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총명하고 영리한 마음'이 공부에 가장 해롭다

장백산-1 2020. 4. 9. 19:06

6. '총명하고 영리한 마음'이 공부에 가장 해롭다 


이번에는 크게 마음먹고 장면을 크게 전환해 보도록 합시다. 여러분들은 일상생활에서 무엇을 좌표(座標)로 삼고 있습니까? 대지(大地), 즉  '지구(地球)'가 좌표(座標) 아니겠어요? 그런데 이 지구(地球)가 자전(自轉)하면서 동시에 태양 주위를 공전(公轉)하고 있다는 사실은 다들 알고 있을 테고, 그러면 이 지구의 자전속도는 과연 얼마나 될까요?


한번 직접 알아봅시다. 지구 적도 둘레를 대략 40,000㎞로 잡으면, 40,000km의 거리가 하루에 지구가 한 바퀴 자전할 때 경과하는 거리이니까, 40,000km를 24시간으로 나누어 보세요. 40,000km ÷ 24 ≒ 1,600㎞/h . 이 시간당 속도가 바로 지구의 자전속도입니다. 여러분 자동차로 고속도로를 시속 160㎞로 달려본 적이 있어요? 아마 대단한 속도감을 느낄 겁니다. 그런데 지구의 자전 속도 시속 1,600km는 자동차의 속도 시속 160km의 10배도 훨씬 넘는 속도니까 어떻겠어요? 바로 지금 우리들은 이런 엄청난 속도 시속 1,600km로 허공(虛空) 속을 돌고 있는 겁니다. 실감이 나십니까!


그런데 지구의 자전속도 시속 1,600km 뿐만 아니라 시속 1,600km 여기에 더해서 지구의 공전속도까지 알고 나면 정말 기절할 지경입니다. 지구의 공전속도도 직접 알아볼까요? 이미 알려진 지구의 공전속도가 초속(秒速) 약 29.8㎞라고 하니까  30㎞/sec로 잡고, 초속 30km를 시속으로 바꿔봅시다. 30km×60초×60분=108,000㎞/h. 시속 108,000km 이것이 지구의 공전속도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시속 10만㎞가 넘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이 허공 속으로 돌진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집니까? 그것도 시속 1,600㎞의 속도로 자전하면서 말입니다.


시속 1,600km로 자전하면서 동시에 시속 108,000km로 공전하고 있는 이 뿐만이 아닙니다. '지구'는 태양계 안에서시속 1,600km로 자전하면서 동시에 시속 108,000km로 공전하면서 소용돌이치는 것만이 아니라, 또 동시에 태양계 밖의 수많은 별들과도 서로 껴잡고 돌면서, 다시 몇백만 광년(光年) 떨어진 안드로메다은하 같은 별무리들과도 상호운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인간의 상상력을 초월하는 장엄하고 웅대한 규모의 상호운동을 끝없이 계속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상상력을 초월하는 장엄하고 웅대한 규모의 상호운동을 끝없이 계속하고 있는 이것은 말 그대로 '혼돈(混沌, 카오스, chaos)'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점은 우주전체가 총체적으로는 이와 같이 엄청난 규모의 '혼돈상'(混沌相)을 연출하면서도, 그 낱낱의 부분들은 저마다의 조화(調和)를 유지하면서 '등속도운동(等速度運動)'을 하는 지구(地球)라는 좌표계에서는 결코 자연법칙(自然法則)이 혼란에 빠지는 일이 없으니, 참으로 묘(妙)하지 않습니까? 영겁토록 끊일 줄 모르고 이어지는 이 장엄한 무대(舞臺)인 우주전체는 그 역동성과 양적인 방대함은 물론 아기자기한 정감까지 넘쳐나고 있으니, 이야말로 가히 신성(神性)의 연출이라 할 만하지 않습니까? '전체'와 '부분', '혼돈'과 '조화', '찰나'와 '영원' 이 불가사의한 균형(均衡)은 사람들의 좁은 소견으로는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더욱 더 놀라운 건, 바로 우리들이 불가사의 하고 신비한 이 경이로운 무대의 연출자인 동시에 관객이라는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마음'은 몸 안에 있고, '경계(세상, 우주, 대상)'는  바깥에서 각기 저마다의 법칙을 따르면서 제 길을 가고 있다고 믿고 있고, 무시(無始) 이래로 그렇게 알고 살아온 우리들에게 바로 우리들이 불가사의 하고 신비한 이 경이로운 무대, 우주전체의 연출자인 동시에 관객이라는 사실이 진정 기상천외한 하늘의 북소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도 사람들이 아무런 공력(功力)도 들일 필요가 없이, 오직 한 찰나 한 생각으로 능히 우주전체를 지어 펼쳐내고, 능히 우주전체를 거두어들이니, 도대체 이보다 더한 신통력(神通力)이 또 어디 있습니까?


우리들은 온갖 것이 오직 마음이 지은 바요, '마음' 외에는 한 법도 없다는 사실을 밝힌 터이므로, 그렇다면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는 이 세상은 '마음'이 지어낸 것이라 치고, 앞에서 잠시 살펴봤던 무변광대한 우주공간(宇宙空間)은 사람들의 의식(意識)과는 상관없는, 즉 사람들의 의식(意識)이 미치지 못하는 공간(空間)이니까, 따라서 셀 수가 없이 무수한 별들은 모두 자연법칙(自然法則)을 따르면서 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착각(錯覺)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사실은 이 부분이 변덕스러운 '의식(意識'이 변전(變轉)해서 '부처라는 지혜'로 바뀔 수 있는가 없는가가 판가름나는 분수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사람들은 의식(意識)의 영역 외에 있는 것을 알아볼 수 있는 수단(手段)이나 도구(道具)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겁니다. 사람들 의식(意識)의 영역 외에 있는 것을 의식(意識), 마음, 생각으로 확인하고 알아서 취(取)하지 않는다면 사람들 의식(意識)의 영역 외에 있는 것이 어떻게 저 혼자서 의식, 마음, 생각 속으로 비집고 들어와서 알음알이(의식, 마음, 생각, 분별심, 지식)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사람들 의식(意識)의 영역 외에 있는 것이 아무리 아득한 우주(宇宙)의 저 끝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의 의식, 마음, 생각, 알음알이, 분별심, 지식을 떠나서는, 사람들 의식(意識)의 영역 외에 있는 것의 '이름'도 '모습'도 '움직임'도, 어느 것 하나도 성립될 수 없는 겁니다.


멀고 가깝고, 많고 적고, 빠르고 느리고 하는 분별하는 일체의 현상들은 모두 느낌에 의해서, 사람들 의식, 생각, 마음 속에만 존재하는 환상(幻想)이고 허상(虛想)입니다. 이건 너무나 분명한 사실인데도 사람들의 의식, 생각, 마음이 뒤바뀌어 전도몽상(顚倒夢想)이 된지 워낙 오래 돼서, 옛 어른들의 꾸지람을 면치 못하는 겁니다. 「어리석은 중생들이 '제 마음'을 '물건'이라고 하네.」···


조(肇) 법사가 이르기를, 『만 가지 일, 만 가지 형상은 모두가 '마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고, '마음'에 높낮이가 있으므로 언덕과 골짜기가 생긴다.』고 했어요. 그렇다면 이제 물질적 현상 심리적 현상인, 이 세상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 바라는 건 알았어요. 따라서 '마음'은 본래 '두 마음'이 없으므로, 두 마음이 없는 마음에 의지해서 세워진 모든 것도 당연히 '두 것'이 있을 수 없겠지요. 그런데 '수행 길'에는 늘 수많은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선지식(善知識)들은 언제나 경책하기를, 「차라리 한강 물이 거슬러서 오대산으로 흘러간다고 말할지언정, 결코 '두 것이 있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했던 겁니다.


그런데 망망한 우주공간(宇宙空間)을 탐색하다가 우리는 뜻하지 않게, 엄청난 '혼돈'(混沌)과 절묘한 '조화'라는 '두 법'이 대두하게 되었습니다. 이게 바로 위태로운 순간이에요. 이렇게 '두 법'이 나타나면, 범부의 정식(情識)은 금방 두 법중의 어느 한 법을 취하고 다른 하나를 버리려고 하거든요. 이것이 인간의 생각, 의식, 마음이 짊어지고 있는 이른바 '국소적 편향성(局所的 偏向性)', 분별하는 성질입니다.  인간의 생각, 의식, 마음이 짊어지고 있는 이른바 '국소적 편향성(局所的 偏向性)', 분별하는 성질 이것이 '일체지'(一切智)의 성취를 가로막는 원흉이에요.


의식 마음 생각이라는 놈은 자신의 그 고약한 국집성(局執性), 분별하는 성질이 여지없이 폭로됐는데도 한순간, 다시 놀라운 변신 솜씨를 발휘해서, '국집성'을 제거하고 '원융된 안목'을 갖춰야 한다고 우기는 거예요. 그리고는 다시 목소리를 바꾸어서 말하기를, 「그래, 맞아! 그 '분별심' 고약한 국집성(局執性)이야말로 모든 갈등의 원인이야」 하고는, 이내 이 '분별하는 마음'을 '분별 없는 마음'으로 바꾸기 위해서, 어두운 사람이 좋다고 권하는 '방편(方便)'을 따르면서 온갖 유위행(有爲行)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의식 마음 생각은 제가 하는 일이 또 하나의 '취사선택, 분별하는 행위'임을 까맣게 알아차리지 못하는 겁니다.


조주 선사(趙州禪師)가 대중을 대할 때 말하기를, 『도'(至道)에 이르는 것은 어렵지 않으니, 다만 간택(揀擇)하는 마음, 분별하는 마음을 멀리하면 된다.』 어때요? 여러분은 알 만합니까? 그런데 보아 하니, 여기 있는 여러분들 중에서 벌써 태반이 올가미에 걸려들었어요. 「아! 저는 알았어요」「저는 이제 안 걸립니다」·이러는 것이 올가미에 걸려든 겁니다. 오대산 밑의 노파가 한 말이 생각나는군요. 「멀쩡한 스님네들이 또 저렇게 걸려들어 가는구나!」 도무지 그 어디에도 '알았다'는 소견을 붙일 데가 없는 겁니다. 모르면'무기'(無記)에 떨어지구요. 그렇게 총명을 자부하던 사람들도 열이면 열, 다 '알 만하다, 알았다' 여기에 속거든요. 아니, 사실은 매우 역설적이게도, '총명함'이 바로 여러분의 의식 생각 마음이 교활한 변신을 이룰 때 쓰는 상투적인 '가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총명하고 영리하면 할수록 더욱 의식 생각 마음의 교활한 변신에 잘 속게 마련입니다. 참으로 바보가 되기가 어려워요. 또 바보가 된들 무슨 소용입니까.


박산(博山) 무이 선사(無異禪師)는 그의 선문경책(禪門警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공부를 하되, 그 '영리한 마음' 하나가 가장 두려우니라. 이 '영리한 마음'은 마치 독약과도 같아서 총명하고 영리한 마음에 한 번 중독되면 비록 진짜 약이 있더라도 총명하고 영리한 마음을 구제하지 못하느니라. 만약 진정한 선객(禪客)이라면, '눈'은 마치 소경 같고, '귀'는 마치 귀머거리 같고, 생각이 일어나기만 하면 마치 은산철벽(銀山鐵壁)에 부딪친 것 같아야 하나니, 이렇게 공부해야 비로소 조금은 상응(相應)하리라.』라고 했습니다.


결국 사람들이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見聞覺知) 일체의 지견(知見)은 '진실, 진리, 깨달음'을 드러내는 데는 전혀 소용이 없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견문각지'를 떠나서 '진실 진리 깨달음'을 찾는 것도 허물이기는 마찬가지구요. 왜냐면 무명실성즉불성(無明實性卽佛性)이고 환화공신즉법신(幻化空身卽法身)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의식 마음 분별심으로 굴리는 모든 생각은 그 생각이 옳건 그르건, 또 참이건 거짓이건 간에 몽땅 허망한 생각, 망상(妄想)일 뿐입니다.


사람들이 매일같이 눈을 뜨고서 부터 잠들 때 까지 '하는 일', '짓는 일'이 모두가 망상(妄想) 아닌 게 없고, 심지어 잠을 자고 꿈을 꾸는 일까지 모두가 망상(妄想) 아닌 게 없어요. 심지어 망상(妄想)을 쉬려고 하는 노력까지도 역시 망상(妄想)을 사용해서 망상(妄想)을 억누르는 것이니, 이 어찌 망상(妄想)이 아니겠어요? 무릇 '생각하는 일', '일으키는 일', 어느 것 하나 망상(妄想) 아닌 게 없다는 말입니다.


요컨대 이 모든 '생각'이 본래 생겨남(生)이 없는 줄 깨달아서 허망한 생각, 망상(妄想)에 집착만 하지 않는다면,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 눈앞, 목전, 텅~빈 바탕에  있는 이대로가 '생각, 의식 마음의 근원(根源)'을 여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곧 알게 될 겁니다. 바다에서 출렁이는 어느 물결이 '바다' 아닌 물결이 있습니까? 그러니 '분별 망상 번뇌'를 여의고 '참마음, 마음의 근원'을 찾는다는 건, 마치 '물결'을 떠나서 '바다'를 찾는 것과 다를 것이 없으니, 어찌 헛수고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온갖 법이 모두 '참마음, 마음의 근원'으로 돌아가고, 무한한 공덕이 '마음의 근원'에 본래 구족되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근심도 걱정도 다 내려놓고, 그저 호탕하게 걸림없이 사세요. 어때요, 그렇게 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참 묘한 게, 말끝마다 '자유'를 외치면서도 막상 자유롭게 마음대로 살라고 하면 그렇게 못하거든요? 그건 사람들마다 제각각 길들여진 업(業)대로 사는 게 편리하기 때문에, 각자가 제각각 길들여진 '의식의 울타리' 안에서 버릇들인 대로 사는 게 편안하니까, 그것이 마치 '자유(自由)'인 줄 알고 있어서 그런 겁니다. 따라서 지금까지 처럼 그저 늘 이것 저것 눈치나 살피면서 뭔가에 순종하기도 하고, 혹은 거역하기도 하면서 그럭저럭 살아가는 게 편안한 거예요. '완전한 자유'에는 안전이 보장되지 않거든요. 그러므로 안전하게 지켜야 할 '나'가 있는 동안에는 아무리 '자유'를 외친다 해도 다 '공염불(空念佛)'임을 알아야 합니다.


믹서가 유행하는 바람에 자취를 감췄지만 '맷돌' 알지요? '맷돌' 중심에 박아놓은 축(軸)은 맷돌질을 아무리 해도 움직이는 법이 없습니다. 세상살이에 항상 바삐 돌아가면서도 결코 움직이는 법이 없는 '본래 마음, 마음의 근원'이라는 방편(方便)의 말이 가리키는 '이것'을 되찾는 게 곧바로 깨달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건' 조작에 의해서 움직이지 않게 되는 게 아니라, 본래 이미 스스로 여여(如如)해서 일찍이 움직였던 적이 없습니다.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결코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면 틀려요. 하지 않으면 더 틀려요. 하건 하지 않건, 즉 유위(有爲)와 무위(無爲)를 가릴 것 없이, 영성(靈性), 본래 마음, 마음의 근원은 늘 스스로 여여(如如)합니다. 여여(如如)함은 오랜 동안 갈고 닦은 끝에 비로소 여여(如如)하게 되는 게 아니라, 우리의 본성(本性), 영성(靈性), 본래 마음, 마음의 근원이라는 방편의 말이 가리키는 '이것' 은 본래부터 움직였던 적이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움직이는 일이 없습니다.


옛날 사람들도 나름대로 천체를 살필 줄 알아서, 저 수많은 별들이 나름대로의 궤적을 따르면서 천공(天空)을 운행하고 있다는 걸 알았는데, 그 가운데서 유독 북두(北斗), 즉 북극성만이 늘 제 자리를 지키며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알아낸 거예요. 그래서 옛날 스승들은 참된 수행자가 구경(究竟)에 깨달아 들어가는 경지를 비유해서 북두장신(北斗藏身), 즉 '북두'에 몸을 감춘다고 했던 겁니다. 여러분도 이 점에 특히 유의하십시오. '깨달음'을 얻어야겠다고 잔머리를 굴리면서 함부로 부질없는 유위행(有爲行, 생각을 굴려 조작하는 일)을 일삼아서는 결코 깨닫게 되는 일이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도 가만히 마음을 침착시켜서 회심(回心)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늘 멍한 표정을 하고 있길래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한다는 소리가 「저는 지금 '회심(回心)의 상태'에 있습니다」 하는 거예요. 여러분, 마음을 움직여도 움직이지 않아도 모두 스무 방망이는 좋이 맞아야 합니다.


어느 날, 약산(藥山)이 가만히 앉아 수행하고 있는데, 석두(石頭) 선사가 이것을 보고 말하기를, 『그대는 거기 앉아 무엇을 하고 있는가?』『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一切不爲).』『그렇다면 '한가히 앉은 것'이로구나.』『만약 '한가히 앉아 있다'면 그것은 '함이 있는 것(유위, 有爲)입니다.』이에 석두가 말하기를 『그대는 '하지 않는다'(不爲)고 말하는데, 그 '하지 않는다'는 게 대체 무엇인가?』 하니, 약산이 대답하기를, 『천만 성인도 알지 못합니다(千萬聖亦不識).』고 했습니다. 이에 석두는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약산을 칭찬했다고 합니다.


" 무시이래로 원래부터 같이 있었으나 이름도 모르고 되는 대로 맡겨둔 채 그저 이렇게 가노라. 예로부터 천만 성현들도 알지 못했거늘 조작을 일삼는 범류(凡流 ; 범속한 사람들)가 어찌 밝힐 수 있으랴!"


훗날 원오근(圓悟勤)이 소참 때, 이 이야기를 들어서 말하기를, 『말해 보라! 필경 '하지 않는다(무위, 無爲)'는 게 무엇인고? 어찌하여 이름도 알지 못하는고? 이미 천만 성인도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함께 사는고? 그러므로 지금 목전, 눈앞,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 텅~빈 바탕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일에 대해서 결코 그대의 사량계교(思量計較 ; 생각으로 분별하고 헤아려 짐작함)를 용납하지 않으며, 가까이할 수도 없고, 귀신도 엿볼 수 없나니, 모름지기 천만 겹의 옳지못한 지해(知解)를 벗어나야만 한다. 그제서야 '마음의 눈'(심안, 心眼)이 스스로 보겠거니와, 만약'소견이라는 가시'(견자,見刺)를 제거하지 못하여 얻고 잃음, 옳고 그름(得失是非)이라는 분별의 올가미에 걸리면 영원히 깨달을 길이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 현정선원, 대우거사의 <그곳엔 부처도 갈 수 없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