 있습니다.

自己 마음이 制限되고 局限된 自己 몸뚱이에 담겨있는 神靈스러운 氣運이라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내 마음은 내 몸에 들어 있는 靈魂이 아닌가?’ 이렇게 보통 생각합니다. 그렇게 生覺하면 그야말로

佛子로서는 큰 탈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限, 불교의 혜택을 절대로 입지 못하는 것이고, 불교에서

말씀하고 있는 和合이라는 큰 덕목(德目)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내 마음은 네 몸 안에 들어있고, 그대 마음은 그대 몸 안에 들어 있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조금 自己한테

기분 나쁘면 옆 사람하고 그냥 속상해 하고 비방도 하고 그렇게 不和하게 되지요. 그러나 우리 마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 어디에 있습니까? 머리에 있습니까? 腦에 있습니까? 가슴에 있습니까?

다리에 있습니까?

 

톨스토이가 自己 마음을 천착(穿鑿)한 그런 글을 좀 봤습니다만, 自己는 머리카락부터서 발끝까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마음이 들어있는 데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 문제를 나중에 부처님 가르침을 보고 비로소,

‘그럼 우리마음은 밖에 있는가? 어디에 있는가?’ 自己 안에 있지 않으면 밖에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정말로 마음만 正確하게 사무치게 깨달아 버리면 그 자리가 바로 成佛의 자리입니다.

 

 
따라서 우리 佛敎를 심종(心宗)이라고 합니다. 마음 心자, 마루 宗자, 心宗이라 합니다. 佛敎고 뭣이고

이름을 많이 붙이고 합니다만, 다 몰아서 이야기하면 우리 佛敎는 ‘心宗’입니다. 바로 마음의 宗敎란

말입니다. 그러면, 마음 밖에 物質이 분명히 있는데, 物質은 마음 거기에 對立되는 무엇인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모두가 마음으로 됐기 때문에 事實은 마음뿐입니다.

 

 
적어도 佛敎 가르침을 공부하신 분들이 ‘一切唯心造’란 理致를 모르는 분이 있겠습니까? 대부분 다

아신단 말입니다. 모두가 마음뿐이겠지, 옆 사람이 자기를 손톱으로 좀 할퀴면 - 마음뿐인데 -

아프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보통 사람들이 성내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 것은 모두가

다 우리 마음의 本體를 사무치게 알지 못해서 그럽니다.

 
이런 것을 分析的으로 아는 가르침이 佛敎에서 ‘석공관(析空觀)’이라, 분석할 析, 빌 空, 볼觀), 析空觀이라

합니다. 내 몸뚱이도 분석해서 ‘空’으로 돌립니다. 또 環境에 있는 對相的인 모든 것을 다 分析해서 空으로

돌리는 그런 공부하는 방법을 ‘석공관’이라 하지요. 분석할 석(析)자, 빌 공(空)자 말입니다.

 

 
析空觀을 간단히 말씀드리면, 가령 사람 몸뚱이도 분석해놓고 본다면 100조개의 各 細胞 아니겠습니까?

세포가 모였단 말입니다. 세포는 무엇인가? 세포는 각 분자(分子) 구조로 해서 적당히 결합한 것입니다.

분자(分子)는 무엇인가? 각 원소(元素)의 因緣에 따라서 모아진 結合體가 分子 아니겠습니까? 각 原子는

무엇인가? 原子는 마이너스  전자(電子)와 그 반대되는 양성자(陽性子)와 또는 중간되는 중성자(中性子)

이런 亞原子 粒子들이 모여있는 이것이 原子란 말입니다. 原子는 무엇인가? 原子는 눈으로는 도저히 볼

수가 없고 理論的으로만 겨우 알 수 있는 소립자(素粒子)라는 물질알갱이가 어떻게 振動하는가. 振動

여하에 따라서 마이너스가 되고 플러스가 됩니다. 이런 것이 電子 陽性子 中性子가 됩니다.

 

 
素粒子는 무엇인가? 소립자라는 가장 작은 알맹이 이것은 중성미자(中性微子)같은 아주 第一 적은 것은

空間性이 없습니다. 空間性이 없고, 또한 그 자리는 마이너스 電氣나 플러스 電氣 - 이른바 전하(電荷)가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結局은 텅~텅 다 비어있는 眞空이 돼버립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석공관(析空觀)은 이렇게 현대 물리학적으로 분석하지 않습니다만, 극유진(隙遊塵),

우모진(牛毛塵), 양모진(羊毛塵), 토모진(兎毛塵), 수진(水塵), 금진(金塵), 그렇게 되어 갑니다. 저 끝에

가서는 金塵이라, 쇠 금(金), 티끌 진(塵)입니다. 金塵의 다른 이름이 金剛塵, 또는 금金輪이라 하지요.

그래서 一切 存在는 분석하고 분석해서 끝에 가서는 모두가 다 하나의 金輪이 되어버립니다.

 

이 말은 바로 현대 과학적으로, 물리학적으로 말하면 一切 存在는 분석해 들어가면 모두가 다 波動하는

에너지가 되어 버린다는 말이나 똑같습니다. 그러면 분석한 뒤에 波動하는 에너지가 되고, 또는 분석한

뒤에 金輪이 되는가? 이런 理致에 대해서 佛子님들도 상당히 회의를 느끼고 방황도 많이 합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般若心經, 金剛經에서 색즉공(色卽空)이라, 物質이 곧바로 공(空)이란 뜻 말입니다. 아까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분석해서 종당(終當)에 다 空이 된다’는 도리와, ‘色卽空이라, 色은 物質이니까 物質이

바로 그대로 空이라’는 도리는 굉장히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상식으로 해서는 ‘분석한

뒤에 空인 것이지, 나도 물질이고 다 물질인데 왜 물질이 그대로 空인 것인가?’ 이렇게 疑問을 품습니다.

 

 
盲人에게 검은색을 말하고 또는 노란색을 말하고 푸른색을 말하면 맹인이 그것을 납득할 수 있겠습니까?

맹인은 모를 것입니다. 그와 똑같이 煩惱에 때 묻고 찌들은 우리 중생들한테, ‘天地宇宙는 부처님 光明으로

充滿해 있다.’라는 말을 해도 알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工夫를 해가지고서 우리 眼目이, 우리

마음이 밝아져서 천안통(天眼通)을 通하고 법안(法眼)을 얻으면, 또는 혜안(慧眼)을 얻고 청정불안(淸淨佛眼)

을 얻어 淸淨佛眼으로 본다면 우리가 보는 듯이 이 物質宇宙를 보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自己 眼目을 反省해야 합니다. 가끔 말씀드립니다만 우리가 ‘山은 山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하면

우리가 보는 山이나 道人들이 보는 山이나 똑같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對相은 한 對相이겠지요. 그러나

같은 山을 보고 같은 물을 본다 하더라도 똑같이 보는 것이 아닙니다.

 
소동파(蘇東坡)는 중국 당나라 때의 위대한 문인인 동시에 정치가 아닙니까? 소동파가 깨달아서 山을 볼

때는, 山을 부처님의 청정법신(淸淨法身)으로 본 것입니다. 그럼 시내에 흘러가는 물은 어떻게 보는가?

소동파가 볼 때는 부처님의 장광설(長廣舌)이라, 부처님의 사자후(獅子吼)같은 法門으로 봅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우리 중생들이 보는 見解와 똑같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반성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 ‘山은 山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하면 우리가 보는 물 그대로 사실로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것, 事物, 現象, 對相은 실존적(實存的)인 事實이 아닙니다. 참말로 진짜로있는 存在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 보는 것들은 모두 다 허상(虛像)만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佛子님들 공부하는 마음 자세가 가장 重要한 것은 객진번뇌(客塵煩惱)라 - 손 객(客)자,

티끌 진(塵)자, 번뇌(煩惱)를 객진(客塵)이라 합니다. 객진이란, 손님같은 本來 있는 것이 아닌 티끌이란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이나 또는 다른 사람 마음이나 天地宇宙의 마음이나 本來 텅~비어 空해서

청정무구(淸淨無垢), 맑고 깨끗해서 더럽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려우시더라도 꼭 本質的으로, 哲學的으로 佛敎를 알아야 합니다. 本質的으로 말하면, 우리 마음이 바로

淸淨한 法身, 眞理의 本體, 眞理의 바탕입니다. 마음이 바로 淸淨하단 말입니다. 淸淨한데 因果의 法則에

따라서 그때 잘못 보아 무명(無明)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럼, 淸淨法身은 어디에 별도로 따로 있는 것인가?

淸淨法身이라 하면 같은 뜻인데, 바로 宇宙가 청정한 법계(淸淨法界)인 同時에 淸淨한 法身이라, 따라서

내 스스로나 우리가 미워하는 사람이나 또는 다른 動物이나 宇宙萬物 모두가 다 淸淨法界, 淸淨法身입니다.

이 말은 따라서 事實은 宇宙萬物 그것은 모두가 物質이 아니라 텅~비어 空한 波動하는 에너지라는 뜻입니다.

 
呪文을 외우시든 話頭를 참구하시든, 무엇을 하시든 간에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淸淨法身 자리,

卽 우리들의 自性 자리, 本來面目 자리를 分明히 理解하고 우리들의 마음을 淸淨法身 자리 그 자리에 못

박으면서 工夫해야 참된 工夫가 됩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見解에 따라서 좋고 궂게 또는 나쁘게 보고 그릇되게 보는 것이지,

本來 淸淨法身 자리는 - 불교 도처에 있는 바와 같이 -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하는 자리 즉,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더하지 않고 덜하지 않고,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은 자리입니다. 오직

淸淨해서 앞서 法寶에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一切 모든 功德을 갖춘 本來空 그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이 煩惱 妄想라는 것은 本來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중생이 잘못 봐서 ‘이것이다, 저것이다,

좋다, 궂다’ 이것이 煩惱 아닙니까? 괜스레 그와 같이 우리 마음으로 지어서 만드는 그것이 煩惱입니다.

 
‘나’라 하는 것 ‘나’가 固定不變하는 實體로 獨立되어 있습니까? 獨立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常識的으로 볼 때는 내 몸뚱이, 내 소유가 이렇게 獨立해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 세상 어떤 것도 홀로

獨立해 있는 것은 없습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지금 宇宙法界는 電磁力, 電氣 磁氣의 파동 (波動)이

充滿해 있습니다. 물리학은 그것을 증명했습니다. 이 宇宙空間 속에나 별 속에나 사람 몸속에나 어느 것

어디에나 電氣나 磁氣의 波動하는 에너지가 充滿해 있습니다. 따라서 그런 電磁力의 波動하는 에너지가

波動치고 있는 것이 이 世上인데, 電磁力의 波動은 나에게만 있고 너에게는 없겠습니까? 電磁力의 波動

하는 에너지이 次元에서 볼 때는 나와 남이 딱 닿아 하나로 連結되어 있습니다. 그 징그러운 독사하고

나하고도 딱 닿아 하나로 連結되어 있고, 지금 바로 딱 닿아 連結되어 있습니다. 毒蛇가 앞에 있을 때

‘저 놈하고 나하고는 아무 關係가 없다고’ 하지만 波動하는 電磁力 次元에서는 딱 닿아 있단 말입니다.

 

 
그럼 불성(佛性)이란 무엇인가? 佛性은 電磁力보다도 더 根元的인 本質입니다. 이른바 가장 根元的인

實在 그 自體입니다, 어떤 것이나 다 佛性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고 佛性은 어디에나 언제나

充滿해 있습니다. 佛性이 어디에나 充滿해 있다고 생각할 때, 佛性 그것은 일반적인 物質이 아니고

空間性이나 그런 것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미운 사람과 自己 사이에도 佛性이 거기에 充滿해

있습니다. 이러한 宇宙의 道理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미운 사람, 곧 때려 죽이고 싶은 사람,

그 사람이 自己하고도 佛性으로 딱 닿아 하나로 連結되어 있단 말입니다. 이런 道理를 안다면, 어떻게

自己 것이라고 固執하고, 自己가 國會議員 되고자 해서 다른 사람 비방하고 중상모략을 하겠습니까?

 

 
따라서 무슨 生命 運動, 무슨 運動, 여러 가지 運動이 많이 있습니다만, 그런 運動을 한다 하더라도 다

좋은 것이지만,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哲學的이고 本質的인 運動을 해야 합니다. 어버이가 자식을

사랑해도 哲學的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 말은 무엇인가 하면, 우리 마음을 本來 佛性자리에다 두고

사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自己 아들한테나 딸한테만 執着할 수가 없습니다. 습기(習氣)가 있어서

단박에는 제대로 안되겠지만, 그래도 내 자식에 대한 너무 지나친 執着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구나 하고 그냥 反省하게 됩니다.

 
옛날에 한 장자(長者)가 있었는데, 장자니까 富者 아니겠습니까? 부자인데 내외간에도 참 잘 만나서 부부간

금슬도 화락(和樂)하고 아들도 출중한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부자니까 자기가 데리고 있는 종이나 그런

사람들도 많이 있었겠지요. 그 사람이 너무 부자이니까 임금도 시기를 하고 대신들도 시기 질투를 했습니다.

‘저놈 財産을 어떻게든 몰수해야 할 것인데’ 하고 말입니다. 옛날에야 그냥 專帝主義 時代인지라 그럴 수도

있었겠지요. 그래서 역모를 했다는 중상모략을 해가지고 무슨 올가미를 씌워서 잡아들였단 말입니다. 반역을

해가지고 역적질 했다는 것으로 해서 잡아들였는데 워낙 그런 根據가 없으니까 차마 죽이기가 곤란해서 여러

가지 어려운 問題를 提示했습니다.

 
王이 富者를 불러놓고 하는 말이, “여기에서 한 千里쯤 가면 한 城이 있는데, 그대가 칠일 안에 여기까지

돌아온다면 그대와 그대 자식이나 종들이나 재산이나 모두를 다 그대로 돌려주고 용서하겠다고 했습니다.

천리 길을 道步로 이레 안에 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못 간다고 할 때는 자기도 죽고 자기 가족도 다

죽고 재산도 몽땅 빼앗기게 되겠지요. 그래서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해서 갔습니다.

 

 
우리는 우리 人間의 힘을 絶對로 局限시키고 制限시켜서는 안 됩니다. ‘내 머리는 이 정도 밖에는 아니다.

’라고 스스로 힘을 制限해서는 안 됩니다. 人間의 힘이란, 本來가 부처이기 때문에 정말로 용쓰고 발휘하고

자기 스스로 편달(鞭撻)하면 부가사의(不可思議)한 힘을 꼭 내는 것입니다.

 
저도 6.25 전쟁 때 어떻게 이상한 일이 생겨 가지고 쫓겼습니다. 밤인데, 제 집에서 저 바닷가로 나가

배를 타고 도망갈 판인데, 제 집에서 바닷가로 가려면 한 사십 리나 됩니다. 그런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배가 닿는 곳 까지 가는 길에는 언덕도 많이 있고 아주 험준한 데가 많이 있습니다. 평소 같으면 도저히

함부로 가지 못합니다. 그런데 사십 리 길을 그야말로 밤에 자빠지고 넘어지며 가도 어디 상처 하나도

나지 않고 갔습니다. 제가 보기엔 삼십분 안에 거기까지 가버렸습니다. 참 그걸 생각할 때에 죽을 힘을

다하면 自己도 모르는 가운데 不可思議 한 힘을 냅니다.

 

 
그 장자도 그야말로 이레 안에 그 城에 도착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룻밤 자고 다시 또 이레 만에 이쪽

임금님 있는 데로 왔습니다. 그러니까 임금님도 할 수 없이 그가 미웠지만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장자는 석방이 되었습니다. 이럴 때에 장자가 용쓴, 용맹 정진한 힘은 굉장히 가상한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佛子님들이 부처님 法을 펴려고 菩薩行을 한다고 생각할 때 ‘내 몸뚱이 산다. 내 자식 살린다.

내 재산을 몽땅 그대로 보전한다.’ 그렇게 용쓰고 하는 것과 일반 중생들한테 베푸는 것 가운데 가장

좋은 베풂이 무엇인가? 그것은 本來 부처(佛)인 事實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本來 부처인 것을 깨닫게

하는 功德이 어째서 클 것인가? 이것은 우리가 다 아는 문제 아닙니까? 우주삼라만상이 本來 부처인

事實을 깨닫는다고 생각할 때는 금생(今生)에 누구에게도 어는 것에도 함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佛子님들을 가끔 만날 때에 이따금은 제 마음이 서글플 때가 있습니다. 어째 그런가 하면, 아무런

必要 없이 佛性을 허비한단 말입니다. 아무런 필요 없이 자기 이웃을 미워하고 서로 불화스럽게 지낸단

말입니다. 자기를 위해서나 남을 위해서나 남하고 不和할 만한 아무런 까닭이 없습니다. 뭣 때문에

그러는 것인가? 우리 스님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태안사에 살고 있다고 다른 스님네가 들어오면

“같이 사십시다. 제가 있는 것이 거북하면 저는 나가겠습니다.” 그러면 될 것을 남하고 다툴만한 아무런

까닭이 없습니다.

 

 
자기 집이나 자기 재산 남한테 다 줘버린다 하더라도 事實은 損害 볼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몸뚱이 죽고나면 自己 功德만 남습니다. 今生은 참 꿈 같이 虛妄합니다. 좋은 사람이나 궂은 사람이나

미운 사람이나 사랑하는 사람이나 모두가 다 얼마 가지 않아 흔적도 없이 갈 존재들입니다. 오늘 일을

모르고 내일 일을 모르는 것이 人生 아니겠습니까? 今生은 정말 虛妄한 것입니다. 그런 虛妄한 人生

속에서도 그나마  남한테 좋은 功德을 짓는 것은 죽어서도 功德으로 남는 것입니다.

 
自己 아들이 좋은 學校에 못 들어간다 하더라도, 그것도 조금도 損害가 아닙니다. 지금 못 들어갔기

때문에 그것이 인(因)이 되어서 더 잘 될 수가 있습니다. 지금 잘 된 것이 도리어 나중에 그것 때문에

잘못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인생만사(人生萬事) 새옹지마(塞翁之馬)라, 잘 된 것이 도리어 나중에

災殃의 根本이 될 수 있고, 잘못된 것이 전화위복(轉禍爲福)되어 더 잘되는 수가 얼마나 많습니까?

 

 
따라서 어떤 경우든지, 事業에 失敗하거나 남이 배신하거나 自己 배우자가 지금 눈앞에서 곧

돌아가시거나 부처님 法으로,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哲學的으로 보면 아무 損害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雲門禪師가 말씀하신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라 - 날마다 좋은 날이라, 이 말은 그냥

아무렇게나 무엇이 잘 되어서 좋은 날이라는 말은 절대로 아니란 말입니다. 淸淨法身, 佛性, 本바탕,

自己 本來性稟 자리에서 보면, 오늘이나 來日이나 今年이나 來年이나 모두가 다 좋은 날이요 좋은

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이른바 參禪 工夫를 한다하더라도 無時禪, 때 없이 참선이 됩니다.

선방(禪房)에만 죽치고 앉아있는다고 참선이 되는 것이 아니라 行住坐臥, 걸어가나 서나 앉으나

눕는 것이 모두 禪, 法, 眞理, 부처(佛), 道, 마음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 本來性稟 자리,

淸淨法身 자리에서 떠나지 않고 하나로 있는다면 그것은 언제나 參禪입니다. 그러나 禪房에서 비록

위의(威儀)를 가지고 앉아 있다 하더라도, 화두(話頭)를 참구하고 염불(念佛)하고 한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이 本래性稟 자리를 떠나있다면 그것은 참선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 生命이듯이 부처님, 本來性稟 자리, 淸淨法身은 바로 生命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공부할 때도,

특히 在家佛子님들께서는 바쁜 몸이시고 복잡하고 人生苦海를 헤쳐나가는 중인지라 여러 가지로 苦厄이

많으므로 꼭 마음의 依持處가 必要합니다. 부처님을 그래서 대의호(大依怙)라 - 의지할 의(依), 믿을 호(怙)

 - 우리 마음이 믿고 依持할 곳입니다. 사람 사람끼리야 기분 사납고 자기한테 해로우면 배신한다 하더라도

부처님이 배신하시겠습니까? 부처님은 분명히 필경의(畢竟依)입니다. 대의호라, 믿고 의지할 곳입니다.

 

 
그러기에 재가 불자님들은 바쁘고 여러 가지 고액(苦厄)이 많으시니까 生命을 生命으로 참구(參究)하는

그런 方法을 取하시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그 말씀은 어떤 말씀인가하면, 부처님을 그냥 부처님 이름으로

숭상(崇尙)한단 말입니다. 生命이기 때문에, 가령 ‘無 無 無 無’하고 부처님, 本來性稟 자리, 淸淨法身을

求하면, 生命을 生命으로 추구하는 그런 것은 가슴에 딱 안 나오지요.

 

 
그러나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이렇게 念佛한다면,

‘아! 부처님은 人格이구나, 부처님은 生命이구나.’ 하고 알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한테 이름이 붙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부처님은 生命인지라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의 무량신통묘지 (無量神通妙智)로 해

가지고서 그와 같이 부처님, 本來性稟 자리, 淸淨法身 자리의 功德에 알맞게 이름을 붙였습니다.

 
‘나무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은 우리 중생들이 아무렇게나 붙인 이름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生命에

걸맞게 석가모니부처님이 - 天地宇宙의 모든 道理를 相 性 體 力 作 因 緣 果 報 本末究竟을 通해서 다

아시는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거기에 걸맞게 붙인 不思議 한 이름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지장보살’이라는 稱名입니다.

 

 
따라서 그런 이름들은 淸淨法身 자리, 本來性稟 자리인 부처님을 生命으로 숭앙(崇仰)하는 하나의

工夫 方法입니다. 故鄕같이 임같이 우리 마음이 依持가 딱 되어버려야 힘이 생깁니다. 얼마나 社會가

複雜합니까? 그냥 심상(尋常)하고 평범한 방법으로는 우리의 不安한 마음을 解消 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이시여! 부처님이시여!’ 生命인 부처님, 淸淨法身 자리, 本來性稟 자리가 정말로 自己 故鄕,

自己 가슴에 딱 들어 앉아있어 버려야 남들을 相對할 때도 조금 氣分이 사납다 하더라도 상(相)도

안 내고 다투기도 안 한단 말입니다. 남하고 不和스럽게 지내려면 차라리 佛子라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和合을 깨뜨릴만한 理由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양보하면 양보한 만큼 自己에게 得이 됩니다. 自己가

몰라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自己가 양보하고 ‘아! 제가 잘못했습니다.’ 自己가 잘했더라도 그래 버리면,

그때 그것이 自己에게 得이 됩니다. 남하고 和合하기 참 쉬운 것입니다.

 

 
나도 부처고 너도 부처고 다 부처인데 어디에다 대고 우리가 무슨 교만심을 낼 필요가 있습니까?

콧구멍이 自己입니까? 눈이 自己입니까? 부처님 法에서 볼 때는 自己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五蘊의 構成은 色은 地水火風 四大 산소, 수소, 질소, 탄소로 結合된 이 몸뚱이,

結局은 텅~비어 空하단 말입니다. 텅~빈 것을 있다고 우리가 잘못 보고 있는 것입니다.

 
電磁氣力등 모든 에너지의 波動, 불교식으로 하면 불성(佛性)의 振動, 佛性의 波動입니다.

佛性이 어떻게 振動하고 波動하는가 이니다. 따라서, 波動하는 에너지, 佛性 次元에서는 모두 하나입니다.

정말로 和合하셔야 합니다. 부부간에 和合하시고, 사랑하는 부녀간, 모녀간에 다 和合하셔야 합니다.

和合하지 못하면 今生에 事實은 살 價値가 없습니다. 和合하지 못하면 그때는 업(業)을 짓는 것입니다.

묵은 業을 지을 바에는 今生에 무슨 必要로 태어났습니까?

 

 
今生에 태어났다고 할 수 있는 價値는 무엇인가하면, 今生은 수련도장(修練道場)입니다.

이번 生은 成佛하기 위한 도량입니다. 成佛하기 위해서 상(相)을 하나둘씩 차근차근  없애야 합니다.

그래서 적어도 임종(臨終) 때는, 天地宇宙의 生命 自體인 阿彌陀佛이나 觀世音菩薩이나 地藏菩薩 같은

菩薩님들이 分明히 우리를 마중하시는 것입니다. 영접을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모양으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光明의 몸으로 와서 영접하시는 것입니다.

 
‘나’라는 生覺, 觀念이 떠나고 남한테 베풀고 남한테 잘하고 자타(自他)의 觀念이 희미할수록 그러한

성중(聖衆)들이 불보살(佛菩薩)의 光明의 몸으로 오셔서 우리를 引導하시어 그냥 卽時에 바로

금색연화대(金色蓮花臺), 光明의 蓮臺를 타고서 極樂世界로 가시는 것입니다. 極樂世界는 무엇인가?

極樂世界는 바로 宇宙의 실상세계(實相世界), 淸淨法身 자리, 本來性稟 자리, 法身佛 자리입니다.

 

 
전수행자(專修行者) 천무일실(千無一失)이라, 오로지 私心 없이 修行한다고 생각할 때는 천무일실이라

- 일천 천(千)자, 없을 무(無)자, 한 일(一)자, 잃을 실(失)자 - 한 사람도 빠지지 않는단 말입니다. 私心

없이 진정으로 공부한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천무일실 - 천 사람도 빠짐없이 다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잡수행자(雜修行者) - 이것저것 뒤섞어서 수행을 했다 말았다 하는 그런 사람들은

천무일득(千無一得)이라, 한 사람도 얻지를 못하게 됩니다. ‘전수행자 천무일실’입니다.

 

 
꼭 今生에 우선 自己의 幸福을 위해서, 自己 家族의 幸福을 위해서, 또는 自己 마을을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인류를 위해서, 어떤 것을 위해서나 부처님, 淸淨法身 자리, 本來性稟 자리,

宇宙 實相世界한테 歸依하는 길이 가장 最善의 길입니다. 이렇게 해서 위없는 幸福을 누리시길

간절히 바라면서 법문을 마칩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 마하반야바라밀

 
*이상의 법문은 청화 큰스님께서 1992년 3월1일 태안사 정기법회에서 하신 법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