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자신이 되는 길?
진실한 수행자는 '수행자'라는 相으로부터 自由로운 사람일 것이다. 또한 참된 종교인은 '종교인'이
라는 相으로부터 自由로운 사람일 것이다. 그런 고정관념의 틀에 갇혀있는 사람이 아니다.
眞理는 일정한 틀이나 규정을 정해 놓은 것이 아니다. 어떤 규정이나 틀을 미리 정해 놓고 이대로만
행한다면 진리인데 이 틀을 한 치라도 벗어나면 眞理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런 진리는 인간의 삶을
구속하고 억압하는 폭군이지 眞理가 갖고 있는 自由性(자유로운 성품)이 아니다.
수행을 하면서도 '내가 수행을 한다'는 그 生覺(相)조차도 내려놓고 비우고 갈 수 있어야 한다. 執着
하는 마음을 내려놓는 放下着의 수행을 실천하는 사람이 스스로 ‘집착심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生覺
에 마음이 걸려 있으면 그 사람은 집착심을 내려놓기는 커녕 오히려 집착심을 븥잡고 가는 사람이고,
그것이 오히려 더욱 큰 집착심을 키운다.
집착심을 내려놓고 가면서 내려놓는다는 그 생각도 다 내려놓고 가야하고, 수행을 하면서 수행한다는
그 생각도 다 내려놓고 가야 한다. 수행을 하는 사람이 수행을 하지 않는 사람을 볼 때 우쭐한 마음이
생긴다거나 나 잘난 마음이 올라온다면 나는 '수행하는 사람'이다 라는 相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제 스스로 수행자라는 틀(相)에 얽매여 있는 어리석고도 위험한 사람이다.
세상 모든 것이 이와 마찬가지다. 학벌이나 직장이 좋은 사람이, 혹은 더 많이 배운 지식인이 스스로
나 잘났다고 우월감을 가진다거나,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향해 비웃거나 얕잡아 본다면 그건 전혀
지혜롭지 못한 사람이다.
相을 내는 것을 무서운 줄 알아야한다. 수행자라는 相도 하나의 分別心일 뿐, 수행자라는 分別이 있기
때문에 수행자가 아닌 사람을 얕보는 마음도 생기고, 나는 수행 안 하는 사람하고는 다르다는 차별의
마음도 생기는 것이다.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눈에 수행자다운, 성직자다운, 종교인다운 사람으로 보이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그렇게 의도적으로 애를 쓰는 것이 또 다른 하나의 장애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저 평범한 나, 일상적인 자기 자신이 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수행자는 이래야 한다는 틀이 정해져
있다면, 그래서 수행을 하는 사람들이 '수행자답게' 수행자다운 삶을 살려고 애쓰고 노력한다면 그 때
수행자를 한 명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수행자답게 사는 삶은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하는 삶이 아닌 그저그냥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 아닐까.
누구처럼도 아니고, 깨달은 사람처럼도 아니며, 누구 눈치를 볼 것도 없고, 어떤 관념의 틀에 사로잡힐
일도 없이 그냥 그저 평범하고 온전한 나 자신이 되는 것 그것이 수행자의 진실한 모습이 아니겠는가.
나답게 사는 삶이야말로 가장 수행자답게 사는 삶일 것이다. 맑은 수행자에게서는 맑은 향기가 난다.
그러나 맑은 그 향기는 '수행자' ‘구도자’라는 거창한 이름에서 풍겨오는 향기가 아닌 그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어디에도 어느 것에도 걸리지 않고 구속당하지 않는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모습에서 난다.
제 스스로 나는 수행자라는 티를 내지 않고, 스님의 相에 갇혀 거만하고 우쭐거리지 않고, 자신에 대한
아무런 限定도 짓지 않는 그저 '자기 자신'으로써 만족하는 자유로운 사람, 그런 수더분한 사람에게서
되려 참 수행자의 맑은 향기가 풍겨 나오는 것이다.
그저 지금 여기 이대로의 자기 자신이면 되지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의 자기 자신에게 무슨 무슨
相을 덮어 씌울 필요도 없고, '수행자'라느니, '스님'이라느니, '선생님'이라느니, ‘사장’이라느니 하는
이름 붙여 놓고 그런 이름에 제 스스로 구속당해 갇혀서 부자연스럽게 살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법상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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