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 스님의 전심법요
부처라고 수승하지도 않지만, 중생이라고 부족하지도 않다
만법은 마음 변화로 나타난 것일 뿐(일체유심조)
원문: “그대가 3승(三乘) 12분교(分敎)를 배웠다고 할지라도, 모든 (見解 견해)를 내려놓아야 한다. 그래서 경에서 말하기를 ‘있는 것(見解)을 모두 제거하고, 오직 한 침대위에 누워 있다’라고 하였다. 어떤 見解이든 일으키지 말라. 한 法(어느 것 하나)도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으니, 法에 집착함이 없고 걸림이 없어야 삼계 범부와 성인의 경계를 뛰어넘는다. 이때서야 비로소 세간(속세, 이 세상)을 벗어난 부처(佛)라고 할 수 있다. … 마음이 이미 法과 다르지 않으므로 法 또한 마음과 다르지 않다. 마음은 이미 무위(無爲)이므로 法 또한 無爲이다.
만법(萬法, 이 세상 모든 것, 우주삼라만상만물)이 다 마음의 변화로 나타난 것이다. 나의 마음이 空하기 때문에 제법(諸法, 이 세상 모든 것, 우주삼라만상만물)도 空하며, 천만 가지가 모두 이와 같이 空하다. 온 시방(十方, 우주)의 허공계(虛空界)가 일심(一心)의 본체(本體)이다. 마음이 본래 法과 다르지 않으므로 法 또한 마음과 다르지 않다. 다만 그대의 견해)見解가 이와 같지 않기 때문에 차별(差別) 분별(分別)이 생기는 것이다. 비유하면, ‘하늘 사람이 보배 그릇에
담긴 음식을 먹지만 그의 복덕에 따라서 음식의 색깔이 다른 것과 같다.’ 시방(十方)의 제불(諸佛, 이 세상 모든 것들, 우주삼라만상만물) 중에서 ‘실로 어떤 조그마한 法도 가히 얻을 것이 없음을 깨닫는 것을 아뇩다라샴막삼보리(無上正等正覺)라고 한다’고 하였다. 오직 일심(一心)은 다른 모습이 없으며, 광채도 없고, 수승함도 없고 모자람도 없다. 한 마음(一心)은 수승함이 없기 때문에 ‘부처(佛)’라는 모습도 없고, 한 마음(一心)은 모자람이 없기 때문에 ‘중생(衆生)’이라는 모습도 없다.”
불교는 유심(唯心)과 깨달음의 종교, 팔만사천경 대장경이 ‘마음’ 하나 표현
참 성품(근본성품)은 누구에게나 동일(同一)하고 법(法)은 누구에게나 평등(平等),
모자람 없기에 중생 모습 없어
해설 : 불교는 3장(경·율·론)과 12분교로 구성되어 있다. 12분교는 12분경이라고도 하며, 경전의 서술 방식이나 내용 형식을 12가지로 분류한 것이다. ‘오직 한 침대위에 누워 있다’는 말은 ‘유마경’ 5품 ‘문수사리문질품’에 출처를 둔다. 유마거사가 병이 나자, 석가모니부처님 분부에 따라 문수보살과 여러 제자들이 병문안을 간다. 이때 유마거사는 집안에 있는 모든 물건을 치우고, 하인들도 모두 집 밖으로 내보내고 홀로 침대위에 누워 있다는 내용이다.
이어 ‘만법(萬法,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마음의 변화로 나타난 것이다’는 부분은 이렇다. 불교는 유심(唯心, 오직 마음뿐)의 종교요, 깨달음의 종교다. 삼계유심(三界唯心, 이 세상이 오직 마음 뿐이다)이나 만법유식(萬法唯識, 이 세상 모든 것이 오직 알음알이, 識일 뿐이다)을 주축으로 8만4천 대장경을 단 한 글자로 표현하라고 하면 ‘마음(心)’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초기불교 경전인 ‘법구경’ 시작도 “이 세상 모든 것은 마음에 근거하고, 마음을 근본으로 하며, 마음에 의해 이 세상 모든 것이 만들어진다. 즉, 마음속에 악한 것을 생각하면 말과 행동까지 그 생각에 따라서 거칠어지게 된다. 이로 인해 죄업이 따른다. 마치 수레를 따르는 수레바퀴처럼”이라는 내용이다.
그리고 대승불교(大乘佛敎) 대표 경전인 ‘화엄경’에서는 “만약 사람이 삼세의 모든 부처님들를 알고자 한다면, 오직 이 일심이 모든 것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관해야 한다(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고 했다. ‘능가경’에서도 “3계(三界, 이 세상)는 오직 마음의 분별(分別)일 뿐이니, 마음 바깥 경계는 일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허망한 분별 망상 번뇌(分別 妄想 煩惱)가 갖가지로 모습으로 나타난 현상(現象)일 뿐이다. 중생들이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석가모니여래께서) 분별해서 설했을 뿐이다”라고 했다. 어떤 중생의 마음이든 부처의 마음이든 마음은 똑같은 성품이다. 중생들이 이 청정심(淸淨心)을 보지 못하는 것은 각자의 근기 때문일 뿐, 참 성품(근본성품)과 法은 허공(虛空)과 같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동일(同一)하다.
그런데 ‘열반경’이나 ‘능엄경’ 등에서 ‘이 마음이 신체 어디에 있는가?’라고 해서 어디에 있다고 지정하지 않는다. 수년전 서양에서 명상+정신분석, 명상+심리학 등 불교응용학문이 유행하더니 최근에는 ‘명상+뇌’ 연구가 활발하다. 이런 영구는 고무적인 일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전공 학문에 끼워 맞추기식으로 불교를 바라보는 일은 자제해야 할 것이다. 완벽한 학설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학자는 겸손해야 하지 않을까.
‘하늘 사람이 보배 그릇에 담긴 음식을 먹지만…’ 부부은 ‘유마경’의 ‘불국품’에서 나왔다. 또 ‘불국품’에 ‘부처님은 일음으로서 일체법을 연설한다(佛以一音演說法)’고 하였다. 부처님은 똑같은 설법을 하지만, 중생들은 각자의 근기에 따라 받아들이는 설법이 제각각 다르다는 뜻이다. ‘법화경’의 ‘약초유품’에서는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내리지만, 각 식물마다 자기의 분에 맞춰 물을 흡수하는 것이 다른 것처럼 석가모니부처님의 중생을 깨우치게하는 공덕은 중생 누구나에게 똑같지만, 중생들은 각자의 근기에 따라 제각각 다르게 석가모니부처님의 방편의 가르침을 이해한다고 하였다. 석가모니부처님의 설법이나 교화는 똑같이 평등하게 전하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인 것이다.
그리고 ‘오직 일심(一心)은 다른 모습이 없고,…수승하고 모자람도 없다’고 한 것은 一心은 중생이라고 하찮게 여기지 않고 부처라고 해서 숭배하지도 않으며, 실다운 것이라고 해서 수승하다고 여기지 않고 헛된 것이라고 해서 내치지 않는 분별심(分別心)이 일체 없는 경지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정운 스님 saribull@hanmail.net
[1415호 / 2017년 11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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