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영혼을 넘보는 국가주의
경향신문 박원호 | 서울대 교수·정치학 입력2015.11.17. 20:34기사 내용
국가는 도처에 있다. 증명서를 떼러 간 주민자치센터에도, 시위대를 향해 뿜어져 나오는 최루액에도 국가는
너무도 명백히 현존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길의 오른쪽으로 걷게 된 우리의 보행습관에조차 국가는 숨어있
다. ‘올바른’ 역사교육을 통해 개인들의 ‘비정상적인’ 영혼까지 ‘정상화’-내가 보기에는 정화(淨化)라고 쓰는
것이 더 맞겠다-하려는 대통령의 말을 들어보면, 이제 우리의 국가는 시민들의 생활을 넘어 의식과 심령의
영역까지 넘본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유례없이 강력한-군사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국민에 대해서-국가를 가지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국가에 대한 갈증에 덧붙여, 북한이라는 외재적 위협이 있었고, 조선왕조가 세계사적으로 이례적인 관료제를 남겨놓았으며, 일제의 철권통치 또한 강력한 국가의 전통으로 남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주요하게는, 일제통치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모든 사회조직과 작은 공동체들이 파괴된 자리에 남아있는 것은 먼지같이 흩어진 개인들뿐이었고, 그 위에 강력한 국가가 들어서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본 단락에 북한을 대입해서 읽어도 과히 틀리지는 않는다.
국가는 우리에게 성공의 지름길이자 상징이기도 하였다. 국가가 앞장서고 기업이 뒤를 따르는 산업화
과정에 필요한 것은 국민들의 헌신적인 응원과 희생이었고, 국민교육헌장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한국 국민들을 불러내는 데 여념이 없었다. 국가는 국민의 총합보다 더 큰 것이며,
국가를 통해 국민은 무엇인가를 실현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국민은 축구경기를 응원하는 것
처럼 무역흑자에 환호했고, 올림픽 메달순위만큼이나 경제규모 순위는 우리의 성공을 확인하는 지표이
기도 하였다.
동시에 국가는 우리의 극복 과제이기도 하였다. 우리의 민주화가, 그리고 21세기의 시대정신이 우리에게
가르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국가를 위해 국민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시민)를 위해 정부가 존재하
고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국민이 시민이라는 말로 대체되고, 동사무소가 주민자치센터로 바뀌는
과정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의 행복과 삶의 질을 가꾸어가는 것이야말로 국가와 정치의 존립목적이
라는 깨달음이었고, 이것은 되돌이킬 수 없는 우리의 정치발전과 궤를 같이한다.
그러나 여전히 곳곳에서 촌스럽고 철 지난, 그러나 섬뜩한 국가주의의 잔재를 본다. 국가가 원하는 ‘올바른’
국정 역사교과서에 대한 비판이야 너무 많이 이야기된 바이지만, 이를 통해 ‘정상적인’ 혼을 가진 국민들을
주조하겠다는 공개적 언급은 국가주의의 새로운 차원을 연 것으로 평가할 수 있겠다. 사상과 양심의 자유라
는 핵심 인권을 침해했던 사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느 현대국가에서 이토록 노골적으로 국가 이데올
로기를 국민에게 주입하고 테스트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언급한 사실이 있는지 기억이 아득하다.
만약 2015년 오늘에 새삼 국가주의-“국민통합”-가 필요하다면, 왜 필요하고 얼마나 필요한가. 북한이
두려워서 그렇다면 그것은 사상적인 두려움인가 군사적인 두려움인가. 세계 정세와 경제 상황이 요구한
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 때문에 얼마만큼의 국가주의를 지불하기를 원하는가. 나는 설득될 준비가 되
어 있다.
안타까운 점은 이러한 내용들이 토론과 숙고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과 추종의 대상으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지난 주말 시내를 가득 메운 시민들의 외침이 무엇이었는지는 증발해 버리고 모든 것이 시위와
진압의 폭력성 시비로 졸아들어 버린 자리에서, 시민들은 여전히 앞서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물론 역설적이게도, 국가주의를 소환하면 할수록 우리의 ‘국격’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대통령 직속
국가브랜드 위원회는 명심해야 할 것이다. 선거가 몇 달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다.
<박원호 | 서울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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