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익숙함과 낯설음 그리고 깨달음

장백산-1 2018. 12. 15. 14:28

익숙함과 낯설음 그리고 깨달음  / 릴라


낯선 것은 익숙하게 하고 익숙한 것은 낯설게 하여야 이 일과 조금이나마 들어맞을 것이다. <대혜종고>


내가 있다고 여기는 생각, 내가 상대해야 할 어떤 것이 따로 있다고 여기는 생각은 스스로에게 커다란 위압감을 줍니다. 그러면 나와 대상 둘 사이에 긴장관계가 형성되고, 사람들은 대상을 어떤 방식으로든 상대하거나 갈무리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대상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아니면 개념 관념이든 대상이 있다는 자체가 나에게 중압감을 줍니다. 대상이 있다는 것이 나에게 위압감 중압감이 되는 것은 대상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 읮를 벗어나서 작동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대상이 어떻게 움직일지, 어떻게 내게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내 밖에 무엇이 있다고 여기는 생각은 나라고 하는 것이 이 세상과 떨어져 따로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합니다. 나라고 하는 것이 없다면 내 밖에 다른 어떤 것이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나와 세계, 주관과 객관, 주체와 객체, 주인과 손님 등 이 분별구조, 이 이분법적인 사고가 사람들이 겪는 모든 불안감과 분리감의 핵심입니다.


사람들은 갓나아기 때부터 성장하는 과정에서 생각하는 능력이 형성되면서부터 분별구조 이분법적으로 생각을 하는 구조가 형성됩니다. 갓난아기가 커가면서 세상을 경험하다 보면 어느 순간 대상을 경험하는 나라는 것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가 있으면 당연히 내가 아닌 존재도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아닌 대상은 더욱 개체적으로 분화되고 정교해져서 물질적인 것으로, 정신적인 것으로, 감정적인 것으로, 감각적인 것으로 까지 확대됩니다. 이렇게 확대되는 나와 대상은 서로서로 어우러져 존재를 형성하고, 이렇게 형성된 존재들의 어우러짐은 정교한 가상의 실체를 조작해 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조작된 가상의 실체들이 전부 다 내 마음에서 일어난 환상인 줄 모른 채 그것들의 실체성, 실재감에 속아 그것들을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다루고 부릴려고 온갖 애를 씁니다. 


그런데 가상의 실체 이 모든 것들은 내 의식이 만들어낸 환상(幻想)이고, 내 의식이 분별해서 선택적으로 종합적으로 취사선택을 해서 해석한 가상세계, 가상현실(假想現實, virtual reality)일 뿐입니다. 실체가 있는 객관적인 세계가 아닙니다. 인류는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이와 같은 생각의 패턴에 길들여지고 익숙해져 왔기 때문에 이것이 습관이 되어 이 가상현실을 의심해보는 생각 조차 하지 않습니다. 나 혼자만 이같은 사고의 프레임, 틀에 길들여진 것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 여기고 넘어갑니다.


내가 경험하고 아는 것을 남들도 똑같이 공유한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같은 생각의 패턴, 틀, 프레임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만약 내가 낯선 곳으로 여러 사람들과 여행을 떠났다고 합시다. 사람들은 다양한 체험을 할 것이고 돌아와서는 그것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장소를 갔다  돌아와서 얘기하는 것을 보면 똑같지 않습니다. 서로가 공감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고, 인상이나 기억도 같지 않습니다. 


한 집안에서 자란 형제자매라도 어린 시절의 추억, 거기서 느꼈던 행복과 불행이 너무도 다른 경우가 있듯이 우리가 경험하고 기억하고 아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 각자가 분별해서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고 해석한 나만의 것입니다.


아주 사소한 예로 낯선 곳에 여행을 가면 대소변등 볼일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낯선 장소에서 느끼는 불안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 이 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자기 암시를 통해 이 장애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인생 자체가 여행'이라는 생각의 전환도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또 의도적으로 여행을 자주 다니거나 똑같은 장소에 오래 머물다 보면 그곳 환경에 익숙해져 어느 순간 변화된 자신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자신에게 돈 1억 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로 5천만원을 사기당했습니다. 자신에게는 너무도 큰 돈이어서 상처가 큽니다. 잠을 이루지 못할 수도 있고, 분한 마음에 며칠 음식이 넘어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장애를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한 순간에 달려 있습니다. 잃어버린 돈에만 너무 몰입하면 이 문제가 삶을 뒤흔들 것이지만, 다른 식으로 사기당한 돈을 바라보면 금방 털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나마 5천만 원이라도 남아서 다행이다 또는 비싼 수업료 내고 인생을 배웠다, 돈은 물처럼 흐르는 것이어서 내 소유가 아니라 잠시 빌려 쓰는 것이다, 등 같이 같은 문제를 다르게 받아들이면 5천만 원을 잃어버린 것이 오히려 자기발전의 계기가 됩니다.


이처럼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는 사뭇 다른 결과를 가져옵니다. 결국 자신의 가치관이나 판단의 기준, 틀을 바꾸면 문제가 문제가 되지 않는 상황으로 나아갑니다. 심리치료, 인지치료라는 것이 이런 식의 생각의 전환,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기, 위치의 변경 등으로 장애를 해결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간과하는 것이 있습니다. 만약 생각을 바꾸고 관점을 달리해서 상황이 변화한다면 그 생각이라는 것이 과연 실제적인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생각은 세상을 바라보는 프레임, 틀이지 실체가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허망한 생각에 사로잡혀 자기도 모르게 세상을 왜곡되게 해석해 왔습니다.


이 세계는 객관적은 무엇이 아니라 내 분별의식이 빚어낸 환상세계, 가상현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모든 것은 그것이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한 것이고, 내가 여긴 것입니다. 내가 존재한다고 여기는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존재한다'가 아닌 '여긴다'인데, 우리는 존재한다에 머뭅니다.


존재는 존재가 아니라 존재라는 '여김'입니다. 현상세계, 가상세계, 가상현실이라는 가짜 세계를 살아오면서 그 경험을 이해하고 분석하고 판단하는 의식구조가 이 세계를 존재로 만들고, 좋고 나쁜 것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패턴에 익숙해져서 이 가상세계를 사실로 받아들입니다.


해탈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생각의 패턴, 틀, 프레임을 밝게 보고 거기에 속지 않는 것입니다. 문득 모든 생각의 본원인 마음 바탕이 체득되면 이것이 본원 자성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잘 알게됩니다. 생각, 느낌, 소리, 맛, 냄새, 사물, 감촉이 모두 텅~빈 마음 바탕 이것의 일이지만, 텅~빈 마음 바탕은 그 어떤 것에도 물들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게됩니다. 이런 자각이 오면 나도 모르게 분별되어 일어나는 이 가상현실을 볼 줄 아는 눈이 열립니다.


물론 당장 모든 망상이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 분별하는데 익숙해져서 자기도 모르게 모양 세계에 빠져들곤 합니다. 또, 텅~빈 마음 자리 이 자리가 체험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자아의식은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자아의식은 모든 분별의 시작이며 근간입니다. 자아의식이 바탕이 되어 그 아닌 것들이 분별적으로 일어나는데 이것은 너무도 미묘하고 미세해서 금방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별없는 텅~빈 마음자리에 익숙하다 보면 때가 되어 자아의식도 분별된 실체가 없는 허망한 망상이라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자아가 없음을 분명히 깨친 사람에게 그 나머지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자아 없이는 다른 것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아는 가장 먼저 오는 분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나중에 가는 분별입니다.


마음공부의 요체는 바로 내가 따로 있다는 분별의식을 완전히 항복시킬 수 있느냐에 있습니다. 내가 따로 없다면 내가 규정하는 다른 것들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게 깨달음이 되었든, 법이 되었든, 다른 무엇이 되었든 그것을 규정하는 주체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마음공부를 하다 보면 크고 작은 전환점을 경험하게 되지만 크게 두 번의 전환점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모든 분별 세계에 익숙한 삶에서 벗어나 분별에 물들지 않는 텅~빈 마음 바탕이 체험적으로 드러나는 것이고, 두 번째 전환점은 이 텅~빈 마음 바탕에 익숙해져서 나를 비롯한 모든 모양이 존재가 아니라 이름과 모양이 그러할 뿐이라는 전환입니다. 이것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은 이 세상 모든 것, 가상현실, 현상세계 모든 것이 통털어 하나라는 분명한 체득입니다. 텅~빈 마음 바탕이 스스로에게서 드러나는 체득, 그리고 텅 빈 마음의 세계로 들어섬이 아주 중요합니다. 이 낯선 세계가 발판이 되어 익숙했던 분별심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몸과 마음은 익숙한 대로 행동하려고 합니다. 익숙함은 길들여짐이고 길들여짐은 편안함입니다.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하지 않는 것보다 익숙한 행동을 하는 것을 더 편안하게 여깁니다. 예를 들어 술을 먹지 않는 것보다, 술을 먹는 익숙한 행동을 더 좋아하고 편안해 합니다. 청소를 하지 않는 것보다 늘 해오던 청소를 하는 것을 더 편안해 합니다. 생각으로 분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별을 하는 생각이 실체가 엇는 허망한 망상인 줄 모를 때 길들여진 의식의 분별작용이 오히려 쉬운 것이 되고 당연한 것이 됩니다. 처음 생각하는 것을 배울 때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게 익숙해지니 분별하지 않는 것이 더 힘듭니다.


이 삶의 모든 장애는 분별망상을 진실하다고 여기는 것에 있습니다. 실체 없는 것을 지키고 주장하면서 갈등이 생기고 마음에 상처를 입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 있는 일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실재하지 않는 관념에 사로잡혀 일어나는 일이니 안타까을 뿐입니다. 


스스로의 텅~빈 마음 바탕이 자각되었다면, 이제 분별하는 생각 마음, 사량분별심에서 깨어나는 공부를 지속적으로 해야 합니다. 텅~빈 마음 바탕에 익숙해지고 익숙해지다 보면 사량분별심은 점점 낯설어지고 멀어집니다. 존재한다고 여겼던 것들이 실체가 아님이 드러나며 점점 잘 보이게 됩니다. 텅~빈 마음 자리에 하나둘 달라붙어 있던 관념들이 무의미해져서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다가고 불쑥불쑥 뿌리 깊은 분별이 일어나 힘을 발휘하곤 합니다.


그렇더라도 꾸준히 분별없는 텅~빈 마음 바탕 하나에 밝다 보면 이제는 오히려 무분별심 이것이 익숙해져서 분별에 사로잡혀 괴로워하는 것이 낯설어지고, 잘 일어나지도 않게 됩니다. 분별이 사라지면서 삶의 변화가 저절로 찾아옵니다. 삶이다 죽음이다, 나다 너다, 이것이다 저것이다, 진실이다 아니다 하는 분별에 마음을 두지 않게 됩니다. 사량분별심의 정체를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텅~빈 마음 바탕에 밝아지면 저절로 장애가 사라져 허공이 허공에 합하듯 일이 없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