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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에서 영세교까지.. 최태민의 기이한 종교 행각

장백산-1 2017. 4. 15. 22:36

세계일보

[추적논픽션 비선권력] <8화> 

가톨릭에서 영세교까지.. 최태민의 기이한 종교 행각

조병욱 입력 2017.04.15. 16:04 수정 2017.04.15. 16:16



1-8화, 가톨릭에서 영세교까지…기이한 종교 행각

한때 승려가 되기도 했던 최태민은 1969년경부터 본격적으로 종교활동을 시작한 듯하다. 임선이가 아이들을 키우최태민-박근혜면서 어려운 생활을 이어가는 사이 최태민은 전국 곳곳을 전전하며 종교 활동을 했다. 천주교에서 영세를 받는가 하면 천주교와 기독교, 불교를 아우르는 신흥종교 ‘영세교’를 만들기도 한다.


1976년 2월12일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서울 서대문구 아현동 대한구국선교단 무료야간진료센터를 방문해 박근혜, 최태민 등과 함께 병원을 둘러보고 있다. 최태민은 구국선교단을 설립했다. 국가기록원
최태민은 먼저 1969년 ‘천주교 중림성당’에서 신분을 속이고 ‘공해남’이라는 이름으로 영세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중앙정보부, 1979. 10. 23, 3쪽 참고). 최태민이 영세를 받았다는 ‘중림성당’은 그 이름이 존재하지 않는데, 아마 서울 중구 중림동에 위치한 약현성당으로 추정된다. 약현성당은 서울 중림동에 위치해 ‘중림동성당’이라고도 불리기 때문이다. 약현성당은 1892년 준공된 한국 최초의 서양식 성당으로 유명하다.

최태민은 1971년 10월 서울 영등포구 방화동에 위치한 ‘호국사’에서 불교를 믿다가 기존 종교를 통합해 신흥종교 ‘영세교’를 설립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구글과 네이버 등 인터넷을 검색한 결과 서울 영등포구에 위치한 호국사라는 절을 찾을 수 없었다. 다만 경남 진주시 남성동에는 유명한 조계종 사찰 ‘호국사(護國寺)’가 있다.


1975년 9월5일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구국선교단 및 의사협회 간부들과 다과회에 참석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대통령 옆에는 박근혜가 고 육영수 여사를 대신해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고 있다. 그 옆으로 청색 정장에 선글라스를 쓴 최태민이 서 있다. 국가기록원
최태민이 만든 신흥종교 영세교의 핵심 교리는 불교의 깨달음과 기독교 성령강림, 천도교의 인내천을 통합한 ‘영혼합일법’이었다. 그는 이때 ‘방민’이라는 가명을 쓰면서 독경 및 안찰기도로 환자를 치유했다고 한다(중앙정보부, 1979. 10. 23, 3쪽 참고). 최도원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그는 최상훈, 최봉수, 최퇴운, 공해남, 방민, 최태민 등 최소 7개의 이름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체적으로 최도원은 ‘선녀가 지었다는 아명’이고, 최상훈은 월남 후 개명해 경찰이나 육군 및 해병대 등 비공식문관 재직 때 사용했으며, 최봉수는 부산에 살 때 사용한 이름이었다. 공해남은 천주교 중림동 성당에서 영세할 때 개명한 이름이고, 방민은 영혼합일법 등 사이비 행각할 때 사용한 것으로 전해져 있다. 호적상 이름으로는 1977년 3월9일 이전에는 최퇴운이었고 그 이후엔 최태민으로 고정했다(중앙정보부, 1979. 10. 23, 1쪽 참고).

최태민은 이와 관련, 생전 언론 인터뷰에서 ‘이름이 7개라는 주장이 있다’는 얘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부인했다. “내가 1912년생입니다. 우리 세대만 해도 본명 외에 아명도 있고 자도 있고 호도 있었습니다. 7개가 되지도 않지만 이런 것이 7개라면 또 몰라도…이름이 7개씩이나 된다는 것은 터무니없어요. 더욱이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를 때마다 이름을 바꿨다고 하는 모양인데 말도 안돼요. 내 호로 퇴운이 있었어요. 시기가 정확히 기억 안나는데 내가 ‘입산수도’하고 있던 시절에 월남한 사람들을 주 대상으로 가호적법이 만들어졌어요. 그때 나를 알던 사람이 멋대로 호적에 퇴운을 이름으로 올렸더군요. 호로 쓰던 것이어서 1975년 태민으로 개명했죠. 호적상의 개명은 이것뿐입니다.”(유인종, 1990. 12a, 254-255쪽).


최태민은 1973년 5월13일자 대전일보 4면에 ‘영세계(靈世界)에서 알리는 말씀’이란 제목의 광고를 내보냈다. 대전일보
1973년 5월13일 오후 4시. 최태민은 대전시 현대예식장에서 영세계 칙사를 자칭하고 영혼합일법을 설교했다. 최태민은 이날자 『대전일보』 4면에 ‘영세계(靈世界)에서 알리는 말씀’이란 제목의 광고를 내보냈다.

“영세계에서 알리는 말씀 근계시하 귀체만복하심을 앙축하나이다. 영세계 주인이신 조물주께서 보내신 칙사님이 이 고장에 오시어 수천년간 이루지 못하며 바라고 바라든 불교에서의 깨침과 기독교에서의 성령강림 천도교에서의 인내천 이 모두를 조물주께서 주신 조화로서 즉각 실천시킨다 오후니 모두 참석하시와 칙사님의 조화를 직접 보시라 합니다. 장소: 대전시 대흥동 현대예식장 일시: 5월13일 오후 4시.”

광고는 영세계 교리를 소개하기 위한 대전 집회의 안내문이었다. 광고에서 3차례 등장한 ‘칙사’의 사전적 의미는 ‘임금의 명령을 전달하는 사신’. 최태민은 스스로 영세계 교리를 전하는 메신저로 자신을 규정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 구세주임을 자임한 것이다. 당시 최태민의 대전 숙소 ‘감나무집’를 찾은 종교연구가 탁명환의 기억이다. “즉시 대전 보문산 골짜기에 있는 감나무집을 수소문해 찾았다. 거기에서 머리가 시원스럽게 벗겨진 문제의 칙사님인 원자경시를 최초로 만났다. 그는 벽에다 둥근 원을 색색으로 그려놓고 그것을 응시하면서 ‘나무자비 조화불’이란 주문을 계속 외우면 만병통치하고 도통의 경지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그가 광고를 낸대로 5월13일 현대 예식장에는 각종 환자와 계룡산 주변의 신흥종교 교주들을 위시해 무속 잡인들이 기십명 모여서 원자경 교주의 영세계원리를 청강했다.”(탁명환, 1988. 4, 119쪽).


1976년 2월12일 박정희(왼쪽) 당시 대통령이 대한국국선교단이 서울 서대문구 아현동에서 운영하던 무료야간진료센터를 방문해 박근혜, 최태민(오른쪽 두번째) 등과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국가기록원
1973년 7월에는 대전 시내에 “찾으시라! 그리고 들으시라! 대한민국은 세계 주인국이 될 운세를 맞이했다는 칙사님의 권능과 실증의 말씀을”이라는 영세교의 전단이 뿌려지기도 한다. 광고에는 최태민이 대전시 선화1동 동사무소 앞에 임시 숙소를 마련하고 ‘영세교 칙사관’이라는 간판을 내걸었다고 기록돼 있다. 최태민은 이곳에서도 둥근 원을 벽에다 붙여놓고 사람들이 찾아오면 ‘나무자비조화불’을 외우도록 하면서 그 원을 응시하도록 했다(탁명환, 1988. 4, 121쪽 참고).

최태민은 대전에서 ‘영세교 교주’로 상당한 성공을 거둔 것으로 추정된다. 많은 사람들을 모아 일종의 최면요법으로 난치병을 치료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신통력 있는 ‘칙사’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냈다는 얘기다(김수길, 2016, 40-41쪽 참고).

최태민은 대전에서 성공한 것을 바탕으로 서울에 진출했다. 그는 1973년 11월 서울 서대문구 대현동 67-5 대현빌딩에 전세를 얻어 ‘영세교’라는 간판을 내걸고 ‘원자경’을 자칭했다. 1974년 5월 서울 동대문구 제기2동 122-16 박경천 집으로 옮겼다가 1974년 8월에는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154-5 선승규 소유 빌딩 3층으로 이사해 ‘태자마마’를 자칭하며 사이비 행각을 이어갔다(중앙정보부, 1979. 10. 23, 3쪽 참고).

영세교 활동을 이어오던 최태민은 1975년 3월6일 청와대에서 ‘퍼스트 레이디 대행’ 박근혜를 만나면서 일생일대의 기회를 잡게 됐다. 박근혜의 정치적인 가능성을 간파한 최태민에게 ‘유신 공주’ 박근혜는 새로운 ‘마법의 길(Magic Road)’이었던 셈이다(윤석진, 1993. 11, 196-226쪽 참고).

비선권력기록팀=김용출·이천종·조병욱·박영준 기자 brightw@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