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일체 모든 것은 마음으로 지어진 조작이다

장백산-1 2017. 11. 18. 20:53

일체 모든 것은 마음으로 지어진 조작이다


화엄경(華嚴經), "대방광불화엄경(大方光佛華嚴經)"의 제일 사구게를 살펴보겠습니다. 


若人慾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약인욕요지  삼세일체불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 


만약에 사람들이 과거 ·현재 ·미래라는 삼세의 모든 부처(眞理, 깨달음, 근본성품, 참나, 본래의 나)를 알고 

싶어하거든 마땅히 법계(法界)의 근본성품을 관찰해야 할지니 '일체 모든 것은 마음으로 지어졌음'이라! 


만약 사람들이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를 알고 싶다면, 다시 말해 과거에도 지금도 미래에도 두루 

관통해 있는 참된 진리, 참된 근본, 참된 모든 존재의 근본성품을 알고자 한다면 하고 하는 말입니다. 


참된 근본, 참 진리, 근본성품이란 곧 나의 근본성품이기도 하고, 온 우주, 산하대지, 두두만물의 근본성품

을 말하는 것이고, 석가모니부처의 근본성품이기도 하며, 일반 사람들의 근본성품이기도 하고, 법계(法界), 

즉 이 세상 모든 존재(것, 현상)의 근본성품이 되기도 하는 성질입니다. 


이렇게 참된 근본, 참 진리, 참된 모든 존재의 근본성품의 다른 이름인 부처(佛)가 뭔지를 알고자 한다면 

마땅히 법계의 근본성품을 관찰해야 할 것이니 '일체 모든 것은 마음으로 지어졌다'고 하였습니다. 


법계의 근본성품이 바로 나의 근본성품이고, 법계의 근본이 바로 나의 근본이기 때문에..법계의 근본성품

을 관찰하라는 말이 바로 나의 근본성품을 관찰하라는 말이며, 그리고는 바로 그 근본성품이 '마음'과 다른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진리, 근본성품의 다른 이름인 佛(불, 붓다, 깨달음,부처)가 무엇인지 알고 싶으면 법계의 근본

성품을 관찰해야 하고, 근본성품을 관찰하면.. 이 세상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낸 장난이라는 사실 '일체유

심조(一切唯心造)'라는 사실을 깨우치게 된다는 말입니다. 


마음 하나 일으켜 신구의(身口意 : 행동, 말, 생각 마음)이라는 삼업(三業, 세 가지 행위)을 만들어내고, 

마음 하나 일으켜서 이 우주, 법계, 모든 세상을 만들어내며, 

마음 하나 일으켜 삼독심(三毒心 : 탐욕심, 화내는 마음, 분별하는 어리석은 마음)을 일으키고 

마음 하나 일으켜서 계(戒, 계율), 정(定, 禪定), 혜(慧, 지혜)라는 삼학(三學, 세 가지 배움)을 익혀나가고 

마음 하나로 번뇌와 집착을 일으켜 육도(六道 : 지옥 같은 의식세계, 아귀 같은 의식세계, 축생 같은 의식

세계, 아수라 같은 의식세계, 인간의 의식세계, 하늘사람들의 의식세계)를 윤회(輪廻)하게 되고, 마음 

하나로 분별 망상 번뇌, 집착을 끊고 해탈 열반이라는 대자유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마음 자리 하나 깨치면., 텅~빈 충만이며, 여여(如如)하고 적적(寂寂)한 텅~빈 바탕 진공의식이고, 

온 우주, 두두만물, 산하대지 일체가 영원한 진실생명인 영생(永生), 근본성품, 불성이지만, 마음 자리

하나 깨치지 못하면 온 우주, 두두만물, 산하대지 일체가 천차만별로 제각각 펼쳐지는 중생 세계인 

것입니다. 그러나 중생이든 부처든 티끌이건 모래건 그 근본성품은 하나의 마음(一心)일 뿐입니다. 


물(水)은 우주법계의 인연따라 수많은 가지가지의 물방울과 물결을 만들어내고, 그 물방울과 물결은 

때론 크고 작고 거칠고 때론 고요하게 늘 변하지만, 물이 아무리 요동을 쳐도 물방울과 물결은 그대로 

물이고 물이 그대로 물방울이고 물결이지 물, 물방울, 물결은 제각각 다른 것이 아닙니다. 


물방울, 물결을 중생이라 하고 물을 眞理(근본성품, 부처, 불성,  참나, 본래의 나, 법신불)라고 했을 때, 

중생과 진리 그 둘은 결코 다르지 않은 분리불가한 '하나라고도 할 수 없는 하나' 입니다. 그런데도 물결은 

물이 되려고 늘 애를 씁니다. 즉, 중생은 깨달은 부처(진리)가 되려고 애쓴다는 말입니다. 마음으로 깨달아 

부처가 되어보겠다고 애를 쓰고, 마음으로 물결을 잠재워서 물이 되겠다고 애씁니다. 


그러나 물결의 근본성품을 잘 관찰해 보면 물결 그대로가 물이라는 사실을 깨우치게 됩니다. 본래부터 물결

 물이었고, 물이 우주법계 인연따라 잠시 물결을 만들어 냈을 뿐인데 인간의 이 분별을 하는 마음이라는 

놈이 자꾸 물이다 물결이다 분리 차별 분별하고 착각해서 공연히 번뇌 망상만 키워놓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물은 고요한 것이라고 분별(分別)하고, 물결은 요동치는 것이라고 분별(分別)하는 것은  단지

인간들의 분별하는 마음의 작용일 뿐 근본성품, 물(水)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분별하는 마음만 일어나지 않는다면(無心)..이 세상에는 일어날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분별하는 마음 하나 일어나면 천차만별로 세상 모든 것이 펼쳐져 보이고, 분별하는 마음 하나 일어나지 

않으면 세상은 지금 여기 있는그대로 고요하고 공적(空寂)합니다. 분별하는 마음이 있으면 중생이고, 

분별하는 마음이 없는 무심(無心)이면 부처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화엄경』"야마천궁보살설게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별하는 마음은 그림을 능수능란하게 잘 그리는 화가와 같아서 오온(五蘊, 색수상행식 色受想行識

인간의 몸, 느낌 감정, 생각 이미지 상상, 욕망 욕구 충동 의지 의도, 분별심 분별의식과 크게는 이 세상

모든 것, 우주삼라만상만물)을 그 마음대로 그려낸다. 그래서 분별하는 마음은 근본마음인 근본성품

위에 이 세상 모든 것, 우주삼라만상만물을 전부 다 그려낸다. 


분별하는 마음도 근본성품 위에 그려진 그림일 뿐이고, 부처(佛)도 근본성품 위에 그려진 그림일 뿐이고. 

중생이라는 이름도 근본성품 위에 그려진 그림일 뿐이다. 마음과 부처와 중생은 똑같아서 차별이 없다고

(심불급중생 시삼무차별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이라고 화엄경에서 말한 것이다. 


마음 하나 깨치면 부처고 마음 하나 깨치지 못하면 중생이기 때문에 마음과 부처와 중생은 분별이 없는

하나라는 말이다. 


또한 징관(澄觀)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부처 마음' 아님이 없는 마음은 단 하나의 마음도 예외가 없기에 곳곳에서 도(道)를 이루나니, 한 티끌도 

불국토(佛國土, 깨끗하고 청정한 마음의 세계) 아닌 것이 없도다. 참과 거짓, 너와 내가, '하나'를 잡으면 

이 우주 '전체'가 거두어지고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라는 분별심은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되리라. 


『화엄경』의 가르침은 이처럼... 두두물물 산하대지 온 우주 법계가 그대로 부처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

모든 것, 우주삼라만상만물은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법신(法身, 진리의 몸)인 비로자나부처(毘盧遮那佛)

입니다. 그래서 중생이 그대로 법신부처, 근본성품이며, 분별하는 마음이 그대로 법신부처, 근본성품인 것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분별하는 마음으로 부처, 진리, 깨달음, 근본성품, 법신불, 비로자나불, 참나, 본래의 나를 

찾고자 애쓰고 분별하는 마음 바깥으로 멀리 찾아 나설 것이 없습니다. 분별하는 마음 바깥으로 애써 찾아 

나서지 말고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서 분별하는 마음 안으로 깊이 들어가 관찰한다면 그대로 분별하

는 마음이 부처(진리, 깨달음, 근본성품, 법신불, 비로자나불, 참나, 본래의 나)이며, 중생이 그대로 부처

(진리, 깨달음, 근본성품, 법신불, 비로자나불, 참나, 본래의 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칠 수 있는 것입니다. 


『금강경』에서는...이 세상에 대해서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모양(相)이 있는 이 세상 모든 것은 다만 그논성품이 우주법계의 인연가합(因緣假合)으로 인해 잠시 잠깐 

만들어진 임시적인 허망한 허상일 뿐 영원불변하는 고정된 실체가 있지 않음을 올바로 보라고 말하고 있

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모양들이(相이) 모양(相)이 아님을 바로 꿰뚫어보게되면 곧바로 여래(如來, 

근본성품, 진리)을 볼 것이라고 말 하였습니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凡所有相 皆是

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금강경의 이 말은『화엄경』사구게에서 하는 말과 다른 말이 아닙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를 

알고자 한다면 응당 법계의 성품을 관찰해서 이 세상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낸 조작품이라는 사실을 알라

고 말했습니다(약인욕료지 삼세일체불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 (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

唯心造)


법계(法界, 진리의 세계)의 근본성품을 올바로 꿰뚫어보면..이 세상 모든 것은 영원불변하는 독립적인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분별하는 마음이 우주법계의 인연따라 근본성품 위에 잠시 만들어낸 

가상현실(假想現實, virtual reality)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실체가 없는 분별하는 마음이 실체 없는 이 세상을  근본성품 위에 만들어 냈으며, 분별하는 마음으로 

근본성품 위에 중생도 부처도 만들어내기 때문에 분별하는 이 마음을 잘 관찰하고, 법계의 근본성품을 

잘 관찰하면 다시 말해, 相(모양)이 相(모양)이 아니라 다만 마음이 조작해낸 그림임을 잘 관찰하면 

'바로 여래를 볼 것이다' 하는 말입니다. 


『화엄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이 세상 모든 것들이 바로 지금 여기서 이렇게 펼쳐져서 나타나보이는 것은 모두 마음의 조작이라는 것

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무언가가 딱 고정된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화가와 같은 분별하는 마음이 

장난을 쳐서 그렇게 실체가 없는 그림처럼 조작해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 모든 것은 고정된 실체

가 없기에 텅~비어있는 空입니다.『금강경』의 말씀처럼... 이 세상 모든 것은 꿈, 허깨비 신기루,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 같다는 것입니다(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一切有爲法 如夢幻

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그러니 부처를 찾겠다고 하는 수행자가 제 분별하는 마음을 들여다 보지 않고 분별하는 마음 바깥으로 

근본마음(부처, 근본성품)을 찾아 나서면서 모양으로 부처를 찾거나 음성으로 부처를 찾고자 한다면 

이는 잘못된 道를 행하는 것이라서 여래(부처, 근본성품, 깨달음, 본래의 나)를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이처럼『화엄경』과『금강경』의 궁극의 가르침은 서로 다른 이야기가 아닌 것입니다. 

다만『금강경』에서는... 이 세상의 모양(相)을 모양이 아니라고 바로 관찰하도록 이끌어 이 세상과 모든 

것이 텅~비어 空한 이치를 내세움으로써 이 세상 모든 것의 배경인 참성품(근본성품, 본래의 나, 부처, 

불성(佛性)을 제대로 볼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으며, 


『화엄경』에서는... 법계의 근본성품을 관(觀)하여 분별하는 마음이 근본성품 위에 부처도 그려내고

중생도 그려내고 있음을 깨닫도록 이끌어 이 세상 모든 것이 본래부터 이미 완전한 부처임을 보도록 

안내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금강경』은 사(事, 근본성품이 드러남, 體, 相)의 관점에서 이 세상을 관찰하도록 이끌고 있고 

『화엄경』은 이(理, 근본성품의 드러냄, 작용)의 관점에서 이 세상을 관찰하도록 이끌고 있고 

『금강경』은 차별상(差別相), 분별상(分別相)을 관찰함으로써 근본성품으로 들어가도록 이끌고, 

『화엄경』은 바로 근본성품을 관찰하도록 이끌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금강경』은 석가모니부처님의 가르침(佛法)을 설하는 경이라면 『화엄경』은 근본성품, 즉 부처(佛)를 

설하는 경이라 합니다. 그렇기에「금강경」에서는 방편(方便, 수단, 도구)를 사용해서 이 세상 모든 것들을 

부정하고 타파함으로써 근본성품, 즉, 佛(부처)을 드러내는 파사현정(破邪顯正)의 가르침이라 할 수 있을 

것이고, 「화엄경」에서는 즉바로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부처(근본성품)의 세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화엄경』은 부처 자내증(自內證)의 세계, 깨달음의 세계, 근본성품의 세계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며, 

그렇기에 깨닫자마자 3 . 7일간 쉼이 없이 화엄경을 설한 것이라 하는 것이지요. 반면에『금강경』은 이 

세상의 모든 잘못된 것을 타파함으로써 바른 것을 드러내 주고 있는 경전인 것입니다. 타파하는 방법으로 

방편으로 도구로 수단으로 무(無)를 많이 사용하면서 공(空)사상을 드러내지요. 


그러나 결국에는『금강경』이든『화엄경』이든 올바른 관(觀) 수행을 통해서 근본성품의 깨달음으로 

이끈다는 점에서 다만 방편(방법, 도구, 수단)만 다를 뿐, 하나뿐인 진리, 근본성품을 가리키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다음으로『법화경』의 사구게를 살펴보겠습니다. 


諸法從本來 常自寂滅相 佛子行道已 來世得作佛 (제법종본래 상자적멸상 불자행도이 내세득작불) 

이 세상 모든 것은 본래부터 스스로 고요하고 텅~비어 청정하므로 

사람들이 이와 같은 세상의 이치를 갈고 닦으면 즉시 부처가 될 것이다. 


제법(諸法), 즉 이 세상 모든 것은 본래부터 스스로 고요하고 텅~비어 청정한 것이라는 말은 그대로

「금강경」의 '범소유상 개시허망'이나 「화엄경」의 '일체유심조'와 다른 말이 아닙니다. 


제법(諸法)이란... 즉「금강경」에서의 相이 있는 이 세상 모든 것 즉 범소유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본래

부터 스스로 고요하고 텅~비어 청정하다는 말은 이 세상 모든 것이 허망하다는 말에 다름이 아니지요.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이 세상 모든 것이 얼마나 복잡하고 번잡하며 끊임없이 시비분별을 일으킵니까. 

그러나 이 세상 모든 것은 전부 고정된 실체로 있는 것이 아니라 허망한 것, 空한 것이기에 본래 텅~비어 

청정하고 고요하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제각각 각기 존재 본연의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인간의 분별하는 마음

으로 임시적으로 만들어진 가합물(假合物)일 뿐(一切唯心造)이므로 허망하나(皆是虛妄) 그것들의 근본성

품은 본래 청정하다는 말이지요(常自寂滅相) . 그러니 모든 수행자가 이와 같이 알고 갈고 닦으면 즉각 

부처를 이룰 것이다 했습니다. 


법화경의 이 말이 그대로... 『금강경』의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화엄경』의 '삼세일체불 응관법계성'

과 같은 말입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사실을, '범소유상'이 '개시허망'이라는 사실을, '제법종본래 상자적멸상'

이라는 사실을 바로 觀함으로써 갈고 닦으면 여래, 근본성품을 볼 것이다, 즉시 부처를 이룰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 삼세의 일체 부처를 볼 것이라는 말입니다. 



『열반경』의 사구게도 마찬가지입니다. 

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 제행무상 시생멸법 생멸멸이 적멸위락. 모든 현상(존재, 것, 현상)

은 단 찰라도 고정됨이 없이 변한다는 것이 곧 생하고 멸하는 생멸의 이치이니 이 생과 멸이 실제로 여기는

생각에 대한 집착심을 놓아버리면 곧 고요한 열반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제행(諸行)이라는 말은「법화경」의 '諸法',「금강경」의 '凡所有相', 「화엄경」의 '一切'와 같습니다. 

일체 모든 것들, 이 세상 모든 것, 우주삼라만상만물은 항상하는 것이 아닌 늘 변하는 생하고 멸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이 생과 멸이 실제로 있다고 여기는 생각에 집착하는 마음만 놓아버리면 이 세상의 

이치인 생하고 멸하는 법을 초월하여 해탈 열반의 경지, 대자유에 들 것이란 말입니다. 


이 말도 똑같은 말입니다. "제행무상", 즉 이 세상 모든 것은 항상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생멸법이고 이 세상은 그대로 생멸법이기 때문에 생과 멸이 실제로 있다고 여기는 생각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리면 그대로 고요하다, 열반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금강경』에서 '범소유상'이 '개시허망'임을 바로 보면 즉각 여래를 볼 것이라 했는데 범소유상이 

개시허망이라는 말은 이 세상 모든 것은 항상하지 않으며(諸行無常), 고정된 실체가 없고(諸法無我) 

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일체는 공(空)으로 허망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이 온통 괴로움

(一切皆苦)이라고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삼법인(三法印)의 교설로써 말씀하지 않으셨겠어요. 


그런데 이 세상 모든 것이 이렇게 無常하여 허망하지만 相이 相이 아님을 바로 볼 수 있다면, 다시 말해 

무상한 생멸법, 즉 생겨났다 사라져버리는 것들을 바로 관찰하여 생과 멸이 실제로 있다고 여기는 생각에 

집착하는 마음만 놓아버릴 수 있다면 즉시 여래(근본성품)를 볼 것이다, 고요한 열반에 이를 것이다고 한 

것입니다. 


조금 어려웠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사유해 보신다면 금새 이해가 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연기법과 삼법인(三法印 :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 중도와 空사상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가진다면 

아주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이렇게『금강경』과『화엄경』·『법화경』·『열반경』의 사구게에 대하여 공부를 해 보았더니 어떻

습니까.? 다 다른 이야기가 아니란 말입니다. 다 같은 말인데 이렇게 설명하고 저렇게 설명하고, 

방편을 달리하고 관점을 달리하여 근기가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다양한 설명을 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상에서처럼... 

「금강경」의 '범소유상 개시허망 ~' 

「화염경」의 '일체유심조' 

「법화경」의 '제법종본래 상자적멸상 ~' 

「열반경」의 '제행무상 ~' 

「반야심경」의 '조견오온개공 ~' 

이런 게송들이 설명하는 바는 다른 말이 아니라 다 같은 의미로 이해를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가르침의 실천인 금강경의 '응무소주 이생기심'은 「아함경」의 '두 번째 화살을 맞지 

말라'는 말과도 상통합니다.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말이나, 두 번째 화살을 맞지 말라는 말이나... 어디 다를 게 있습니까.? 

이 말은 다시 말해 연기법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며, 중도, 공, 무상, 무아, 무집착, 무소득, 무소유에 

대한 그리고 모든 부처님 말씀에 대한 또 다른 설명이기도 한 것입니다. 모두가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을 설한 것들이지요. 


근본성품은 하나뿐이지만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근기가 다양한 중생들을 위해 다양한 방편의 말씀으로 

설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수많은 말씀들은 다 다른 말 같아 보이지만 다 같은 말인 것입니다. 나아가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수많은 방편으로 수많은 말씀을 하셨지만 결국에는 한 말씀도 하신 바가 없는 것

입니다. 이 말씀을 아시겠는지요.? 

 

출처 :거창 부처님 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 육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