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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세상, 인식은 셋이 아닌 하나다

장백산-1 2019. 6. 4. 16:54

나, 세상, 인식은 셋이 아닌 하나다(불이법, 不二法)



사람들은 보통 여기에 '내'가 있고, 내 바깥 저기에 독자적이고 독립적인 외부세계, 외부대상이 있다고 


여기는 생각을 진짜로 믿고 삽니다. 그래서 내가 내 바깥에 있는 세상을 인식(認識, 분별해서 안다)고 


여기는 겁지요. 



예를 들어 오늘 절에서 떡국을 먹었는데요, 어떤 사람은 떡국을 짜다고 느끼고, 어떤사람은 싱겁다고 


느낍니다. 그렇다면 싱겁다 짜다는 느낌은 떡국 속에 실체적으로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내게 짜거나


싱겁게 느껴지는 것일까요? 나에게 싱겁게 짜게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 뿐입니다. 내 바깥에 짠 떡국


싱거운 떡국의 고정된 실체가 있어서, 내가 그 실체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짜다 싱겁다는 인식은 


온전히 나 자신에게서 나오는 느낌일 뿐입니다. 다른 사람은 똑같은 떡국을 나와 다르게 인식하기에 


다른 사람에게는 나와는 다른 세상이 있는 것입니다. 



길을 가는 한 여성을 봅니다. 그 여성을 두고 어떤 사람은 너무 예쁘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너무 밉상


이라고 말합니다. 그 여인은 사람에 따라, 인식에 따라, 인연에 따라 존재하는 세상일 뿐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예쁜 여인으로, 다른 사람에게는 못생긴 여인으로 존재합니다. 이것을 인연가합(因緣假合)


으로 있다(존재한다), 가짜로 있다(존재한다),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아니다, 즉 무아(無我)라고 합니다. 


인연가합의 존재로 있는 것들은 진짜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인식이 있을 때만 그런 존재로 있는 것


처럼 느껴지는 것일 뿐입니다. 만약 그 여인 뒤쪽에 있던 자신의 여자친구를 보고 있는 사람이었다면, 


그 여인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을 수도, 의식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한 사람, 하나의 존재, 하나의 대상은 고정불변하는 실체로서 진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에


따라서, 인식(의식)에 따라서만 존재하는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아닌 허상(虛像)일 뿐입니다. 이것을 


십이처(눈, 귀, 코, 혀, 몸, 분별심의 육근과 육근의 대상인 모양, 소리, 냄새, 맛, 감촉, 생각의 대상), 


십팔계(십이처와 눈의 의식, 귀의 의식, 코의 의식, 혀의 의식, 피부의 의식, 현재의식)가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없기에 공(空)하다고 합니다. 즉 나,세상, 인식(의식)은 따로 따로 제각각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내가 있고 내 바깥 저기에 세상이 따로 떨어져 있어서, 내가 세상을 인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세 가지가 서로 연기적(緣起的)으로 인연가합할 때 그때만 거짓으로 진짜로 따로따로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 뿐입니다. 



육근(나라고 여기는 눈, 귀, 코, 혀, 몸, 분별심), 육경(육근의 대상인 모양, 소리, 냄새, 맛, 감촉, 생각


의 대상), 육식(눈의 의식, 귀의 의식, 코의 의식, 혀의 의식, 피부의 의식, 현재의식) 중에 그 어느 하나


라도 없다면, 대상(세상)은 결코 인식되지 않습니다. 인연이 화합되어야지만 인연 따라 진짜로 있는 것


처럼 느껴질 뿐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있어야 저것도 있고, 저것이 있어야 이것도 있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지고 저것


이 사라지면 이것도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저것을 저것은 이것을 근거로 있을 뿐입니다. 나와 


세상은 따로따로 독립적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은 서로 인연을 맺을 때만 존재하는 것


처럼 느껴지는 겁니다. 



내가 직접 떡국의 맛을 보아야 떡국이 싱거운지 짠지를 분별해서 알 수(인식할 수) 있습니다. 내게는 


떡국이 싱거운 맛인데, 다른 사람한테는 떡국이 짠 맛으로 인식됩니다. 똑같은 떡국이지만, 서로 다른 


떡국을 먹고 있고, 서로 다른 세상을 경험하고 있는 겁니다. 똑같은 떡국이 서로 다른 세상으로 연기된 


것입니다. 사람들 각자의 인식 속에서 만들어진 제각각의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이같은 이치를 일컬어


방편으로 만법유식(만법유식), 삼계유심(삼계유심), 일체유심조(일체유심조), 유식무경(유식무경)이라


말합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그것이 물질적인 현상이건 정신적인 현상이건 인연 따라 십이처가 접촉할 때, 만들


어진 꿈, 허깨비, 물거품,그림자, 이슬, 번개 같은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없는 것들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을 느끼고, 생각을 하고는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없는 그것들이 실체라고 여기고, 


진짜로 있는 것이라고 여겨서 꿈, 허깨비, 물거품,그림자, 이슬, 번개 같은 것들에 집착함으로써, 자기


만의 세상이 창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짜다 싱겁다는 느낌은 떡국이라는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있는 것처럼, 사실 대상이라


는 것이 내 바깥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분별심)이 대상을 접촉하는 인연으로 인해서 동시에 


내 마음과 대상이 생겨나는 겁니다. 내 마음과 대상은 찰나지간에 생멸하는 동시생, 동시멸이지요. 



보는 자, 보이는 대상, 봄이라는 행위 이 셋은 하나입니다. 보는 자, 보는 작용, 보이는 대상 이런 식으로 


나누어 분별할 수는 있지만, 사실 이 셋은 따로따로 서로서로 나누어져 있지 않습니다. 보는 자가 곧 봄


이고, 봄이 곧 보이는 대상이며, 보이는 대상이 곧 보는 자입니다. 이 셋은 찰나지간에 동시에 생겨나고


(同時生) 동시에 사라집니다(同時滅). 나와 세상이 둘로 따로따로 떨어져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인식하고 있을 뿐입니다. 



유식불교에서는 보는 자를 견분(見分), 보이는 대상을 상분(相分)이라고 해서, 하나의 의식을 두고 어리


석은 사람들은 보는부분(견분)과 보이는 대상(상분, 보이는 모양)으로 둘인 것으로 착각을 한다고 설합


니다. 나와 세상은 둘이 아닙니다. 내가 곧 세상이고, 보는 자가 곧 보는 대상이며, 생각하는 자와 생각


하는 작용이 둘이 아닙니다. 꿈 속에 꿈을 꿈을 꿀 때는 나와 세상이 따로따로 있는 것 처럼 느껴지지만, 


꿈을 깨고 나면 꿈 속의 나와 꿈 속 세상과 꿈 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전부가 다 허망한 한 바탕


꿈이었을 뿐임과 같습니다. 



이것이 곧 그것입니다. 것이 곧 이것입니다. 내가 곧 세상입니다. 세상이 곧 나입니다. 보는 내가 곧 


보이는 대상입니다. 보이는 대상이 곧 보는 작용입니다. 보는 작용이 곧 나입니다. 다만 생각이 착각을 


일으켜, 나와 세계를 둘로 나누어 놓았을 뿐입니다. 



이런 안목이 바로 불이중도입니다. 세상과 내가 둘이 아닌 진실한 모습 실상(實相)입니다.



-법상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