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생명이란 연(緣)을 만나 운행하게 되는 것

장백산-1 2015. 9. 10. 18:22

 

 

생명이란 연(緣)을 만나 운행하게 되는 것

 

 

10조 9만 5천 48자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화엄경》에 관한 연구와 번역을 17년을 두고 지속해

오다가 지난 1974년에 완간完刊을 보았다. 이런 나를 두고 혹시 건강에 문제가 없는지 평소에 어떻게

섭생을 하는지 궁금해 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나는 별다른 섭생은 하지 않는다. 내가 건강을 유지하는 길이라곤 딱 한 가지뿐이다.

卽 生命의 본처(本處) 자리로 恒常 나를 귀경(歸竟)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있을 뿐이다.

이때 努力이란 四方에 神經을 안 쓰는 것이다. 즉 神經을 쓰면서도 안 쓰는 도리가 있을 뿐이다.


生命의 本體는 무형(無形), 卽 時空이 끊긴 자리다.

生命의 本體는 無形이지만, 그 本質인 씨(種子)가 4대[地-水-火-風]의 연(緣)을 만나 運行하게

되는 것이 生命이다.

 

그렇다면 생명의 구체적 표상은 곧 이 肉體를 집으로 하여 아(我; 소아)로 나타나는 것일 텐데,

이것을 어떻게 올바르게 運行해야 할까? 답은 한 가지, 무아(無我)가 되는 것뿐이다.

無我가 되지 못하고 유아(有我)일 때 본명(本命)의 本處 자리에서 離脫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고苦가 생기고 아픔이 일어난다. 道란 無我를 이루어 나가는 길이다.

 따라서 無我가 될 때만이 緣을 自由自在로 요리할 수가 있다.


 

어떤 生命이나 일이 되었든 착수했다면 한 번은 끝나게 되어 있다.

조그만 세사(世事)조차도 착수한 일은 끝을 보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一大事인 無我가 되는 일에 착수해 놓고 끝을 맺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肉體를 가지고 世上에 온 生命이 무수할 텐데,

과연 이 수많은 生命 가운데 無我를 이루어 본처(本處)로 歸還한 個體는 과연 얼마나 될까?

고작 聖人 몇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 理由는 어디에 있는가? 모두 有我로 머무르다 끝나기 때문이다.

有我는 執着해서 꿈속에 빠져 지내므로 凡夫로 떠돈다.

그러다 보니 輪廻에 떨어지고 業을 지어 本體를 잃어버리고 헤매게 된다.


우리는 ‘衆生’이라는 單語가 얼마나 무서운 말인 줄을 알아야 한다.

有我로서는 因緣을 만나야 조금이라도 運行할 수 있지만,

無我가 되면 因緣 自體를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衆生인 까닭에 無我의 길에서 恒常 離脫하고 만다.


 

그렇다면 衆生의 一生은 恒常 헛되이 그치고 마는 것일까?

물론 그렇지는 않다. 無我이고자 하는 努力은 비록 이번 生에

道를 이루지 못했다고 해도 來生을 위한 씨앗이 되기 때문이다.


人生을 臨終 演習이라거나 涅槃 演習이라고 生覺하는 사람들이 있다.

結局 되는 대로 살아 버린 人生, 卽 自我의 擴張이나 出世 혹은 物質 蓄積에 매료되어

살고 있는 人生은 허무하기만 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代身 우리는 工夫를 해야 한다.

分明히 밝히지만 工夫를 한다는 것은 결코 헛된 演習이 아니다.

當代에 無我가 되자는 發心을 해야 한다. 無我의 境地를 볼 수 있으면 더욱 좋고,

혹시 보지 못한다고 해도 工夫를 한다는 것은 결코 불필요한 연습이 아니다.

공부는 분명히 來生에 훨씬 뛰어난 씨앗을 만드는 인因이 될 테니 말이다.


 

이때 道의 자리는 모든 사람이 동일한 모습은 아니다. 道의 자리만큼 계급이 세밀한 것도 없다.

無我의 경지를 보았다고 해서 行動이 투철해지는 것은 아니다. 힘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無娥를 보았다고 해도 힘에 있어서는 賢人을 당하지 못하다.


때때로 賢仁이나 聖人도 시운(時運)에 따라 움직인다는 말이 있다.

현실적인 시류에 영합해 간다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틀린 말이다.

賢人이나 聖人은 어느 때나 無我다. 오늘날 그 풀이가 잘못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無我는 時空의 本處인데 가당치 않은 말이다.


불교의 내세관에서는 내세를 부정하면 현실도 없어야 한다. 요약해서 말하면 오늘이 있으니 어제가

있었고 내일이 있고, 금년이 있으니 거년(去年)이 있었고, 내년이 있다. 현재가 있으니 과거가 있었고

미래가 있다는 삼세,즉 삼세윤회설(三世輪回說)을 철두철미하게 말한 것이 불교다.

그래서 언제나 콩을 심으면 콩이 나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난다는 因果法則은 추호도 어김이 없다.


불교 경전 중 《인과경》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전생의 일을 알려면 금생에 받는 것이 전생 일이고, 내생의 일을 알려면 금생에 짓는 것이 내생 일이라. 


이 구절에서처럼 來生의 문제는 今生에 지은 선이나 악을 생각해 보면 그 속에 다 들어 있다.

어리석은 사람들 중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이들이 있다.

“전생에서 아버지나 할아버지 또는 조상들 중에 누가 무슨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생에 이렇게 태어난 것이 아닌가 생각하면 좀 위로가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불교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과는 좀 다르다고 하겠다.

 

탄허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