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수스님이 남긴 유언 원본을 동행한 견월스님이 일행에게 보여주었고, 그 유언지를 스님이 소신공양한 바로 그 자리에 놓아보았다. 그랬더니 스님의 사자후가 그대로들려오는 것 같았다.
4대강사업 반대, 문수스님의 소신공양을 애도하며
문수스님의 소신공양과 입적 소식을 황망히 듣고 난 바로 다음날 아침 나는 대구의 몇몇 지인들과 함께 경북 군위로 차를 몰았다. 대구에서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군위 지보사의 한 선방수좌가 “‘4대강 사업’ 반대를 외치며 낙동강 둑방에서 소신공양을 했다”는 이 놀라운 소식에 평소 낙동강을 오가며 정부가 왜곡하고 있는 ‘4대강 사업’의 진실을 조금이라도 시민들께 알려보고자 애써왔던 필자와 ‘낙동강을 생각하는 대구사람들’은 그냥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문수스님의 입적을 깊이 애도하고, 스님의 발자취를 찾아보며 스님이 남기신 유지를 받들고자 1일 아침 길을 나섰던 것이다.
스님의 법구는 군위면사무소 한 가운데 위치한 군위삼성병원에 안치되어 있었다. 아직 일반인 문상객들은 많지 않았지만, 동료 스님들과 불자들의 분향 행렬을 끊임없이 이어졌다. 도반 스님들이 자리를 지키는 가운데 필자와 일행은 소박하게 차려진 스님의 빈소에 분향을 하며 스님의 극락왕생을 깊이 기원했다.
분향을 한 후에 필자와 일행은 스님이 소신공양을 한 그 둑방으로 향했다. 군위 면소재지를 가로지르며 흘러가는 낙동강의 지천인 ‘위천’의 둑방. 그 둑방에 서보니 강이 굽이굽이 흘러가고, 그 너머엔 논밭들이 길게 이어진 전형적인 시골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소신공양 현장에서 들은 스님의 사자후 "4대강 사업, 즉각 폐기하라"
그러나 바로 이쪽에 그와는 정반대의 풍경이 펼쳐져 있다. 빈소에서 들었던 대로 경찰이 쳐둔 출입통제선 안쪽으로 검게 그을린 그 둑방길은 그곳이 스님이 소신공양을 결행하신 바로 그 장소임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게 한다.
▲ 필자와 동행한 일행이 스님이 소신공양한 현장을 황망히 바라보고는 아직 온기가 남은 그 현장을 자세히 살펴보고 있다. 위는 '낙동 대구'의 박종하 운영위원과와 아래는' 4.9 인혁재단'의 김찬수 운영위원의 모습
그곳에서 스님이 온몸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붙일 때의 그 심정을 생각하니 너무나 아득해진다. 가지런히 자신의 소지품을 정돈 한 후에 스님은 자신의 유언인바 “이명박 정권은 4대강 사업을 즉각 중지·폐기하라”, “이명박 정권은 부정부패를 척결하라”, “이명박 정권은 재벌과 부자가 아닌 서민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 마음속으로 깊이 외치면서 온몸을 불살랐던 것이다.
“4대강 사업을 즉각 중지·폐기하라” 그렇다. 지금 4대강의 어느 곳이라도 나가보면 끔찍한 풍경이 나날이 이어진다. 낙동강 16개 보가 들어서는 현장은 말할 것도 없고, 낙동강 전 구간에 걸쳐서 생명 살륙의 현장이 펼쳐져 있다. 강바닥은 포크레인 삽날로 파헤쳐지고, 강변숲과 하천부지 농지는 파괴되어 매립되고 있고, 그 안에 깃든 물고기를 비롯한 야생 동식물들은 갈 곳을 몰라 방황하며 죽어간다.
▲ 낙동강의 한 지류의 유천의 모습. 스님은 이 위천의 둑방에서 죽어가는 낙동강을 비롯한 4대강을 생각하며 소신공양을 감행한 것이다.
이런 현실을 알고 나면 일반인들 누구나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일진대 불살생의 계훈을 뼛속 깊이 새기면 수행정진 해오신 스님의 입장에선 그 심정이 어찌 했을까.
스님은 평소 도반들에게 “국민이 이렇게 원치 않는데, 왜 이 사업을 하느냐 … 내가 소신해야 4대강 사업을 해결할 수 있겠다?”며 개탄했고, 이곳에서 기어이 몸을 불살라 죽어가는 생명의 강을 지금이라도 살려내라는 서원을 우리에게 남기신 것이다.
▲ 문수스님이 남긴 유언 원본을 동행한 견월스님이 일행에게 보여주었고, 그 유언지를 스님이 소신공양한 바로 그 자리에 놓아보았다. 그랬더니 스님의 사자후가 그대로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렇다. 스님의 소신공양은 죽어가는 4대강과 그 안에 깃든 뭇 생명들과 그리고 농민과 골재노동자들을 비롯한 고단한 이웃들의 삶을 다시 한번 생각하라고 우리에게 내려치는 준엄한 죽비다. 이제 죽어가는 생명의 강을 살리는 일과 우리 가난한 이웃들의 삶을 보살피고 함께하는 일은 온전히 우리몫으로 남았고, 이제는 스님의 뜻을 이어 4대강의 현장으로, 고단한 이웃들 곁으로 우리가 함께 나아갈 차례다.
‘지보사’에서 다시 문수스님을 생각하며
그렇게 소신공양의 현장에서 스님의 사자후를 들은 후 필자와 일행은 스님이 3년간 문밖을 나서지 않으면서 바위처럼 굳세게 용맹정진을 해오셨다는 그 지보사(持寶寺)로 향했다. 군위면사무소에서 4킬로 남짓 떨어진 지보사는 깊은 골의 끝자락에 들어서 있었다.
▲ 군위군의 야산 깊숙한 골짜기 중턱에 자리잡은 지보사는 문외한이 보기에도 수행정진하기에 안성마춤인 수행의 명당자리로 보인다.
골이 깊은 그곳에 들어선 지보사는 한눈에 보기에도 수행정진을 하기엔 적소처럼 보이는 명당이었다. 그러나 갑작스런 스님의 소신공양 소식에 절집 식구들은 모두 빈소로 향하고 절간은 텅 비어 적막만이 감돌았다. 그런 지보사는 스님의 입적을 애도라도 하는지 절간의 공기는 더욱 낮게 드리워져 있었고, 절간 곳곳에 심어둔, 이제 갖 피어난 수국꽃들만이 그 향기를 전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스님이 오랫동안 머물며 수행정진한 그곳에서 스님의 발자취를 조심조심 돌아보며 다시 한번 스님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고 발길을 돌렸다. 돌아나오면서 절집 뒤로 드리운 하늘은 얼마나 푸르던지, 저 푸른 하늘 너머로 낙동강의 한 둑방에서 결가부좌 한 채로 활활 타오르는 스님의 모습이 어렴풋이 잡힌다. 스님은 외치고 있었다. “4대강 사업, 즉각 중지·폐기하라”
한편, 조계종 중진 스님들과 유족 측에 따르면 “스님의 장례는 5일장의 은해사 교구장으로 치르고, 영결식과 다비식은 4일 오전 10시 지보사에서 봉행키로 결정했다”고 한다.
문수 스님은?
문수스님은 오대산 월정사에서 시현스님을 은사로 출가, 86년 사미계, 90년 구족계를 각각 수지했습니다. 문수스님은 1998년에는 중앙승가대학교 학생회장을 역임하기도 했으며, 통도사, 희방사, 해인사를 거쳐 2006년부터 2007년까지 경북 청도 대산사 주지 소임을 맡기도 했으며, 군위 지보사에서 수행정진 중이었습니다.
스님을 가르쳤던 유승무(중앙승가대) 교수는 “재학 시절부터 학생회장을 맡아 강직하고 곧으며 선이 굵은 성품이어서 학생회장 때도 어느 상황에서도 대의를 따랐고 불의와 타협을 하지 않았다”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자료출처 - 불교환경연대 제공)
소신공양이란?
불교에서 소신공양은 속가에서 생각하는 일반적인 분신과 다릅니다. 소신공양(燒身供養)은 말 그대로 스스로 몸을 태워 온몸을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입니다. 소신공양에 대한 불교적 근거는 <법화경> 약왕보살본사품 제23에서 “일제 중생 희견보살께서 일원정명덕 부처님 회상에서 수행정진할 때 현일체색신삼매(現一切色身三昧)를 증득하여 육신으로 공양함을 서원하고 행유(香油)를 몸에 바르고는 부처님 앞에서 하늘의 보배 옷으로 몸을 감아 거기에 향유를 끼얹고 몸을 스스로 태워 공양을 올려 불은(佛恩)에 보답한다.……스스로 소신하면 그 광명은 두루 80억 항하사 세계를 비춘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서 알 수 있듯, 소신공양은 깨달은 구도자가 자신의 온몸을 태워 자신은 절대 삼매에 들고 부처님께 공양을 하고 그 빛으로 중생을 널리 구제함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1963년에 베트남의 틱 꽝 득(Thich Quang Duc) 스님이 대로상에서 후예시 대량학살 가족에게 배상금을 지불할 것, 불교신앙의식과 수행과 전도의 자유를 줄 것을 요구하며 기름을 끼얹고 결가부좌를 한 채로 소신공양을 하였습니다. 결국 디엠정권은 불교계의 거센 저항과 미국 등의 압력을 맞아 붕괴하였습니다. 김동리는 이에 영감을 받아 소설 <등신불>을 쓴 바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태고종 승정 충담 원상대종사가 1998년 6월 27일 새벽 경기도 청평 감로사에서 이 나라 분단된 국토가 하나로 통일되고 사회가 안녕하며 헐벗음과 괴로움이 없어지며 종단이 화합해 불국토가 앞당겨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원한다는 내용의 열반송을 남기고 소신공양한 바 있습니다.
(자료출처 - 불교환경연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