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대사의 오성론(悟性論)
올바른 수행의 자세와 결과
어리석어 마음이 산란한 때, 미혹한 때에는 죄가 있으나 죄의 본성을 알았을 때는 죄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의 본성이 본래 텅~어 공(空)하기 때문에 그렇다. 미혹한 때에는 텅~비어 없는 죄를 죄로 알고, 만약 죄의 텅~빈 본성을 알게 되면 곧 죄라고 여기는 생각에는 죄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텅~빈 죄의 본성은 처소가 없기 때문이다.
경에 말씀하시기를, (모든 법이 성품이 없으니 모든 것의 참된 작용을 의심하지 말라. 모든 법의 참 작용을 의심하면 곧 죄를 이룬다)하셨으니, 왜냐하면 죄는 죄의 텅~빈 본성을 몰라 의혹으로 인해서 죄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만약 죄의 텅~빈 본성을 이렇게 알게 되면 세세생생의 죄가 곧 소멸한다.
미혹한 때에는 육식(六識 :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과 오온(五蘊 : 색, 수, 상, 행, 식)이 다 분별 망상 번뇌이고 생과 사라는 분별의 법이지만, 모든 법의 텅~빈 본성을 깨달은 때에는 육식과 오온이 다 열반과 생멸이라는 분별이 없는 법이니 도를 닦는 사람은 마음 밖에서 도를 구하지 말지어다. 왜냐하면 마음을 아는 것이 도(道)이기 때문이다.
만약 마음을 얻으려할 때에 마음은 얻을 수 없는 것이요, 만약 도를 얻으려할 때에도 도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니, 만약 마음을 가지고 도를 구하여 얻겠다고 말하는 것은 다 잘못된 견해라 한다. 미혹한 때에는 분별하는 마음에 불과할 뿐인 부처가 있고 법이 있지만, 모든 것의 텅~빈 본성을 깨달았을 때는 분별인 부처도 없고 법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깨달음, 부처, 진리가 차별이 없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수도(修道)라 함은 분별하는 마음, 분별 망상 번뇌을 멸하여 도에 계합하는 것이거늘, 또한 마치 거북의 등을 쪼개어 나무를 소생하게 하는 것과 같으니, 이 업보의 몸은 생각생각이 항상함이 없어서 일정한 법이 없는 것이다. 다만 생각생각을 따라서 생각생각을 닦아내되 또한 생사를 싫어하지도 말고 또한 생사를 좋아하지도 말며, 다만 생각 생각하는 가운데 다 망령된 생각을 하지 않으면 곧 살아서는 유여열반(有餘涅槃)을 증득하고 죽어서는 무생법인(無生法忍)에 들어가리라.
눈이 색을 볼 때 색에 물들지 않고, 귀가 소리를 들을 때 소리에 물들지 않으면 해탈이다. 눈이 색에 집착하지 않으면 눈이 선문(禪門)이 됨이요, 귀가 소리에 집착하지 않으면 귀가 선문(禪門)이니, 총괄해서 그것을 말하자면 색의 텅~빈 본성을 보면은 영원한 해탈이요, 색의 형상을 보면 영원한 구속이다. 분별 망상 번뇌에 구속되지 않으면은 곧 해탈이라 말하는 것이요, 또 다시 다른 탈이 없는 것이다. 색을 잘 관하면 색이 분별하는 마음, 분별 망상 번뇌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분별하는 마음이 색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며, 색을 좆아 마음이 따르는 것이 다 청정한 것이다.
분별 망상번뇌가 없을 때에는 하나의 마음이 하나의 극락이요, 분별 망상번뇌가 있을 때에는 하나의 마음이 하나의 지옥이다. 중생이 분별 망상 번뇌를 인위적으로 조작해서 마음으로써 마음을 내기 때문에 항상 지옥에 있지만 보살은 분별 망상 번뇌를 잘 관찰해서 마음으로써 마음을 내지 않기 때문에 항상 정토에 있다.
만약 마음으로써 마음을 내지 않으면 마음과 마음이 공함에 들어가서 생각과 생각이 고요함에 돌아가서 한 국토로부터 한 국토에 이른다. 만일 마음으로써 마음을 일으키면 마음과 마음이 고요하지 않아서 생각과 생각이 動함에 돌아가서 한 지옥으로부터 한 지옥을 편력하게 된다.
만약 한 생각이 마음에서 일어나게 되면 곧 분별 망상 번뇌인 선과 악의 두 업이 있게 되어서 천당과 지옥이 있게 되고, 만일 한 생각이 마음에서 일어나지 않으면 곧 분별 망상 번뇌인 선과 악의 없게 되어서 또한 천당과 지옥이 환상이 사라지게 된다.
本體가 되는 것은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다. 本體가 범부에게는 있으면 유(有)요, 성자에게는 있으면 무(無)이지만, 성인은 그 마음의 본성이 텅~비어 有와 無라는 분별 망상 번뇌가 없기 때문에 기억이 텅텅 비어서 마치 하늘을 똑같이 헤아리는 것과 같으니, 마음으로 열반을 얻었을 때에 곧 열반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마음이 곧 열반이니 만약 마음 밖에서 다시 열반을 본다면 이것은 사견(邪見)이다.
일체의 분별 망상 번뇌는 여래의 종자, 지혜의 씨앗이 된다. 분별 망상 번뇌로 인해서 지혜를 얻게 되는 것이다. 다만 분별 망상 번뇌가 여래의 씨앗을 잉태한다고 말할 수는 있으나 분별 망상 번뇌가 여래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몸과 마음은 밭 두렁이요, 분별 망상 번뇌는 종자가 되며, 지혜는 싹이요, 여래는 곡식에 비유한다. 부처가 마음 가운데 있다고 하는 것이 마치 향이 나무 가운데 있는 것과 같다. 번뇌가 만약 다하면 부처가 마음에서 출생함이요, 부패함이 만약 다하면 향에서 나무가 출생하는 것이니, 곧 나무 밖에 향이 없다는 것을 알 것이요, 마음 밖에 부처가 있다고 한다면 곧 그 부처는 부처가 아니 것이다.
마음 가운데 삼독심(三毒心)이 있으면 이것을 국토가 더럽다고 하는 것이요, 마음 가운데 삼독심이 없으면 이것을 국토가 청정하다고 하는 것이다. 중생과 부처가 또한 물과 얼음 같아서 삼독(三毒)에 치성하게 타면 곧 중생이라고 말함이요, 분별 망상 번뇌의 세상인 삼계(三界)에서 해탈하여 청정한 마음이 되면 곧 부처, 깨달음이라고 말하며, 겨울의 3개월 동안 얼어 있으면 곧 얼음이라고 하는 것이요, 여름의 3개월 동안 얼음이 녹아 있으면 곧 물이라고 한다. 만약 물을 버리면 곧 별다른 물이 없고, 만약 중생을 버리면 곧 별다른 보리(菩提)가 된다고 하는 것이다. 얼음의 본성이 곧 물의 본성이요, 물의 본성이 곧 얼음의 본성임을 밝게 아는 것이다.
중생의 본성이 곧 보리의 본성이다. 중생과 보리가 동일한 본성이어서 다만 마치 까마귀 머리에 아이를 붙여주는 것과 같은 것으로 공통된 뿌리인 것이다. 다만 시절인연이 같지 않아서 미혹함과 깨달음의 두 경계이기 때문에 중생과 보리라는 두 이름이 있을 뿐이다. 뱀이 변하여 용이 됨에 그 비늘을 고치지 않는 것이요, 범부가 변하여 성자가 됨에 그 얼굴(本來面目, 本地風光)을 고치지 않는 것이다. 다만 마음을 아는 자는 지혜로 마음 안을 비추고 몸이란 밖을 경계하여 곧게 하며 중생이 부처를 제도하고 부처가 중생을 제도함이 평등하다고 하는 것이다. 미혹한 때에는 차안(此岸)과 피안이 있으나 깨달은 때에는 피안(彼岸)이 있는 것이다.
만약 분별하는 마음의 본성이 텅~빈 공(空)함을 알아 상(相)을 보지 않으면 곧바로 미혹함과 깨달음을 여의어서 또한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이 없는 것이다. 여래는 차안에 있지 않고, 또한 피안에도 있지 않으며, 중류(中流)에도 있지 않다. 중류(中流)라는 것은 소승의 사람이요, 차안(此岸)이란 범부요, 피안(彼岸)이란 보살이다.
부처는 삼신(三身)이 있으니 화신(化身), 보신(報身), 법신(法身)이다. 만약 중생이 항상 선근(善根)을 지으면 곧 화신(化身)이 나타나고, 지혜를 닦으면 곧 보신(報身)이 나타나며, 무위(無爲)를 깨달으면 곧 법신(法身)이 나타난다. 시방세계를 날아올라서 마땅함을 따라서 구제하면은 화신불이요, 미혹을 끊고 선을 닦아서 설산에서 성도하면은 보신불이요, 말함이 없고 설함도 없어서 맑고 고요하여 항상 머물면 법신불이다. 만약 논리가 극치의 이치라면 한 부처님도 오히려 없거늘 어찌 세 가지를 얻겠는가? 여기서 삼신(三身)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만 사람에 의거해서 상중하(上中下)의 세가지 근기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지혜가 하열한 사람은 망령되게 복력을 일으켜서 망령되게 화신불을 짓고, 지혜가 중간인 사람은 망령되게 번뇌를 끊어서 망령되게 보신불을 지으며, 지혜가 뛰어난 사람은 망령되게 보리(菩提)를 증득해서 망령되게 법신불을 지으나 지혜가 최상최고의 사람은 안으로 원적(圓寂)함을 비추어서 마음이 곧 부처임을 밝히고 마음으로 부처 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이는 삼신(三身)과 더불어 만법(萬法)이 다 취할 것이 없으며 설할 것도 없는 것임을 잘 알지니, 이것이 곧 마음이 대도(大道)에서 해탈한 것이다. 경에 말씀하시길, [부처는 법을 설하지 않고 중생을 제도하지 않으며 보리(菩提)를 증득하지 않는다]하신 것이 이것을 말한 것이다.
야좌게(夜坐偈)
일경(一更)에 단정하게 결가부좌하니 기쁘고 신령스럽게 고요히 비추니 가슴은 허공과 같아라. 광겁(曠劫)으로부터 와도 생멸(生滅)하지 않거늘 어찌하여 모름지기 도랑에서 생명하고 생멸하는가?
일체의 모든 법이 다 허깨비와 같아서 본성은 저절로 텅~비었는데 어찌 제거하려 애쓸까? 만약 분별하는 마음의 본성이 텅~비어 형상이 아님을 알면 담연(湛然)하고 부동하여 저절로 여여(如如)하리라.
이경(二更)에 신식(神識)을 응집하여 밝고 청정하게 굴려서 기억을 일으키지 않아도 진여(眞如)의 본성을 생각하리라.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문득 공(空)에 돌아가니 다시 공(空)이 있다 집착하여 도리어 병이 됨이로다.
제법은 본래부터 공(空)과 유(有)가 아니나 범부는 분별하고 망상하여 사(邪)와 정(正)을 논하니 만약 그 거처(居處)가 불이(不二)임을 안아들이면 누가 곧 범이 성이 아니라고 말하겠는가?
삼경(三更)에 마음이 청정하여 허공과 같아서 시방세계에 충만하여 소통하지 못함이 없으니 산하와 석벽이 능히 장애할 수 없고 항하사의 세계가 그 가운데 있어라. 세계의 본성은 진여(眞如)의 성품이요 또한 본성 없는 것을 곧 원융(圓融)하게 포함하니 다만 제불(諸佛)도 능히 이와 같을 뿐만 아니라 유정(有情)의 무리들도 두루 다 이와 같음이로다.
사경(四更)에 멸함이 없고 또한 생함도 없어서 허공과 같은 법계의 평등함을 헤아림이라 옴이 없고 또한 감도 없어 일어나고 소멸함이 없으며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어서 어둠과 밝음이 서로 따로 있음이 아니니 모든 견해를 일으킴이 없으면 부처를 봄이요 이름을 이름할 수 없는 것이 참된 부처의 이름이라 오직 깨달은 자만이 마땅히 알 수 있으나 아직 알지 못한 중생은 오히려 눈 먼 사람 같아라.
오경(五更)에 반야가 끝없이 비추어서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았는데 삼천대천세계를 유람함이로다. 부처, 진여(眞如)의 평등한 성품을 보고자 한다면 삼가 분별하는 마음을 내지 말고 곧 눈 앞에 두어라 미묘한 이치는 그윽하고 오묘하여 마음의 측량이 아니니 쫓으면 곧 피로가 극심하니 애써 찾지 말라 만약 능히 무념(無念)하면 곧 진실한 구함이요 다시 만약 구함이 있으면 도리어 알지 못한다.
진성게(眞性偈)
원만하고 밝고 청정하고 지극한 법신은 적멸(寂滅)한 비춤에 空의 이치를 잃어버린다. 분별 망상 망정을 인연한 본성은 진여(眞如)를 여윔이라 지극히 미묘함은 영원하여 끝과 시작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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