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식(善知識)은 어디에 있는가? - - 법정스님
온 천지가 찌는 시루 속처럼 무더운 요즘 산중이나 시중이나 무더위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다. 낮에는 더위 때문에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지내는데 벌들이 들어와 붕붕거리는 소리가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미친 벌들이 더러 있어 지네들이 의지하고 살아가는 집주인도 몰라보고 사람을 함부로 쏘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는 이른 아침에 부엌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말벌이 날아와 내 이마를 쏘았다. 아픔도 아픔이지만 얼굴이 이내 퉁퉁 부어올라 볼썽이 사납게 되었다. 이때 나그네 한 사람이 내 곁에서 이런 내 얼굴을 보고 입방정을 떨었다. 말벌 침에 내 얼굴이 퉁퉁 부어오른 것이 내가 그 나그네에게 말을 쏘아붙인 과보라는 것이다. 그 나그네는 말을 참지 못하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망을 함부로 쏟아내는 버릇이 있어, 입은 재앙의 문이니 쓰잘데없는 소리 작작하라고 몇번을 타일러 주었었다. 이 타이름이 그에게는 쏘아붙이는 말로 고깝게 들렸던 모양이다.
내 성미가 퉁명스러움을 반성했다. 그리고 어느 땐가 무심히 뱉은 말이 누군가에게 마음에 상처를 입혔겠다는 생각이 떠올라 말을 하기 전 먼저 생각을 거듭거듭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날 배운 교훈은 될 수 있는 한 남의 일에 참견도 관심도 가지려고 하지 말 것, 타이르고 싶은 말도 반드시 상대의 인품을 가려서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벌에 쏘인 데는 약이 별로 없다. 암모니아수를 우선 바르고 나서 얼음 찜질을 하는 것이 그중 나은 치료법임을 이번에 터득했다. 누군가는 녹차를 우려 우려낸 녹차물을 바르면 해독이 되고 부기도 가라앉는다고 했지만 내가 직접 실험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 있게 권할 수가 없다.
지난번에 < 나쁜 짓을 멀리하고 어진 이를 가까이하라 >는 글을 썼더니 절에 다니는 아주머니 한 분은 지나가는 길에 들렀다가 그 글이 꼭 자기를 두고 쓴 것 같다고 했다. 아마 그녀 자신에게는 꿀리는 데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그런 교훈을 겸허하게 받아들여 그릇된 자신의 업(業/생활습관)을 개선하도록 정진해야 한다. 언젠가는 바른 가르침의 덕화를 입어 새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어떤 교훈을 자신이 선입관을 가지고 삐딱하게 생각하지 말고 허심탄회한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렸다.
글을 쓰는 나의 입자에서는 물론 내가 직접 체험하거나 간접적으로 경험한 사실들에 근거를 두고 어떤 특정인이 아닌 누구나 그럴 수 있는 불특정 다수인을 상대로 글을 쓰는 것이 상례다. 흔히 말하기를, 요즘 같은 세상에 우리 곁에 '선지식(善知識)'이 어디에 있느냐고들 한다. 그런 어진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는 소리다. 먼저 선지식(善知識)이라는 말부터 바르게 알아야 할 것이다. 선지식(善知識)을 지혜와 자비로 충만한 덕이 높은 이른바 큰스님, 혹은 자칭 견성(見性 : 본성을 보다)을 했노라고 법상에 올라가 순진한 신자들 앞에서 큰소리 떵떵 치는 그런 사람으로만 생각하지 말라.
선지식(善知識)의 말뜻은 원래 좋은 벗, 어진 친구, 착한 벗을 가리킨다. 또 나를 잘 알고 이해해 주는 마음의 벗이며, 나에게 보리심을 발하게 하고, 깨우침을 주는 사람이 바로 선지식(善知識)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명심해야 할 일은 선지식(善知識)은 객관적인 대상으로서 어떤 특정한 계층에 속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어떤 신분을 지니고 무슨 일을 하며 어디서 사는 누구이건 간에 나에게 보리심을 일으키게 하고, 깨달음의 길에 이르도록 교훈과 영향을 주고 있다면 그런 사람이 내게는 바로 선지식(善知識)이다.
화엄경 입법계품(入法界品)에 나오는 선지식(善知識) 중에는 뱃사공 · 부호 · 이교도 · 바라문교 · 수행자 · 동남 · 동녀 · 의사 · 비구 · 비구니와 심지어는 창녀까지도 들어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 중에서도 마하가섭이나 사리불 혹은 목련존자 같은 뛰어난 큰스님을 제껴두고 한낱 이름없는 뱃사공이나 이교도나 어린애나 창녀같은 사람들을 선지식(善知識)으로 등장시켰다는 점에 우리는 유의해야 한다.
또 선지식(善知識)의 열가지 덕(德)을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선지식(善知識)은 우리들을 일체지(一切智)로 향하게 하는 문(門)이요, 수레요, 배요, 횃불이요, 길이요, 등불이요, 다리요, 덮개요, 눈이요, 물결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과연 이와 같은 선지식(善知識)은 그럼 어디에 있는가. 선지식(善知識) 경전이나 어록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일상 아무데나 무수히 존재한다. 그런데 우리가 선지식선지식(善知識)과 만나지 못했을 뿐이다. 아니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이나 우리들 주위에서 마주치면서도 다만 만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선지식(善知識)을 만나지 못하는 여기에는 두 가지 허물이 있다. 하나는 선지식(善知識)을 바로 내 코 앞에 두고도 엉뚱한 데서만 찾으려는 탓에서이고 또 하나는 선지식(善知識)을 맞을 만한 준비가 아직 안돼서이다. 목마른 사람이 샘물을 찾듯이, 굶주린 사람이 음식을 갈구하듯이, 선지식(善知識에 대한 그런 간절한 바람과 소망이 있을때만 선지식(善知識)을 만날 수 있다.
마음에 받아들일 준비가 없는 사람이라면 설사 부처님(佛)을 마주하고 조사(祖師)와 자리를 함께한다 할지라도 그에게는 별다른 얻음과 만남이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게에 보리심을 일으키게 하고 깨우침을 주는 선지식(善知識이 어디 사람뿐이겠는가. 선지식(善知識)은 사람 말고도 맑은 바람일 수도 있고, 밤하늘의 별일 수도 있고, 활짝 피어 향기를 내뿜고 있는 연못의 연꽃일 수도 있다. '선지식(善知識)을 마음 밖에서 찾지 말라'고 한 옛어른들의 교훈을 거듭 명심할 일이다.
우리들 각자가 저마다 현장에서 이웃에게 선지식(善知識) 노릇을 하지 않고서는 진짜 선지식(善知識)은 만나기 어려울 것이다. 선지식(善知識)을 마음 밖에서 찾지 말고 그대 안에서 찾으라. 그렇게 될 때 비로소 만나는 사람마다 내게는 선지식(善知識)이 될 것이다.
[출처] 《법정스님 》선지식은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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