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
자유롭고 싶습니다. 근심으로부터, 분노로부터, 우울함과 환멸로부터, 괴로움으로부터,
無明으로부터......자유로의 길을 일러 주십시오.
답 :
The truth shall set you free.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 8:32), 이 말은 죄로부터, 더 나아가서 生과 死로부터의 자유를 말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8:81~36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그런데 여기서 <진리>란 예수, 곧 "예수의 말씀"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14;6). 고타마 싯달타 역시 열반하기 얼마 전에 죽음을 예견하고 제자들에게 진리를 의지처로 삼아 진리에 귀의하라(법귀의)고 유언을 합니다(대반열반경).
타력신앙이든 자력신앙이든 진리 또는 자유에 이르는 길은 흔히 말하는 <나>를 찾는 것, 또는 <나>를 버리는 것입니다. <나>를 찾는다는 것과 <나>를 버린다는 말은 동의어입니다.
찾아야 하는 <나>란 大我이고 大我가 곧 無我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아(대아)에 이르려면 어찌해야 할까요? 먼저 괴로움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김용옥 왈 :
괴로움(duhkha)의 반대는 마음의 평화santi(고요)다. 즐거움 또한 괴로움의 일종이다.
"인생이 즐겁다는 새끼들은 대개 사기꾼들이거든." 해탈자에게도 인생은 즐거울 수가 없다!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우선 바른 질문을 해야 합니다. 질문이 바르지 않으면 바른 해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한다면서 그 뜻은 곧 즐겁고자 한다는 것이라면 그 말은, 괴로움으로부터 떠나 괴로움으로 가겠다는 말이 됩니다.
이러한 우리의 어리석음에 대해서는 늘 사색을 해야 합니다. 사색을 하지 않고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석가모니 부처의 사색을 따라가 봅시다.
김용옥 왈 :
석가모니 부처가 깊은 사색을 통해 깨달은 것은 연기론이고 연기론의 결론은 제행무상,고, 제법무아다. 우주만물, 삼라만상은 서로간의 관계 속에서 존재할 뿐 (지속적이고 독립적인) 고유의 아이덴티티를 갖지 않는다.
꽃이 따로 있어서 피는 것이 아니라, 피는 것이 꽃이다.
꽃이 핀다는 말은 핌이 핀다는 것과 같은 동어반복이다.
용수의 中論 :
去者卽不去, 不去者不去, 離去不去者, 無第三去者.
핀 꽃은 피지 않고, 안 핀 꽃도 피지 않는다.
핌과 안 핌을 떠난 제삼의 핌은 없다.
離已去未去 去時亦無去
"이미 핌"과 "안 핌"에는 핌이 없고, "피고 있음"에도 핌이 없다.
若去者有去, 卽有二種法, 一謂去者去, 二謂去法去
피는 꽃이 있다면, 거기 곧 두 개의 존재가 있게 된다.
하나의 존재인 꽃이 피고, 또 하나의 존재인 핌이 핀다는 뜻이니 말이다.
김용옥 더 왈 :
잔디밭이 있어서 잔디밭이 있는 게 아니라 항상 가꿈으로써만 잔디밭의 동일성(아트만)이 유지된다. (잔디밭은 생성되고 있는 것이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주삼라만상은 서술적 상태로만 있다. 緣起的 상호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이것이 고타마 싯달타의 거룩한 깨달음, 즉 연기법이다.
나는 내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나와 내 인생, 삶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나와 내 인생은 하나다. 일체가 연기적인 존재이고 아트만은 없다. 무아론에서는 모든 형이상학적 실체가 거부된다. 불교는 철저하게 반형이상학이다. 고타마 싯달타는 모든 형이상학에 침묵했다. 이율배반, 언어로 기술할 수 없는 것(無記)이므로.
우리 인간들은 언어에 의해 끊임없이 기만당한다.
무아에 이르려면 언어를 해체시켜야 한다.
무아(대아)에 이르는 길 가운데 하나는 생각, 곧 언어를 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색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연기를 사색하고 느낌으로써 망상 망념 망집을 깨고 어리석음을 깨라는 뜻입니다.
언어가 곧 어리석음인데 어리석음으로 어리석음을 깰 수 있을까?
따라서 궁극의 사색은 언어를 통한 사색일 수가 없습니다. 언어를 버린 사색 하지만 이 사색의 경지는 훗날을 기약하고 먼저 떠납시다.
도마의 복음에서는 아흔아홉 마리의 쭉정이 같은 양을 버리고
크고 아름다운 한 마리를 찾아 떠나라고 말합니다.
숫타니파타에서는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라고 합니다.
일체개고(一切皆苦)
먼저 괴로움에 감사하세요. 괴로움에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달콤한 쾌락만 찾게 됩니다.
달콤한 쾌락은 곧 쓰라린 괴로움과 동의어임을 사색하세요.
분노가 치솟으면 먼저 분노에 감사하세요. 근심 걱정, 우울함과 환멸, 무명에 먼저 감사하세요. 다만 감사하면서 도마의 복음처럼 크고 아름다운 한 마리를 찾아가거나 숫타니파타처럼,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세요.
바로 그곳에서 대자유가 비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