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마음을 연다 함은 상(相)에 걸리지 않는 것

장백산-1 2020. 4. 9. 21:38

마음을 연다 함은 상(相)에 걸리지 않는 것 - - 청화스님


사람으로 태어난 석가모니, 노자, 공자, 장자, 예수, 소크라테스, 플라톤 등의 모든 사람들의 본래성품, 근본성품은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또는 독사(毒蛇) 같이 징그러운 뱀의 본래의 성품, 근본성품은 석가모니의 본래성품과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모습 모습 상(相)만 차이가 있을 뿐이지 본래성품, 근본성품은 털끝만큼도 차이가 없습니다. 남을 죽인 살인자도 역시 겉만 어쩌다가 인연(因緣) 따라 강도짓을 한 것이지, 살인자의 본래성품, 근본성품도 일반인들의 본래성품, 근본성품과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성경에 베드로가 예수한테 가서 "상대편이 잘못할 경우 일곱 번 쯤 용서(容恕)하면 되겠습니까? “ 물었더니 예수 말씀이 "일곱 번씩 일곱 번도 더 용서(容恕)해라 "했습니다. 반야지혜(般若智慧), 공(空)의 지혜를 모르는 사람들은 남을 용서(容恕)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한번 미운 사람은 절대로 미운 사람이라고만 생각합니다. 사람들의 분별 망상 번뇌(煩惱)가 소멸해서 실상(實相)을 바로 보면 분명히 누구나 청정무비(淸淨無比)한 실상의 광명(光明)으로 빛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흐리멍텅한 사람들의 눈으로는 청정무비(淸淨無比)한 실상의 광명(光明)을 올바로 못 보기 때문에 미운 사람은 계속 밉게 보이고 좋아하는 사람은 계속 좋게 보입니다. 그렇다면 잘못은 어디에 있는가? 잘못, 허물은 밉게 보는 '나'한테 있습니다. 왜 남을 용서(容恕)하지 못합니까? 동체대비(同體大悲)라는 말은 다 하지 않습니까. 동체대비라는 말이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동체(同體)라는 말은 본질(本質)에서는 모두의 본래성품, 근본성품이 똑같다는 뜻입니다.


본래성품, 일여평등(一如平等)한 진여불성(眞如佛性), 근본성품이라는 방편의 말이 가리키는 '이것'에서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이 부처기 때문에 대비(大悲)라 합니다. 그냥 약삭빠른 인정이 아닙니다. 팔정도(八正道)의 정견(正見)은 방금 제가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우주(宇宙)의 모든 것들, 두두물물(頭頭物物), 자타(自他), 시비(是非) 없이 일여평등(一如平等)한 진여불성(眞如佛性), 본래성품, 근본성품이라는 방편(方便)의 말이 가리키는 '이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일여평등(一如平等)한 진여불성(眞如佛性), 본래성품, 근본성품이라는 방편(方便)의 말이 가리키는 '이것' 아님이 없습니다. 이렇게 보는 것이 정견(正見)이라,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정사유(正思惟)라, 이렇게 생각하는 견해에서 말한다고 생각할 때에 남 듣기 싫은 말 하겠습니까. 누구한테 베풀어라, 말 바르게 해라, 남을 용서하라, 우리가 정견(正見)만 굳건히 갖는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할 필요도 없습니다. 자동적으로 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약명요심(若明了心)하면 만행구비(萬行具備)라. 즉, 만약 누구나가 자기 마음의 본체(本體), 일여평등(一如平等)한 진여불성(眞如佛性), 본래성품, 근본성품이라는 방편(方便)의 말이 가리키는 '이것'를 깨달았을 때는 만덕(萬德)이 다 갖추어 온단 말입니다.


물고기를 잡는 그물의 그물코가 천 코 만 코 된다 하더라도 양쪽 그물걸이를 쭉 잡아당기면 모든 코가 딸려오듯이 우리가 내 마음이 무엇인가? 우주(宇宙)라는 것은 모두가 다 청정무비(淸淨無比)한 마음의 본체(本體), 일여평등(一如平等)한 진여불성(眞如佛性), 본래성품, 근본성품이라는 방편(方便)의 말이 가리키는 '이것' 뿐이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렇게 생각하면 저절로 모두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思想)에서 화두(話頭)를 들고, 염불(念佛)을 하고, 주문(呪文)을 해야 참다운 염불이고, 참다운 참선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참선(參禪) 그러면 화두만 의심(疑心)하면 참선이고, 화두를 의심하지 않으면 참선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께서 그런 말씀을 했습니까. 달마(達磨)스님께서 그런 말씀을 했습니까? 화두를 의심하지 않으면 참선이 아니라는 소리는 이것은 중국(中國)에서도 저 북송(北宋)때에 임제(臨濟) 일파(一派)에서 주장한 것이고, 또 우리나라에서는 이조(李朝) 오백년 동안 불교가 중국에서 청신(淸新)한 그런 기풍이 못 들어 올 때에 그러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오히려 화두 의심하면 참선인 것이고, 화두 의심 안하면 참선이 아니다. 이런 것은 전도몽상(顚倒夢想)입니다. 법집(法執)입니다.


대도무문(大道無門), 즉 부처님이 하신 법문(法門)은 주문(呪文)으로 가는 깨달음의 문(門)이나, 염불로 가는 깨달음의 문이나, 경(經)을 보는 깨달음의 문이나, 복숭아 꽃 보고 깨닫고, 길 가다가 맑은 물을 보고 깨닫곤 합니다. 사실이 이런데 염불이 참선이 아니고 경을 보는 것이 참선(參禪)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사람들의 마음이 상대적이고 유한적인 상(相)에 걸리지 않고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정견(正見)이 확실할 때는 어떠 종류의 공부나 다 참선(參禪)입니다.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부르나, 알라신이라는 이름을 부르나 다 참선(參禪)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종교는 앞으로 틀림없이 하나의 종교가 되어야 합니다. 진리(眞理)라는 방편(方便)의 말이 가리키는 '이것'이 하나 뿐인데 '이것'을 가르치는 종교가 하나가 안 될 수가 있습니까? 기독교 성경이나, 알라신의 코란이나 여러분들이 허심탄회(虛心坦懷)한 마음으로 보시면, 다시 바꿔서 말씀드려 불교의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로 조명(照明)한다고 생각할 때에 모두가 다 '이것'입니다.


지금 시대는 마음을 활짝 열 때입니다. 재가불자(在家佛子)나 출가불자(出家佛子)나 마음을 열 때입니다. 마음을 연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마음을 연다 함은 상(相)에 걸리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아상(我相) '나'라는 상, 인상(人相) '너'라는 상, 수자상(壽者相) 시간이 짧고 길고 내 생명(生命)이 짧고 길고, 중생상(衆生相) 나는 사람이고 저것은 개다, 나는 사람이고 저것은 풀이다, 저것은 자연이다, 이와 같이 구분(區分), 차별, 분별하는 상(相)이 없어야 합니다.


상(相)이라는 분별하는 생각, 차별하는 생각, 구별을 하는 생각을 떠나면 자연히 공해(公害)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물 한 방울도 우리가 오염(汚染) 시킬 수가 없습니다. 땅도 살아 있고, 돌멩이 하나도 모두가 다 살아 있습니다. 중중무진(重重無盡)의 법계(法界), 우주삼라만상만물,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전부 다 법신부처님의 무량한 광명(光明)으로 법신부처님 무량한 생명(生命)으로 충만(充滿)해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