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 무상 = 무아 = 무자성 =공 = 자비
소유와 욕망을 무한히 늘리려는 인간의 탐욕심과 자연과 인간을 분별하고 나눠서 인간이 자연 위에
군림하려는 이분법적인 분별심과 서양 동양, 백인 흑인, 남성 여성, 강자 약자, 인간 짐승, 인간 자연,
신 인간 등으로 분별해서 나누어 놓고 그 것들 중에서 서양, 백인이남성, 인간, 신등이 자신들이 아닌
다른 한 쪽을 지배해야 한다는 그런 어리석은 我執등이 바로 이 세상 모든 문제들의 原因이고 그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어리석음, 즉 無明입니다.
무명은 밝음이 없다는 말로, 이 세상의 이치와 실상에 밝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무명에서 명으
로, 즉 어리석음에서 지혜로움으로 가려면, 다시말해 이 세상의 이치와 실상에 밝아지려면 무엇을 깨달
아야 하는가 하는 답변을 이번 글에서는 좀 어려운 말이지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겁니다.
"온갖 現象으로 현시되어 있는 이 세상 모든 것들, 우주만물은 연기(緣起)되어 있는 것들이므로 무상
(無常), 무아(無我)이고 무자성(無自性)의 공(空)이어서 자비(慈悲)라는 사실" 언뜻 보면 참 어려운
말인데요,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온갖 현상으로 現示되어 있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은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고 모든 것들은 서로 서로 상호 연결되고 연관되어 의지해서만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
다는, 그렇기에 네가 없으면 내가 없고 내가 없으면 네가 없고, 자연이 죽으면 나도 죽고 내가 죽으면
자연도 죽고, 여자가 없으면 남자도 없고 남자가 없으면 여자도 없고 하듯이 이 세상 모든 萬物은
상호의존해서 연결되고 연기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현상으로 나타나 있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서로 연기되어 있다는 말은 다시말해 이 세상 모든 것
들도 전부 다 끊임없이 서로 서로 의존관계, 인연관계로 맺어져 있으면서 끊임없이 變화해 간다는
말입니다. 변하는 것은 그 어떤 실체성도 없지요. 실체가 있다는 말은 고정 불변한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변한다는 말이 무상이고, 실체가 없다는 말이 무아인 것입니다. 무아란 말은 다시말해 고
정된 자성, 즉 자기 스스로의 변치않는 성품이 없다는 뜻이니까 그것이 무자성이라고도 말해지고 공
이라고도 불리우는 것입니다.
大乘佛敎에서 말하는 空사상이 곧 緣起사상를 말합니다. 즉 온갖 현상으로 나타나있는 이 세상 모든
것들, 우주만물은 연기되어서 현시되어 있는 것들이기에 고정된 실체가 없는 空이다. 연기된 것들이
기 때문에 항상 변하는 것이고(무상) 항상 변하니까 스스로의 성품이 없고, 즉 내가 없고(무아) 그것
은 곧 무자성이기도 하고 공이기도 한 것이지요.
그렇듯 온갖 現象으로 드러나 있는 이 세상 모든 만물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서로 의지해서 연결되어 있고 연관되어 있다면 이 세상 모든 존재들이 서로 서로 다른 것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온갖 현상으로 현시되어 있는 이 세상 모든 존재가 모든 것들을 존재할 수 있게 해 주는 작용이 緣起
입니다. 이 세상에 관한 사실이 이러하니까 현상으로 드러나 있는 이 세상 어느것 하나 중요하지 않
은 것는 겁니다. 내 몸이 소중하듯이 상대의 몸도 소중한 것입니다. 내 몸이 곧 상대의 몸을 의지해서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잘났다고 나 혼자 독자적으로 잘난 것 같지만 이 세상의 이치를 알고 보면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다.
내가 이렇게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데는, 부모님의 노력, 선생님의 노력, 농부의 노력, 친구들의 도움, 더
나아가 太陽과 흙과 자연과 공기와 이 우주 모두가 그대로 나를 이렇게 나일 수 있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우주, 법계, 진리의 세계 모든 것들이 지금 여기 있는 나를 나일 수 있게 해 준 부모와 같이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는 것들이고 , 나아가 우주가 곧 나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자비롭게 대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겁니다. 우주만물 일체 모두는
同體 즉, 같은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慈悲를 同體大悲라고도 말 합니다. 현상으로
나타나 있는 이 세상 만물은 같은 몸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자비심이 나오는 것 그것을 큰 자비, 참된
지혜가 동반된 자비심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참된 지혜가 동반된 자비심 그것이 불교의 불이(不二) 법문이지요. 둘로 나누지 않고 분별하지 않는다는
말이 不二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서양과 동양, 백인과 흑인, 남성과 여성, 나와 너, 인간과 자연, 신과 인
간으로 나누어서 분별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이겠어요?
그렇게 분별하고 나누지 않으면 세상이 평화롭습니다. 차별이 없고, 비교가 없고, 시비가 없고, 싸움이
없어요. 누가 누구를 지배한다는 생각도 없어집니다. 그런 지혜가 바로 무명을 없애 줄 수있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우주대자연은 욕망과 소유 지배의 대상이 아니라 존중과 배려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자연과 인간간의 관계가 지금까지 처럼 자연을 파괴하고 마음대로 인간의 편의를 위해
개발하고 가져다 쓰고자 하는 분별과 대립의 관계 욕망추구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 상호 존중
하고 공존 공생하며 상호 보완해 주는, 서로가 서로를 무한히 살려주는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자연이
인간을 품어주고 인간이 자연을 품어주는 어머니와 자식과도 같은 따뜻한 관계가 되는 것이지요.
인간과 자연의 상호관계가 부모 자식과 같은 그런 관계가 되었을 때 지금과 같은 몰인정한 딱딱한 이
세상도 좀 더 따뜻한 세상이 될 수 있습니다. 분리 분별하지 않고 나누지 않고, 차별하지 않으며, 군림
하지 않으니까 배타적으로 나만 잘났고, 나만 잘 살면 되고, 나만, 우리만, 내 나라만, 사람만 잘 살면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만물 모두가 함께 자기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으면서도 나아가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저마다 이 세상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모든 分別心, 분별의식, 차별의식을 내려놓으라고 합니다. 시비 분별하기를 좋아하는
인간의 생각 번뇌 의식 마음 망상을 버리라고 합니다. 분별하지 않아야 차별하는 생각이 없어지고, 차별
이 없어지면 지배와 종속이라는 어리석은 관계도 청산이 되는 겁니다.
차별하고 분별하면 서로 더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싶어지고, 지배하고 싶은 욕구가 자리잡아지기 때문에
끊임없는 욕망과 욕심 의도와 의지 그리고 집착이 커집니다. 그러면 우주만물의 본래 자리에 있던 생명력,
본래의 자비로 충만한 평화로움은 곧 사라지게 되는 겁니다. 바로 이 점을 깨닫는 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이제 이 말 뜻을 아시겠어요? "온갖 현상으로 드러나 있는 이 세상 만물은 서로가 연기(緣起)되어 나타나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고정되고 독립적인 실체가 없는 것들이어서 무상(無常) 무아(無我)고, 무자성
(無自性)의 공(空)이어서 자비(慈悲)라는 사실" 이 말의 뜻을 아셨겠지요.
-법상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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