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스님의 날마다 해피엔딩

무집착(無執着) 하나가 전부다.

장백산-1 2021. 4. 18. 16:11

무집착(無執着) 하나가 전부다.

무언가를 주거나 무언가를 받을 때 기분이 참 좋다. 무엇을 줄 때도 기분이 좋고, 무엇을 받을 때도 기분이좋다.

그런데 주었을 때 좋은 기분과 받았을 때 좋은 기분은 좀 다르다. 주었을 때 기분이 좋은 이유는 무얼 까. 무언가를 주게 되면 내 것’이 줄어들기 때문에 기분이 안좋아야 할텐데 기분이 좋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우리 안의 참나, 다시 말해 온 우주법계의 근본성품이 둘이 아닌(불이/不二) 하나로, 대아(大我)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주는 자도 받는 자도 주는 것 받는 것 또한 둘이 아닌 하나의 성품이니까 무엇을 주는 것도 받는 것도 없이 그냥 기분이 좋은 것이다.

가만히 자세히 살펴보면 주었을 때의 좋은 기분은 근원적(根源的)인 기쁨이라고 할 수 있다. 받았을 때의 좋은 기분은 보통 세간적인 기쁨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면 받았을 때 ‘내 것’이 늘어나니까. 받았을 때의 기분은 들뜨는 기쁨이지만 주었을 때의 기분은 그저 담담하고 맑은 기쁨이다. 물론 주고 받고를 다 초월해 버렸다면 주는 것이든 받는 것이든 똑같이 근원적인 기쁨을 누릴 수 있겠지만 보통의 경우는 그렇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주었을 때 우리는 기쁨을 느낀다. 근원적인 통찰의 기쁨을 느끼는 것이다. 주었을 때 좀 더 근원의 마음자리를 느끼게 된다. 좀 더 본래의 마음자리, 근본성품과 가까이 하게 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주었을 때 ‘내 것’이 줄어드니까 기분이 괴로워야 하겠지만, 맑게 주었을 때는 ‘큰 나(我)’가 ‘큰나’에게 주고 또 받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그것도 ‘큰 나’가 받는 것이니까 좋은 것이란 말이다.

이런 이치 때문에 우리가 서로 베풀고 보시를 해야 하는 이유다. 보시가 단순한 복을 짓는 일을 뛰어넘어 깨달음의 씨앗이 되는 이유인 것이다. 보시를 했을 때, 그 보시 행위로 인해 기쁨을 느낄 때, 우리가 내 본래자리 근본성품과 하나가 됨을 아주 미세하게나마 느낄 수 있는 순간인 것이다.

물론 주고 나서, 베풀고 나서 좋은 느낌이 아닌 싫은 느낌일 수도 있다. 주고 난 후에 마음이 괴롭다거나 ‘내 것’을 잃었다는 아깝다는 마음이거나 허탈감을 느낄 수도 있다. 그것은 아직 집착심(執着心)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집착이 남아 있는 베풂은 기쁠 수가 없다. 참된 베풂은 집착이 없는 데서 온다.

보시, 베풂이야 말로 무집착(無執着)의 온전한 실천이다. 집착하지 않아야 맑게 베풀 수 있고, 베풀었을 때 또한 집착을 버릴 수 있다. 좀 단정적으로 말하면 베푸는 것이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무집착(無執着)이야 말로 중생들의 모든 괴로움을 풀어줄 수 있는 해답이다. 집착(執着))이 모든 괴로움의 씨앗(因)이 되기 때문이다.

모든 괴로움의 씨앗은 집착이고, 집착을 놓아야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으며, 집착을 놓으면 베풀어야 한다. 집착을 놓아버리는 것이 모든 수행의 핵심이다. 집착을 버리는 것이 마음을 비우는 것이고, 공으로 나아가는 길이며, 반야지혜를 얻는 깨달음의 길이다.

지혜(智慧)가 무집착(無執着)이고, 무집착(無執着)이 보시(布施)이며, 보시(布施)가 복덕(福德)이니 지혜(智慧) 무집착(無執着) 보시(布施) 복덕(福德) 이 넷은 '하나'로 돌아간다 귀일(歸一)한다. 그렇기 때문에 보시와 지혜는 하나인 것이다. 복덕과 지혜가 수레의 두 바퀴일 수 있는 것이다. 조금 달리 말하면 집착이 없는 행이야말로 베풂의 행위이다. 집착 없이 일을 할 때 그 일은 복덕을 증장시키며 지혜를 증장시킨다.

집착 없이 자식을 낳아 기르고, 집착 없이 회사에서 일을 하고, 집착 없이 사랑을 하며, 집착 없이 수행을 하고, 집착 없이 출가를 하고, 집착 없이 결혼을 하고, 집착 없이 길을 거닐었을 때, 집착 없이 삶의 길을 걷고 있을 때, 다시 말하면 함이 없이 무엇이든 행하고 있을 때, 그 걸음 걸음은 그대로 지혜가 되고 복이 된다.

모든 일에 집착이 없으면, 모든 행위 하나 하나에 집착이 없으면 그 모든 삶이 무량대복전(無量大福田)이 되는 것이다. 수행 따로 하고, 복 따로 짓고 그러는게 아니라 집착이 없는 행위는 그대로가 보시이고 그대로가 지혜이며 그대로가 복이 되는 것이다.

집착이 없는 행위를 하려면 과거(過去)도 미래(未來)도 다 놓아버릴 수 있어야 한다. 과거를 기억은 할 지언정 과거에 연연해 하거나 과거를 붙잡고 늘어질 것은 없고, 미래를 계획은 할 지언정 미래에 연연해 하거나 미래에 집착할 것은 없는 것이다. 과거(過去)나 미래(未來)에 마음이 걸리게 되는 것이 집착(執着)이다.

그렇기에 집착(執着)이 없는 행위는 오직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 현존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 오직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서 과거도 놓아버리고 미래도 놓아버리고 다만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 현존할 때 집착은 없다. 아니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 깨어있을 때 ‘나’도 없고, ‘남’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空)만이 남는다. 그랬을 때는 줘도 준 것이 아니고 받아도 받은 것이 아니며 주고 받은 것 또한 공(空)한 삼륜청정의 보시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 깨어있는 마음으로 사물을 볼 때 이 세상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고 옳고 그른 것도 없는 텅~빈 고요(적멸, 寂滅) 그 자체다. 좋다 싫다, 옳다 그르다 하고 고집할 것이 없으니 모든 분별심이 쉬게 된다. 모든 분별을 쉬고 텅 빈 시선으로 세상을 보게 되면 이 세상은 전혀 새로운 순간이 열린다. 이 때의 세상은 이전에 알고 있던 세상도 아니고, 내 틀 속 내 고정관념 속의 세상도 아니며, 오직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밖에 없는 어린아이같이 순수하고 텅 빈 새로운 순간이 되는 것이다. 날마다, 아니 매 순간순간이 새롭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집착이 없다는 것은 분별할 일이 없다는 말이고, 날마다 새로운 날이라는 말이며, 그러한 시선으로 세상을 살아가게 된다면 그 삶 자체가 보시의 삶이 되고 복을 짓는 삶이 되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과 그 가르침의 실천을 따로 따로 공부하고 따로 따로 실천하고 수없는 방편(方便)을 다 수행하려고 애쓴다면, 그것부터가 분별의 시작이고 번뇌의 시작이 아닐까.

하나를 잡고 늘어지면 그 하나에서 전체(全切)를 보게 된다. 무집착(無執着). 방하착(放下着) 하나만 붙잡고 공부를 하면 그냥 거기서 다 통하게 된다. 금강경도 무집착이고, 화엄경도 무집착이고, 공 사상도 무집착이고, 무아도 무집착이며, 연기도 무집착이다. 금강경의 범소유상 개시허망도, 응무소주 이생기심도 무집착이고, 반야심경의 오온개공도, 화엄경의 일체유심조도, 법화경의 제법종본래 상자적멸상도, 열반경의 제행무상 시생멸법 생멸멸이 적멸위락도, 팔만사천의 모든 법문이 무집착(無執着)이다. 조금 다르게 표현한다면 팔만 사천 법문이 다 보시바라밀이고, 무분별이며, 깨어있음이고, 지혜와 복덕이며, 관(觀)이다.

무집착(無執着), 방하착(放下着) 하나를 잡고 그냥 죽기 살기로 뛰어들면 된다. 

2009.07.07  글쓴 : 법상