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걸고 人生걸고 나가야 할 그곳은?
먼저 번에는 이 번 人生에서 人間이 과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하나에 대해 살펴
보았습니다. 人間이 그동안 살아오면서 목표로 삼고 人生을 살아왔던 돈, 재산, 지위, 권력, 사회적
영향력, 학벌, 외모, 지식, 예쁜 옷, 온갖 명품들, 특정하고 많은 지식들, 특별한 행복한 느낌, 특정한
욕망과 바라는 것, 그것들은 全部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유통기한이 있는 有限한 것들로서 고정불변
하는 독립적인 실체가 없는 것들이라는 사실을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내 목숨과 인생을 걸고 고정된 실체가 없는 허망한 그것들을 위해 살아왔는데, 그것들은 人間이 그것
들을 성취하는 순간, 머지않아 반드시 허망하게 사라져갈 것들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니 왔다가 사라져
가는 그것들 그 허망한 生死法, 生滅法에 목숨 걸고 인생을 걸고 산다는 事實이 얼마나 허무하고 잘못
된 엎어지고 자빠진 꿈 같은 허망한 妄想 즉, 顚倒夢想(전도몽상)입니까?
그렇다면 그렇게 오고 가는 것이 없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이 없이 , 有限한 것이 없이, 진정 가치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佛敎에서 흔히 말이나 문자라는 方便을 써서 佛性, 自性, 主人公, 一心,
한마음, 本來面目등의 이름으로 불러왔던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들 이름은 말 그대로 오고 가는 것이 아닌,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닌, 유통기한이 없이
無限한, 진정한 가치가 있는 그것을 方便으로써 이름지어 그렇게 부를 뿐이지만 그것은 그럴게 불릴
만한 어떤 特定한 對相이나 境界가 절대 아닙니다. 그것은 特別하게 定해진 모양도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감촉을 느끼고 생각으로 헤아려서 알 수 있는 認識할 수
있는 認識의 對相이 절대로 아닙니다. 對相이 認識이 되려면 對相이 있거나 없어야 認識이 되는데,
이것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없는 것도 아닙니다.
無我, 空, 無常, 無住相 등 이라고 말 할 때는 이것의 없는 것 같은 特性을 말이나 글이라는 方便을
사용해서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고, 참나, 진짜 나, 本來의 나, 根源의 나, 佛性, 佛(부처), 本來面目,
主人公 이라는 언어나 글이라는 방편을 써서 말 할 때는 이것의 있는 것 같은 特性을 이들 말이나
글자라는 方便인 참나, 진짜 나, 근원의 나, 본래의 나, 불성, 부처, 본래면목, 주인공 등을 사용해서
이것을 설명하는 것일 뿐이지만, 事實 이것은 있고 없음을 超越하는 常住不滅, 不生不滅의 영원한
생명 자리입니다.
이것을 여기 이 자리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어떤 特定된 空間을 占有하는 어떤 자리가 아닙니다. 또한
이것을 지금 이 순간이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特定한 時間的인 어떤 時點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
래서 이것에 어떤 이름을 붙이는 그 순간 事實은 이것은 이것이 아닌 것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이름
지을 수도 없고, 모양 지을 수도 없으며, 더욱이 생각 할 수도 없는 것이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空往色來 色往空來 즉, 공이 물러가고 모양있는 것이 오고, 모양있는 것이 물러가고 공이 온다
고 표현하고 또는 이것을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즉, 색과 공이 다르지 않고 공과 색이
다르지 않고 색이 즉바로 공이고 공이 즉바로 색이다 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인간의 마음이라고 하는
受, 想, 行, 識 즉, 느낌 감정, 생각 상상 이미지, 욕망 욕구 충동 의도 의지, 분별심 분별의식 인식도 이와
같이 즉바로 공이고 공이 즉바로 수 상 행 식입니다.
이것은 나고, 죽는 것이 아닙니다.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주만물이 태어나기 이전에
도 이것은 있었고, 이 肉身이 죽어서 사라진 다음에도 이것은 여전히 있습니다. 내 몸이 죽더라도 이
것은 조금도 손상되는 법이 없습니다. 원자폭탄 수소폭탄이 수백, 수천개, 수억개가 터지고, 宇宙 全
切가 통째로 폭발해서 멸망해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것은 전혀 움직임도 없고 사라짐도 없고 상처 입
지도 않고 그대로 있습니다.
이것은 우주와 삼라만상만물, 이 세상 그 모든 것의 本質, 본바탕이며 배경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온갖 現象으로 現示된 우주삼라만상만물, 우리들,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이것으로부터 나오고, 人間이
生覺하고 말하고 行動하고,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느끼고 생각해서 아는 認識 作用, 이 모든 것
이 全部 이것 아님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보는 것이 이것이라거나, 듣는 것이 이것이라고 말 할
수는 결코 없습니다. 이것은 어떤 경우에도 결코 ‘이렇다 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설명하는 方便은 主로 ‘이것이다’라고 하지 않고 ‘이것도 아니다’ ‘저것도 아니다’라는
表現을 쓸 수밖에 없는 겁니다. 無我 즉 내가 없다, 無分別 즉 분별할 수 있는 것이 없다, 無常 즉 恒常
하는 것이 없다, 모든 것이 끊임없이 恒常 變化한다, 無相 즉 相이 있는 것이 없다, 無所有 즉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없다, 無所得 즉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다, 無邊 즉 테두리 가장자리가 없다, 不二 즉 둘
이 아니다, 이런 방식으로 표현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것입니다. ‘이것이다’라고 말하면 벌써 이미 定
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미리 定해진 무언가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것을 無有定法이라고도 말
합니다.
宗敎나 思想의 最高의 窮極에 이르르면 그 때엔 어느 宗敎나 思想이나 어디에서든 이것, 이 자리를 설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것 이 자리야말로 우주삼라만상만물, 이 세상 모든 것들, 우리들 모두의 본래
고향이며, 우리들이 돌아가야 할 依持處, 歸依處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 이것을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말이 바로 '그대가 그것이다’ 라고 하는 표현입니다.
장자는 ‘그것은 모든 것 속에 있다... 그것은 限界가 없이 無限하다... 그것은 原因과 結果를 창조하지만
原因과 結果는 아니다..萬物이 여기에서 일어나고 영향을 받는다. 그것은 萬物에 內在하지만 萬物과
같지는 않다’ 라고 표현했습니다.
카비르는 ‘萬物에 깃든 하나만을 보라’고 했고, 大乘佛敎에서는 이것을 ‘不二法’, 一乘, 一佛이라는 표현
을 사용했습니다. 永遠한 이 不二의 자리, 一乘, 一佛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人生과 목숨을 걸고 나아가야
할 바로 그 곳,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입니다.
-법상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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